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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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영-제19호 신인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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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피아 신인작품|정서영
「地球儀」 외 4편
■정서영의 시는 또한 마치 르네 마그리뜨의 그림을 보는 듯한 묘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선명한 색깔이 포착된 사물들의 독특한 이미지가 그렇고 작가가 의도적으로 비워둔 여백이 그렇다. 마치 이 여백 속에 들어가 한번 놀아봐! 하는 것 같은 당당하고 명쾌한 제스처와 군더더기 하나 없는 문장과 빙빙 에두르지 않는 직설적 화법이 또 그렇다.
――심사평 중에서
地球儀
나, 지금 지구 밖에 있다
엄지손톱보다 작은
동경 120°에서 140°
북위 30°에서 40° 안에 내 어깨와 수평으로
중국티벳아프카니스탄이란이라크튀니지스페인버뮤다미국일본
이 있고 그곳들과 수평으로
지구 밖에 꽃병책꽂이컴퓨터벽콘센트……가 있다
저 속에 사람의 집들이 퍼즐처럼 이어져 있고?
어느 집에 아이가 태어나고?
어느 집인가 문득 弔燈이 걸리고?
깨알 같은 아이들이 학교로 가고?
깨알 같은 어른들이 공장으로 가고?
지구 밖에는 여전히 꽃병 하나가 있고
먼지 쌓인 책꽂이가 있고
컴퓨터 속에서 커서가 껌뻑이며 길을 가고
흰 벽 속 불의 길로 이어지는 콘센트가 있고
봄날은 간다
구멍 난 방충망 막대기 양철조각 스티로폼 철근조각…… 같은 것
부둥켜안고 울타리가 된 것들이 있습니다
흉터 위에 동여매진 붉은 끈이 펄럭입니다
울타리가 되려면 우선 바람을 밀어내야 합니다.
마당 끝 수런거리며 올라오는 푸른 귀들과
빨랫줄에 매달린 젖은 것들에게 몸을 내주어야 합니다
꽉! 잡아.
거친 생각을 삼켜온 노을이 천천히
울타리 안으로 들어갑니다.
창문이 불그레해집니다
이따금 길 잃은 神이 지나가기도 하는
이 미래종합건축 뒷길
지금은 뽀얀 배나무꽃이 봄나비와 바람을 피우는
물음표
놀이터 쥐똥나무 울타리 앞 지렁이 한마리 사막을 향해 가고 있다
까끌한 모래 속으로 길을 내고 있다
이 아침의 축축한 공기를 끌어당기며
저 쥐똥나무 경계를 넘어왔을 그,
주름진 몸이 야위었다.
어디에 닿고 싶은 것일까
웬 낯선 행보에 날파리 한놈 심심한 듯 슬쩍 시비를 건다
무심의 발길은 어떤 징조도 외면한 채 그저 더듬어갈 뿐.
(숨통을 조여 오는 이 박제된 시간의 끝은?)
퇴근 무렵, 나는 그 지렁이의 행방이 불쑥 궁금했다
그는 아침의 그 자리로부터 네 뼘쯤 위에 있었다
기인 그림자 끌고 미이라가 되어가고 있는 몸.
그가 간 길이 선명하게 보였다
끼어들기
‘멈춤과 기다림이 생의 전부임을 말없이 가르치는 남자’*
나는 여기까지 읽고
멈췄다
내가 멈추자 내 속의 모든 여인들이 멈췄다
별을 세던 여인 밥을 짓던 여인 옷을 다리던 여인
먼지를 털던 여인 빨래하던 여인 눈물 흘리던 여인 아기 업은
여인 목욕하던 여인 악을 쓰던 여인……이 일제히 멈췄다
흔들리던 나뭇가지 피던 꽃들 날던 새들
바람 구름 밀물 썰물 파도가 멈췄다
내가 운행하던 별들이 멈췄다
그 기다림들이 일제히!
부릅뜬 노을의 눈빛처럼
*이정록의 「차선 그리는 남자」 일부 인용.
낱말 찾기
노트 위에 잉크가 엎질러졌다 순간 백지 위에 하나의 대륙이 생겨났다
대륙은 점점 부풀어 오른다 둘레에 수십 개의 발을 달고 사방으로
걸어간다
먹이를 찾아나선 전갈처럼 글자들을 하나, 둘 먹어 치우며
점점 살지는 대륙.
지구에서 사라진 동물이 있다.
붉은 가젤
․열명:RUFUS GAZELLE
․우제목:소과
․절멸 연도:1940
․분포:알제리
마디모양의 납작한 뿔을 가진 나무 이파리처럼 얇은 귀를 가진
붉은 가젤.
