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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람-제31호 신인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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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람-제31호 신인상(시)
김사람
방
차가 잘 나가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뒤가 묵직하고 찝찝해
시원스레 달리질 못했다
트렁크를 열었다
갈아입을 속옷과 바지에는 당시 가족들 마음 그대로 엉겨 붙어 있었고
내가 멋대로 부려놓은 짐더미에 눌린 고무신이 그 누구의 발도 거부하며 형체를 구겼다
아버지를 떠받치며 노심초사하던 터질듯 부풀어 있던 욕창 방지 쉬트, 곰팡이 퍼져 얼룩진 채 긴장을 풀어버렸다
트렁크는 혼자 누워계시던 어둑한 아버지의 방
검은 산소로 따분한 호흡을 하고 계실 아버지 생각에
퇴근 후 곧장 집으로 향하던 시절처럼
한 해가 지나도록 아버지를 등에 업고 달려왔다
평생토록 정리한 적 없던 아버지의 방을 비웠다
동사무소에서 딸아이 출생신고를 한다
방을 하얗게 꾸며야 할 시간이다
장님 M씨는 밤을 무서워한다
소리들이 멀어져 가는 것은 밤이 오는 증거다
가만히 창에 붙어 숨죽이며
있어야 할 만한 위치를 탐색한다
앞은 늘 보이지 않았기에
우아한 곡선 그리며 날아본 기억이 없다
순탄한 길 옆에 두고도 휘청이는 비행
어디든 트인 길일 것만 같은 허공은
난간과 계단을 수시로 이동하며 앞을 가로막았다
힘이 풀려 툭, 떨어질 때마다
날개가 짧아져 가는 것 같아
몸을 뒤집으며 확인을 한다
어두움은 나방의 작은 몸을
드라이아이스처럼 기화시키는 걸까
밤이 되어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
누군가의 체온이 그리울 때면
백열등에 몸을 비비고
창에 머리를 박고 박으며
한참 울어도 본다
어느 순간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 것만 같아
하얀 눈 부릅뜬 채 몰인정한 밤을 지켜보는 것이다
모짤토벤 신드롬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오선지 같은 나무 가지마다
차곡차곡 걸린 음표들이 바람 햇살 새들의 노래를
알맞은 비율로 엮어 화음을 만들었다
그는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뿌리까지 말린 파마머리가 그의 뇌까지 헝클어 놓았다 아니다
헝클어진 그의 뇌가 그의 머리를 깊게 말았다
세상은 예상보다 질서 정연한 것들이 자리 틀고 있기에
빈틈 많은 사람들의 머리칼은 탄력을 잃어 구불구불해져 갔다
계절의 끝무렵이 되면 그는 피리를 불었다
음표들이 오선지에서 미끌어졌고
바람은 앰프 하울링처럼 음정 없는 괴성을 토해냈다
불협화음에 놀란 사람들의 귀가 하나둘씩 먹어가자
그는 펜으로 지휘를 하기 시작했다
일렁이는 바다로 새들이 레가토로 뛰어들었고
검은 눈이 스타카토로 떨어졌다
나무는 베이스 음정을 찾아 땅의 중심으로 뿌리를 내렸다
계절의 끝은 격정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는 온전하게 또 한 계절을 인내할 수 있을 것이다
빈틈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쳤다
냉동인간
심장은 0℃ 이하에서 작동해요
새 환경에 적응하려면 준비가 필요하죠
생이란 순간적으로 뜨거워
금세 얼리기는 쉽지 않아요
그렇다고 무작정 때를 기다리면
서늘히 식어 진물 흘리죠
남은 온기 사라지면
가장 얇은 틈 비집으며 파닥대는 그리움의 비린내
냄새가 나 냄새가 나 진저리치다 익사할지 몰라요
속을 서늘히 담금질할 시간이에요
냉기가 거미줄처럼 쩍쩍 들러붙어요
낡은 육체와 포화 상태인 기억,
불에 달군 바늘 끝 같은 그리움이
얼음 두른 박제가 될 거에요
사흘 동안 보관되다 마취 풀리는 날이면
나 또한 꽁꽁 얼어붙어야하겠죠
하늘에 새집 장만한 당신께
조만간 이사 간다는 편지 부칠게요
어머니 찬송가 안주 삼아 소주 드시다
입질 오면 주저 말고 줄을 당기세요, 아버지
사오정의 후예
TV는 귀가 없다 듣지 못하면서 말할 줄 아는 천재다
연출된 언어는 나름 각각의 대화를 짜깁기하고 나는 송곳을 들고 채널 속으로 들어간다
# ch 366
방에 앉아 눈을 끔벅인다 안액 말라 뻑뻑한 소리 귀가 먹먹하다 나의 혓바닥인 듯 거실 문고리가 덜렁거린다 늘어난 스프링의 탄성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인지 경적 울리며 차가 달려와도 지나는 늙은 개의 꼬리가 꼿꼿이 서지 않는다 소통에 대한 의지라고는 보이지 않는 저들은 타인의 언어를 잊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형식적인 인사조차 외면하는 듣지 못하는 것들
# ch 367
차를 몰아 교차로에 선다 알록달록 표정 바꾸며 명령하는 신호등은 서너 개 말만 하는 앵무새 정지! 직진! 좌회전! 우회전! 4지 선다 중 나의 말 따위에는 관심 없이 선택만을 강요한다 차선을 잘못 들어선 나는 차선과 차에 갇혀 갈 곳을 잃는다 문득 귀 틀어막고 후진기어 넣어 엑셀 꾹, 밟는다
# ch 368
이어폰을 귀에 꼽고 걷는 사람들은 충돌한 차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각자의 리듬을 타며 걷는다 시청 시계탑 초침은 일정박을 유지하며 지나는 사람 하나하나 지시하고 이탈을 방지한다 검은 선글라스 낀 경찰이 내뱉는 혀차는 소리가 부상자의 마지막 신음 밟아버리고 몸을 뛰쳐나온 붉은 소리마저 하얀 선으로 가둬버린다 무전기로 주고받는 알 수 없는 대화 앞, 떨어져 나간 한쪽 귀가 바닥에서 파닥거린다 "여보오, 내 입에 청진기 좀 대어줘!"
