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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진-제21호 신인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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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진
최명진․1976년생 현재 (사)민족문학작가회의 근무
121-870 서울 마포구 염리동 17-34번지 4층
016-609-4542, 02-313-1486
철수는 머리가 아프다
철수는 걸리버처럼 방 한켠에 철퍼덕 누워있다 방향 잃은 갈매기가 입천장을 빙빙 맴돈다 철수는 머리가 아프다 부스스한 전날의 헛것들이 머리카락에 잔뜩 얽혀있다 철수는 목이 말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본다 파리 한 마리가 요란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늙은 주전자가 화들짝 놀라 뒤로 나자빠진다 바다에서 너무 멀리 온 것 같습니다 여왕님, 가슴색이 도발적인 여왕파리가 그들의 검은 구역에서 걸어 나온다 이 방에 비린내를 풍긴 자가 당신인가, 소리는 안 나오고 철수는 뻐끔, 눈을 감았다, 뜬다, 이 거인을 어떻게 할깝쇼? 유리병에 넣어 바다에 띄우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곰곰이 이마의 주름을 잡던 여왕은 작살 같은 호령을 살 속에 던진다 철수의 옆구리를 비집고 골치 아픈 불가사리가 부지직 다리를 내민다 海痛이 밀려온다 밀려 나간다 딸깍, 하고 밤이 켜진다 수위가 가라앉은 時針, 위로 수평선이 미지근하게 그어진다 철수는 뻐끔, 눈을 감았다, 뜬다,
철수는, 어부였을까
풀잎공주
12시를 넘기면 늙은 호박처럼 펑퍼짐해진 엄마가 등장합니다 매일 어제를 살다온 엄마는 찢겨진 동화책처럼 생긴 개구리반찬을 제게 내밀고 갑니다 저는 쥐꼬리만큼 야윈 손가락, 여기는 술병이 어지럽게 널브러진 잭과 콩나무의 오두막집
<잭은 애꾸눈이다>
저는 누구도 읽지 않는 페이지에 앉아 다시 동화책을 넘깁니다 유리구두를 찾고 있었으니까요 제 사이즈는 그러니까 열다섯 겨울, 겨울엔 겨울잠을 흘리는 착한 촛불이 있고 어제는 술에 찌든 엄마 품에 안겨 슬며시 그녀의 목을 졸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잭은 왜 한쪽 눈을 잃었을까요?
잭은 탁자에서 일어날 줄 모릅니다 잭은 한쪽 눈을 잃고 말았으니까요 불쌍한 잭은 콩나무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잭의 눈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그리운 엄마가 있습니다 엄마는 동화마을 맨꼭대기에서 왕자님과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말이죠
잭은 가방을 꾸려서 정든 집을 떠납니다 유리구두를 아직 설명하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오늘은 피곤한 관계로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이 글을 복사해서 불쌍한 잭에게 정확히 99통을 전해주세요
부탁해요 안데르센
*윤동주의 「자화상」 中에서
딸깍!
철수는 아파트가 싫다 이유를 말하자면 건너편 아파트 그림자가 사계절 밤낮없이 철수의 반지하 창문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철수는 미친다 모서리마다 가렵게 일어나는 푸른곰팡이 때문에 올여름에도 고양이 눈이 됐다 그래서 어느 날 아파트옥상 난간에 올라 야옹하고 고양이 울음을 낸 적이 있다 철수는 모험심이 강하다
철수의 집엔 형광등이 많다 가난한 철수는 항상 첫 번째 형광등 밑에서만 점심을 먹는다 철수가 말한다 먹어도 먹어도 침침해 뭔가 색다른 메뉴 없을까? 집 앞에 고양이가 빈대떡이 됐다고 철수는 이슈처럼 영희에게 전화를 한다 할 말 없으면 바로 끊긴다 그날도 그랬다 철수는 대부분 밥 먹을 때만 입을 연다 거미줄이 없는 입, 철수의 입안은 이제 수많은 박쥐가 들끓고 있다 어느 날 입천장이 아! 하고 열리면 동굴 밖으로 쏟아질 비명, 철수는 호러 마니아다
철수는 비디오를 끝까지 보는 일이 없다 철수는 호러 마니아이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철수는 올여름에도 고양이 눈이 됐다 클라이맥스에서 영희는 다섯 번이나 감미롭게 목을 물린다 철수는 비디오를 끈다
영희는 신고 있던 빨간 스타킹을 철수의 얼굴에 던졌다 철수의 간절한 부탁이었다 사실 철수는 보름달을 봐선 안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 반전이 될 중요한 단서처럼 철수는 빨간 스타킹에 난 동그란 구멍 속을 들여다본다 철수는 언제부턴가 아파트의 그림자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고 노트에 빼곡히 적는다 마치 점점점 커져가는 드라큘라백작처럼, 철수는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간다
두 번째 형광등을 켠다
다리 밑에 관한 낙서
묵은 기사거리를 덕지덕지 밟고 사는 거렁뱅이
발도장을 찍으며 오후로 넘어가서는 점심도 거르고 잔다
그가 말하길
뱃속으로 뻗친 날개를 어떤 식으로 접어야 할까?
