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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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향란-제29호 신인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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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시부문) 당선작
최향란
먹태, 장사 지내다
황태가 되지 못한 먹태 한 마리 살짝 두드렸어요
신문지 세 겹으로 깔고 먹태 등줄기는 바다로 향해야 해요
소주병으로 찧기 시작해요. 콩콩콩, 날이 너무 풀려서
색깔 검게 된 먹태의 꿈은 정말 황태였을까요
쿵쿵쿵, 벌려진 입가가 찢어지네요
목숨 걸고 동해로 몰려온
당당한 지느러미는 있기나 했던가요
몸이 두 배로 부풀어 오르고
머리와 뼈 발라 살들만 가지런히 늘어놓고 보니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죽음, 사람의 생도
누군가의 뜨거운 한 사발 국이 될 수 있을까요
홀랑 벗은 인생
은빛 비늘을 흔들고 있어요
슬픈 식사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고 온 날에 입맛이 변했다네
서른여섯 한창 나이의 그녀 도솔천 넘었는데
영혼도 육체도 마저 다 가져가지 못하고
뜨거운 무엇 숨겨두었는지, 목관 속에서
저 홀로 무거운 그녀
내 새끼, 내 강아지, 널 하늘에서 만나려면 나도 서둘러야지
그녀도 어미에겐 강아지 새끼였고
그 강아지에겐 어린 새끼 강아지 두 마리가 있었다네
그녀의 두근거리던 사랑과 꽃처럼 흩어지던 웃음소리
바둥바둥 살아온 어두운 그늘까지
다 빠져나간 그날,
돌아오는 길에 일행 따라 보신탕집으로 갔네
내 새끼, 내 강아지 새끼라는 말이
아직 귓가에서 아우성을 치는데
살아있어 한 끼 채워야하는 식사가
하필이면 푹 끓인 보신탕
제 할일 다 못 끝내고 서둘러 간 젊은 개와
남아서 가슴 뜯는 늙은 개와
영문 모르고 마지막 절을 올리던 어린 새끼 강아지를 기억하고
그녀가 떠나면서 주고 간 눈물 맺힌 ‘내 강아지 새끼’를
두 손 가득 받아들었네
그렁그렁 울음소리 문턱을 넘어가고 있었네
또 다른 풍장
둥글던 묘는 서서히 형태를 잃어가고 있었다
서툰 곡괭이질 눈치 챘는지 일손을 돕는 옆으로
툭, 툭, 떨어지는 동백꽃
산그늘은 잊었던 시간처럼 스르르 다가와서
꽃 무덤 위로 낮게…… 낮게 내리고
서둘러야지, 맘먹은 것처럼 만만치 않은 곡괭이
짙어오는 하늘 한 귀퉁이를 쾅쾅 찍어댔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물결 건너
몇 번씩 제 발등을 찍어대는
나는 자꾸만 낯설게 튕겨나가는 곡괭이였다
푸른 손들어 두려워마라 다독이는 바다
견고했던 살 다 버리고 세상 안으로 잠시 돌아온
당신은 가지런히 동백꽃 위로 걷혔다
느그 어머니가 참 고왔는디 뼈까지 곱게 남으셨구나
더 좋은 곳으로 모시고 가는 거라고 언능 말씀 올려라
햇살을 받고 바람을 영접하라는 속삭임은
낯선 꿈인지 모른다
연분홍 유골단지 속으로 또 다시 가벼이 가는 당신과
뜨거웠던 제 몸 스스로 열어 가벼워지는 저 꽃
그렇게 가고 그렇게 보내고
끝내 못한 말 그.립.다 는
아득한 빛깔만 남았다
늙은 감나무와의 사랑
가사리 들판 한 입 베어 먹고 싶은 날이 있다
늙은 감나무는 감꽃 몇 개 매달아 놓고
가을 내내 감 익는 소리만
둑길 지나 가막만으로 흘려보냈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하는가
늙은 감나무와 처음 눈을 맞추고
그를 껴안아 주고 온 밤
멀리서 누구의 가슴 뛰는 소리 들었다
그 밤, 붉은 감은 더욱 붉어지고
붉은 잎은 더욱 붉어졌으리
감나무 아래 웅크리고 앉아 한나절을 보내고
잘 익은 감 몇 개 얻어 집으로 가는 길
가을걷이 끝난 들판으로
저녁 해가 맨발로 걸어왔다
나 언제 허리 굽혀 누군가를