잠을 자기 위해 밖으로 기어나온다
TV에서는 얼굴 벌건 국회의원들이 출연한 100분 토론이 한창이다
출연료 대신 보청기를 사은품으로 줘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
나는 귓구멍을 뚫기 위해 TV를 송곳으로 마구 찌른다
당선 소감
등단은 낙인을 찍는 일
절망이 연약한 곳을 흉측하고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가장 소중한 것들이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서야 시는 내 속에서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시는 나에게 두려움과 절망 그리고 고통을 적나라한 형체로 보여줬지만 버릴 수가 없었다. 아직은 숨을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시를 버리는 순간 내 숨이 멎을 것이다. 등단을 한다는 것은 시인의 삶을 본격적으로 살아야 하는 낙인을 찍는 과정이다. 나의 시에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 나는 시인이 되고 싶다.
평생 그리워만 해야 할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다……. 철없는 동생을 챙겨주고 아껴주는 누나 형님 형수님, 조카 시원이, 따뜻하고 너그러우신 장인어른 장모님 그리고 예쁜 처제, 시의 첫 단추를 끼워주신 채석준 시인님, 그리고 리토피아의 신인으로 선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끝으로 내 인생 단 한 명의 여자와 나의 분신 연우에게 사랑을 전한다.
당선자 김사람
내면 의식의 묘사가 특히 뛰어나
김사람의 시는 일상의 예민하고 미세한 현상들을 주의 깊게 투시하는 시선이 돋보인다. 일상적 사건과 상황들을 시의 제재로 삼을 때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는 상투성과 평범함이다. 일상은 보편적 정서에 호응하기 쉬운 소재이다. 그러나 양식화된 정서와 익숙한 감성에 부합하다보면 개성과 독창성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김사람의 시는 보편적 감성을 자극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과 미묘한 상상력을 드러내고 있다.
「냉동인간」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보내야하는 자식의 심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절제된 정서, 객관적 시선, 긴장된 서술, 다소 시니컬한 전개 방식에서 느껴내는 시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이밖에도 다양한 비유를 통해 음악인지는 타자화된 거리감은 시의 마지막에 이르면 망자亡者에 대한 따뜻한 그리움의 감성으로 통합된다. 김사람 시의 매력은 자신의 생각과 정서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통합하는 능력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한 「방」 또한 고통스럽고 피로한 삶의 기억들을 담아내면서도 상투적인 이미지를 과감하게 털어의 혼과 정신의 아름다움을 설득력 있게 묘사한 「모짤토벤 신드롬」, 소통을 상실한 현대성의 징후를 포착한 「사오정의 후예」, 단절과 소외의 현대인의 심리를 ‘장님 M씨’로 비유한 「장님 M씨는 밤을 무서워 한다」도 인상적이다.
김사람 시의 우수성은 무엇보다 시적 정서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조율할 줄 아는 미학적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긍정과 부정, 삶과 죽음, 연민과 냉소, 포용과 배제, 유희와 비관의 감각이 서로 대치되지 않으며 매끄럽고 조화로운 균형감을 유지한다. 아마도 부단한 자기 노력의 과정이 만들어낸 결과라 생각한다.
아쉬운 부분은 전체적인 시의 서술 방식에 있어 일관된 진술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묘사와 진술, 정서와 감각을 전달하는 문법이 공통적인 뉘앙스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자칫 시를 밋밋하게 할 수 있다. 좀더 활달하고 다양한 문법형식과 서술 구조를 통해 다차원적인 의미 구조와 시적 감각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강)
심의위원-이경림․고명철․강경희․김남석․장종권 심사평
[이 게시물은 리토피아님에 의해 2024-04-25 16:31:08 신인상수상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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