사라진, 살아서 내게 읽히던, 붉은 가젤도
저 대륙 속으로 사라졌을까
저 검은 잉크 속에!
검은 대륙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말들을 포획하려고!
■당선소감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는 늘 동쪽 아파트 옥상 위에서 나타나
서쪽 낮은 산등성이로 사라진다
그는 전봇대 위에 있었다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구름 뒤에 숨어 있었다
빈 소쿠리 같은 허공에 담겨 있었다
나는 그것들 사이를 천천히 걷기도 하고
높이 올라가 보기도 했다 아무리 올라가도
정수리에서 뜨겁게 나를 쏘아보는 그.
손닿을 수 없는 곳에서 이글거리는 그를
오래 바라보면 눈물이 났다
나는 오늘도 그를 바라본다
지루했던 내 視線을 詩線 속에 온전히 머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선생님과 함께 호흡하는 문우들, 그리고 리토피아에 감사드린다.
■심사평
상상력 확장의 최소 조건 갖추어
이번 상반기 신인상 최종심에는 김도혜 씨와 박형민 씨, 그리고 정서영 씨의 작품이 올라왔다. 앞 두 분의 작품도 이미 수준급에 올라와 있으나 다음을 기대하고 정서영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시의 위상(位相)이나 위의(威儀)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일각에서는 이를 크게 걱정하지만, 시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바꿀 수 있다면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ꡔ중세의 가을ꡕ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호이징가는 미래의 인류는, 어쩌면 현대의 우리를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호모 에렉투스가 아니라 호모 루덴스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성적으로 도구를 사용하여 공작하는 인간에서 감성적으로 놀이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는 인류로 변모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오늘의 시는 이성적으로 해결해야 할 모순적 상황보다는 감성적인 혼란 앞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시 쓰기가 자연스럽게 ‘놀이’로 바뀌는 것도 어쩌면 시대적 변화에 따른 진보의 일면일지도 모른다.
정서영의 작품은 신인답지 않은 면모를 보여준다. 제목 자체가 ‘-하기’나 명사형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그의 시가 관념을 실어 나르기보다는 사물 자체에 접근하려는 의도를 가졌음을 반증한다. 이러한 점은 직설적 화법과 맞물려 전체적으로 작품을 명쾌하게 만드는 효과를 내고 있다. 비록 많은 작품을 접하지는 못했지만, 주어진 작품들 속에서 ‘사막’이나 ‘노을’이라는 시어가 빈번한 것은 정서영이 황폐화되고 삭막한 오늘날의 시 쓰기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을 확보했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시인은 최소한 오늘날 시인이 어떠한 자세여야 하는 가는 알고 있는 듯 보인다. 한 작품에서 “어디에 닿고 싶은 것일까/웬 낯선 행보에 날파리 한놈 심심한 듯 슬쩍 시비를 건다/무심의 발길은 어떤 징조도 외면한 채 그저 더듬어갈 뿐.”(「물음표」)이라고 ‘지렁이’의 고통스러운 행보를 드러내고 있다. ‘지렁이’가 간 길은 ‘선명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으로서 정서영이 가야 할 길은 웅크리고 있는 ‘검은 대륙’ 속에 있을 것이다. 한 마리 짐승처럼 움직이는 ‘검은 대륙’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말들을 포획’하려면 ‘흉터 위에 동여매진 붉은 끈’과 같은 상투적인 방법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정서영의 시는 또한 마치 르네 마그리뜨의 그림을 보는 듯한 묘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선명한 색깔이 포착된 사물들의 독특한 이미지가 그렇고 작가가 의도적으로 비워둔 여백이 그렇다. 마치 이 여백 속에 들어가 한번 놀아봐! 하는 것 같은 당당하고 명쾌한 제스처와 군더더기 하나 없는 문장과 빙빙 에두르지 않는 직설적 화법이 또 그렇다. 그는 징징 짜고 매달리지 않는다. 지구 밖에서 한 손가락으로 슬슬 지구를 돌리는 장난꾸러기 여신처럼 여유만만이다.
굵고 묵직한 작품만이 시의 전부는 아니지만, 시인으로서의 패기가 살아있는 지금이 아니라면 그 기회는 영영 찾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좁고 선명한 길에서 막막한 검은 대륙으로 그의 상상력이 무한히 확장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심사위원 임강빈 김동호 이가림)
[이 게시물은 리토피아님에 의해 2024-04-25 16:31:08 신인상수상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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