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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일-제31호 신인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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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일-제31호 신인상(시)
황성일
153년
남극의 눈 속에서 냉동인간이 발견되었다. 실종 153년. 그의 나침반은 남쪽으로 얼어있었다. 햇빛이 이어붙인 자국도 없이 그대로 그의 눈에 떨어진다. 현재시간 밤 11시. 그의 검은 입술 사이로 드러난 치아들이 눈덩이를 가득 문 채 침묵하고 있었다. 얼마간 말을 잇지 못하던 사람들. 떡 벌어진 입 안으로 153년 전의 눈발이 날아든다. 사람들이 기침을 한다. 어떠한 바이러스도 없다는 남극에서, 306번째 떠오른 해가 저물기 시작한다. 아침 11시. 그의 입에서 153년간 몸속을 흐르던 입김이 새어나온다.
남극의 냉동인간이 구조대원을 발견했다. 해가 뜨고 진지 10개월.
잠수함
버려진 잠수함처럼
흰 수염고래 한 마리 떠밀려왔다.
눈도 없는 생물들만 산다는 심연에서
보이지도 않는 플랑크톤만 먹는다는 고래.
꼬리지느러미에 달라붙은 잔잔한 별빛이
하나둘씩 하품하며 눈을 감고 있는 새벽.
낚싯대를 드리우고 오래 떠밀려온 노인.
자꾸만 바람에 휘날리는 수염을
손질하다가, 쿨럭쿨럭 플랑크톤을 토해낸다.
노인의 눈가에 남은 마지막 소금물이 반짝일 때,
흰 수염고래 잠수함 문이 굳게 닫히고,
등에선 황금 햇살을 뿜으며 바다로 돌아갔다.
분홍 다이어트
아침엔 보라색 오후엔 파란색 저녁엔 오렌지색 이게 제 세끼 식사죠. 자기 전엔 초록색. 쉽네요. 하나 둘 셋 넷 그래요. 색깔 다이어트 약은 최고의 효과를 자랑하죠. 약간의 부작용이 있다면, 마약 성분이 들어 있어, 가만히 있어도 행복해진다는 것이죠. 할머니가 다이어트를 해요. 제가 잘 아는 할머니죠. 다이어트에 성공하셨답니다. 부탁이 있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알약 색깔처럼, 하루가 알록달록해지고 싶어요. 탈출하고 싶단 말이에요. 쇼 윈도우 속 여인의 원피스로 탈출하고 싶어요. 저도 할머니처럼 가만히 있어도 행복해지고 싶단 말이에요. 1센티미터씩 행복 쪽으로 가고 싶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불 좀 꺼주실래요? 예전엔 그러지 않았잖아요. 이제 그만 닫아주세요. 아, 참. 할머니가 암에 걸린 걸 안 건 다이어트에 성공한 그날이었죠. 이 세상 가장 무겁다는,
그림 같은 집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 한 채가 있다. 다락방 창가, 할머니가 초원의 풀들을 수놓고 있다. 아래층 부부의 방을 파고드는 찬바람. 사랑은 해도 해도 춥기만 했다. 풀들 사이에 꽃들을 피워, 꽃들을 박음질하기 시작한 할머니. 계단을 타고 흘러가던 바람을, 아래층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라버렸다. 어머, 당신 멋진 사람이군요. 아래층 부부가 아이들이란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놀 때도 자르는 놀이만 했다. 피 묻은 칼을 닦으며 아래층 남자가 말했다. 진정해, 할머니는 자연사였어. 아래층 남자는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락문을 열었다. 다락엔 할머니가 베고 잠든 십자수베개, 할머니 등에서 태엽이 돌고 있었다. 그가 할머니의 수놓은 베개를 베고 쓰러지듯 드러누워 그리하여, 초원의 집 한 채를 힘겹게 완성한 할머니. 서늘한 초원의 풀냄새가 번져온다. 베개처럼 아늑해 보이는 집.
춘곤증
설악산 흔들바위를 흔들 수 있는 건
봄바람뿐이다. 새소리가
기우뚱하는 것도,
민들레꽃이 흔들려 홀씨가 날아가는 것도,
나비가 마루에 잠든 사내의 코끝에 앉아
콧김 따라 흔들리는 것도,
제주도 아낙네들이 밭두렁 가에
놓은 요람이 흔들리는 것도,
봄바람 때문.
백두산 천지가 출렁 넘쳤다가 다시 담겼을 지도.
설악산 흔들바위가 기우뚱 굴렀다가
다시 기우뚱 제자리로 돌아오듯
어느 누구도 잡아 주는 이 없지만
바람에 몸을 맡겨도 다치지 않는
눈감으면 4월, 이런 계절이 있다.