나는 자꾸 생각이 났다
<아무나 다리를 벌리시오>
장대비가 퍼붓던 날
다리 위로 우산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와 나는 기괴하게 마주친 적이 있다
천사
천사 날개 있다 천사 애꾸눈 천사 빗방울 천사 낙화하는 천사 천사 웅덩이에 고인 깔깔 까르르 웅덩이에 고인 바닥을 기는 허공을 나는 하룻밤 새 그렇게 많은 천사 갈대에 붙은 천사 천사 죽은 갈대 마디마디 천사 피나게 긁어도 등 뒤에 가리운 천사 거미줄마다 더덕더덕 손 저어도 천사 입속으로 콧속으로 천사 천사 하늘이 가리고 나무가 넘어지고 목에 걸린 눈에 박힌
행.
복.
해…… (죽겠어)
천사
끝끝내
|당선소감|
비밀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다
우리는 기괴하게 마주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내가 만든 작은 잠수정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생이 증거 할 수 있는 것이 희망뿐이라는 사실에 자주 겁먹었고 라면박스에 작은 표범을 키우기도 했고 방안의 곰팡이를 갉아먹는 귀뚜라미에게 기타를 쳐주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 알 수 없는 미지의 시공을 향해 내 안의 어뢰들을 발사시켰다 시와 나는 그렇게 기괴하게 만났다가 헤어졌다
엉겁결에 당선 소식을 전해 듣고 저 혼자 이별할 수 없는 것이 시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나는 아주 조금 떨었던 것 같다
비밀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다고 시인 이상은 말한 적이 있다 내 안의 야만은 그렇게 겨우 시작인 것이다
문단의 말석이나마 무모한 열정으로 다시 시작해보라는 뜻으로 길을 내어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가혹한 비유들을 함께 견뎌주었던 BC 3세기 동인들과 지리멸렬하지만 언제나 애잔한 원광문학회 식구들 그리고 영종이 마지막으로 언제나 내 안의 중력이 되어준 어머니 신점녀 여사에게 고맙다는 말을 이 기회에 전하고 싶다
|심사평|
부조리한 삶의 단면 묘사 뛰어나
리토피아 신인작품 당선작 심사평
기성의 때가 전혀 묻어있지 않은 그야말로 불온하고 도발적인 어조와 문법으로 읽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하면서도, 그 도전정신과 창조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적 전율을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응모한 분들의 작품을 유심히 읽어나가면서, 80년대나 90년대 시인들의 것과는 아주 다른 발상과 관찰을 보여주는 썩 참신한 얼굴의 신인이 발견되기를 은근히 기대했었다. 하지만 한 연대와 그 다음 연대의 획을 긋는 획기적인 시적 혁명아가 아무런 시대적인 필연적 동인(動因)없이 불쑥 나타날 수는 없는지라, 차분한 분석적 평가의 눈길로 응모작들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 가운데서 일정한 수준의 시적 형상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시쓰기의 전략과 문법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는 최명진 시인의 시편들이 눈에 띄었다. 안데르센류의 아름다운 동화를 도저히 쓸 수 없는 일그러진 시대에서의 부조리한 삶의 단면을, 냉정한 카메라의 시선으로 포착, 객관적 점묘법으로 묘사해 내는 솜씨가 만만치 않았다. 이른바 누보로망 계열의 ‘시선파’ 작가들이 시도한 바 있는 현상학적 글쓰기의 방법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섣불리 시인 자신이 시속에 들어가 자신의 낭만주의적 심정을 풀어놓는 것을 엄격히 절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일반적인 시적 태도와는 다른 리얼리스트로서의 독자적인 관찰법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철수’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흔해빠진 이름의 주인공을 의도적으로 등장시켜, 온통 부조리함으로 가득 찬 세계와 그 부조리 속에 불가항력적으로 갇혀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자의 절망의식을, 조금도 흥분하지 않는 어조로 묘사하고 있는 「철수는 머리가 아프다」와 「딸깍!」 같은 작품은 누벨바그 영화의 영상미학을 시쓰기의 기법에 접목시킨 수준작으로 평가할 만했다.
하지만 일상적 현실의 일그러진 모습을 전체적이고 통일적으로 직조해 내는데 있어, 그 치밀성이 다소 허약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비근한 삶의 풍경 속에서 쉽사리 시적 모티브를 찾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형상화하는데 있어서도 감각적 구체적 이미지들의 조합이 아닌, 파편화된 산문의 나열 또는 불필요한 요설을 간간히 볼 수 있어, 이 점에 대해 잠시라도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당부하고 싶다.
아무쪼록 21세기 한국 시단에 불굴의 시혼으로 새로운 시의 광맥을 뚫는 광부로 우뚝 서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심사위원:임강빈․김동호․이가림(글)
[이 게시물은 리토피아님에 의해 2024-04-25 16:31:08 신인상수상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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