사랑한 적 있었던가
발가락 사이로 흘러가던
그 가사리 물길 속으로
늙은 감나무는 마지막 감을 툭 놓아 보내고
내 속에는 착한 시가 뚝뚝
감처럼 익는다
개구리밥을 본다
뿌리를 내려도 땅에 닿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도 뒤집어지지 않는
손톱만한 잎으로 둥둥 떠다니는 운명
당신이 떠난 더운 여름날
굳이 꼿꼿이 서있을 필요 없다는 걸 몰랐었던
종아리에 경련이 일어난다
그러나 잎처럼 보이는 저것이 사실은 잎도 아니고
꽃을 피우고 새 엽상체 만드는
줄기이면서 잎인
땅에 닿지 못할 뿌리여
누가 알맞은 바람과 햇빛을 보냈을까
여름을 덮은 채 한 잎으로 일렁이는
간밤에도 딴딴해진 슬픈 장딴지
당선 소감
며칠 동안 앓았던 감기를 털어내며
일찍 어머니를 잃은 후로 나는 한 마리 고슴도치로 살았던 것 같다. 인연의 끈을 모두 붙잡고 있으면서 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미련한 삶은 홀로 지독했다. 그렇게 너무 많이 흘려보낸 시간. 그 세월을 모두 부질없다 않겠지만 이젠 질긴 끈을 하나씩 놓으며 새로운 다른 자리를 마련하고 비우는 대신 채워보기로 한다.
언젠가부터 내 편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편을 왜 따지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겠지만 그냥 한쪽 어딘가가 따스해지기 때문이다. 어릴 적 형제가 많은 집 애들과의 싸움은 피하고 싶은 그런 마음…… 어머니는 내게 아우 하나는 남겨 주셨다. 내 편이 적다고 더욱 날카롭게 세웠던 손톱에 상처를 입은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나는 손톱을 세울 수도 안으로 감출 수도 없는 세월을 또 오래 보냈다.
내 시도 내 삶과 같아서 오래도록 외로웠다. 이젠 툭툭 털어내며 살아야지 마음먹으니 차라리 편안하다. 그래서 손을 잡아주고 내 시에게도 새로운 둥지를 마련해준 리토피아께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린다. 갈무리 동인과 여수 선배님들은 늘 위안이 되었던 이들이다. 채워야할 것들이 많아졌으니 몸도 마음도 시도 튼튼하라고 아직도 곤두선 내 어깨를 토닥거려줄 것이다.
아픈 것도 자주하다보니 습관이 되는 건지 때로는 덤덤하게 이겨내기도 하나보다. 이번이 마지막 아픔이 아닐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지만 이젠 두려워하지 않기로 한다. 며칠 동안 앓았던 감기를 털어낸다./당선자 최향란
심사평
진부하지 않은 진정성이 돋보여
섣부른 치기와 기교로만 포장된 시들이 좋은 시로 선정되는 것을 보며 오독이 주는 폐해와 위태로움을 실감하게 될 때가 이따금 있다. 날렵하고 튀는 이미지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영혼이 없는 몸을 보는 것 같아 공허하고 섬뜩하다. 최향란의 시는 전통서정의 형식 속에서도 진부하지 않은 진정성이 돋보인다. 그의 시에는 슬픈 생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겸손함이 있다. 생의 막간을 꼼꼼히 읽으려고 노력하는 성실함도 있다. 가끔 주제와 맞지 않는 상황들이 느닷없이 끼어드는 면이 있기는 하나, 억지로 늘이지 말고 통일된 이미지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습관을 가지면 좋은 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분이다. 축하를 보내며 좋은 시를 쓰는 겸손한 시인이 되었으면 좋겠다./이경림(시인, 본지 심의위원)
[이 게시물은 리토피아님에 의해 2024-04-25 16:31:08 신인상수상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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