당선 소감
더 혹독한 질문 속에서 살아갈 것
그저 시를 읽는 것이 좋았을 뿐인데, 어느 날 시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아직까지 세상 경험이 부족한 지라 영화를 보며 간접 경험을 통해 시를 쓰기도 했고,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어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간 시를 제대로 쓰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간혹, 깊은 정서를 드러내기 보다는 시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시를 쓰기위해 얼마나 뜨거운 가슴을 가졌는가에 대한 혹독한 질문 속에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시를 통해 시를 좀 더 깊이 있게 알아 가는 것이 아직까지 설익은 저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시를 선해주신 심사위원님과 제 분수에는 너무도 벅찬 ‘리토피아’, 그리고 시에 대한 질문을 받아주시고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최영철 선생님, 조풍호 선생님, 물심양면 함께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당선자 황성일
심사평
언어 직조 능력의 탁월성 높아
황성일의 시는 신선한 소재의 발견, 발랄하고 역동적인 상상력, 개성적인 감수성이 돋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칭찬할 만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직조織造하는 언어 능력의 탁월성이다. 그의 시는 상황에 대한 세부적 관찰과 묘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묘사적 진술에 치중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획득한 고유한 감성을 독자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냉동인간의 발견’을 소재로 한 「153년」은 신선한 소재를 선택한데 그치지 않고 상상력의 활달함과 참신한 의미 구조를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153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내장하고 있는 냉동인간과 구조대원의 극적인 만남은 상실된 시간을 교묘히 접합시키며,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소멸시킨다. “153년간 몸속을 흐르던 입김이 새어”나오는 냉동인간의 모습은 시간을 초월해 살아있는 한 인간과의 뜨거운 조우를 보여준다. 특히 “남극의 냉동인간이 구조대원을 발견했다”는 마지막 구절은 사실의 왜곡을 통해 감동적 진실을 이끌어내는 역발상의 신선함을 보여준다. 또한 “현재시간 밤 11시” “306번째 떠오른 해” “아침 11시”
“해가 뜨고 진지 10개월.”과 같은 표현은 ‘남극’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시간과 사투를 벌이는 생존현장의 긴박성과 절실함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한다.
황성일의 씨의 시는 ‘노인’을 대상으로 삼은 경우가 많다. 어부로 짐작되는 노인의 삶을 ‘흰 수염고래’로 상징화한 「잠수함」, 암으로 투병하는 할머니의 절망적 일상을 행복한 ‘다이어트’와 결합시켜 삶의 비극적 아이러니를 보여준 「분홍 다이어트」, 잔혹하고 냉정한 오늘의 삶을 풍자적이며 그로테스크하게 그려 낸 「그림 같은 집」 또한 ‘할머니’를 주된 인물로 등장시킨다. 황성일 씨는 소외와 무관심, 외로움과 죽음의 고통에 방치된 노인들의 삶을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끔찍하고 냉정하게 변해버린 부정적 삶의 징후들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의 시는 노인에 대한 시적 관심이 익숙한 정서와는 다른 새로운 시각과 내용으로 재해석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연민과 동정, 과민한 제스처, 사실적 묘사에 치중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황성일 씨의 시를 진부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라 할 수 있다.
황성일 시의 매력은 새로운 비유 체계의 과감한 도입, 역설과 반전과 묘미, 실험적 문법과 유니크한 진술 방식, 이질적 감성을 자유롭게 혼합하고 충돌시키는 활발한 상상력이다. 뿐만 아니라 「춘곤증」과 같은 시는 그의 시가 다양한 시적 소재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풍부한 시적 감각과 정서를 지니고 있음을 예견하게 한다.
충고를 덧붙이자면, 간혹 매끄럽지 않는 호흡, 완결된 시형식에 대한 지나친 의도로 조성된 패턴화된 구조에 의존하려는 경향, 인물을 주된 시의 소재로 삼으려는 태도이다. 특히 비슷한 소재의 선택과 내용적 접근은 시의 의미구현에 있어서도 획일성과 유사성을 지닐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강)
시를 쓰는 일은 평범한 현대인의 삶 속에 자칫 묻혀버리기 쉬운 세계의 진실을 섬세한 시인의 눈으로 포착해 내어 가장 동시대에 맞는 언어로 보여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황성일 씨의 153년, 춘곤증, 잠수함 등은 그런 현대시의 a,b,c를 잘 갖춘 시라 할 수 있다. 습작기 젊은 시인들의 시들이 현란하고 새로운 기법에만 심취해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리얼리티를 놓치지 않고 선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점이 높이 살만 했다. 기법이란, 말 그대로 좀 더 효과적인 소통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현란한 언어놀이에 빠지고 관념에 떨어져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자신도 모르는 시를 낳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
심사위원-이경림․고명철․강경희․김남석․장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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