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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원-제32호 이 시인을 다시 본다(재발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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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을 다시 본다/재발굴|
장재원
물방울에 대한 명상 외 4편
태초부터 누군가의 계획에 의해 거듭거듭 진화 중에 있다는,
한 마리 에메랄드빛 작은 강꼬치고기나 삐죽코물고기였다는
그렇다면 흘러드는 시원의 진흙 뻘물도 본래 한 몸이리
흐르다흐르다 지구 끝에 이르면
금방 물속에서 나와 물가 쪽 풍경을 조심스럽게 곁눈질하며
내 앞으로 오는 무구한 한 마리 개구리처럼
나 또한 저 광대무변한 우주의 바닷가에 눈 비비고 서리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을 밀어 올렸던 혈관 속 미세한 맥박 소리,
날숨 한 번으로 밀어 올린 그 산맥들 다시 한 순간에 휩쓸어버릴
깊은 지각 아래에서 울리는 영원한 맥박 소리,
내 안의 작은 물방울
오랜 바다로 막힘없이 삼투되는 물길을 열어
다시 한 몸으로 노래하고
굽이굽이 좁은 몸속에만 갇혀 소용돌이치던 서러운 물방울들
콸콸 소리치며 흘러내려
시원의 넓은 심해에 닿으리
로렌 아이슬리의 <광대한 여행>에서 인용.
왕버들나무, 그 여자
주막거리 작부의 딸이라고 수군덕거리는 입방아에
죄 없는 어린 마음 마구 흔들렸단다
홀로 간직한 수치심의 잔가지들 실타래처럼 엉켜
허구헌 날 고개 숙여 하릴없이 제 발가락만 세었단다
까닭 모르게 시름시름 아픈 몸은 치렁치렁 처녀 되었어도
무성한 잎 매달고 하늘 향해 꼿꼿이 선 정자나무처럼
그윽한 그늘 하나 만들지 못했단다
시집간 지 나흘 만에 멀쩡하던 남편 죽어나가
서방 잡은 살 센 년으로 세상에 머리끄덩이 잡혔단다
궂은 날이면 산발한 채 하염없이 흐느끼다가
급기야 애꿎은 제 몸에 채찍 휘두르며 미쳐갔단다
그렇게 허방처럼 구새 먹은 하 세월 인고 속
천 근 바위로 이고 있던 허공
앉은 자리 꽃자리 되도록 오랜 무병巫病치레 떨치고 왕버들로 변해
마침내 아홉 장군 모신 몸 되었단다
청명 하늘로 집채만 한 한 그루 만신기 펄럭이며
좌우로 낭창낭창 휘어진 무수한 새끼들 거느리고
청정 햇살, 바람, 향기 한데 휘휘 감아
찾아오는 서러운 가슴들 달보드레 달래주는 신어미 되었단다
우리 고향 왕버들나무, 그 여자
압력밥솥
지금 뜨거운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미사일표 압력솥에 쌀알 같은 이념 한 움큼, 연둣빛 완두콩 서정도 약간, 피와 살이 되는 밥을 짓듯.
눈빛만으로 전언하는 은유의 우윳빛 뜨물 알맞게 붓고, 단단한 혁명 공약으로 박힌 마그마의 심지 불 댕겨 새파란 시혼詩魂 작렬함에 따라 시작된 알루미늄 솥 속 뜨거운 혁명. 칙, 칙, 칙, 정수리로 연실 하얀 피가 솟아오르고 딸각딸각, 우뇌, 좌뇌, 모든 세포가 울컥울컥, 하얀 쇠솥단지가 달걀처럼 익어가는 저녁, 휴우, 설익은 산문도 시가 되는 패자의 김빠진 선언도 백기를 들 때 자작자작 사랑의 훈김, 은근한 조탁으로 마지막 정성 어린 뜸을 들이고 나면, 격렬했던 격전장에는 생명의 성찬을 위해 즐겨 희생된 언어의 씨앗들, 따뜻한 밥 한 그릇, 비로소 완성된 혁명의 땀 닦으며 고귀한 찰밥을 든다.
어떤 꽁까이 술집
땅거미 내린 도시 어둑한 골목, 핑크빛 전등불도 희미한 네 평 남짓 굴 속, 서리 내린 마담, 까만 머리채 치렁한 그 딸들, 끈끈이주걱 같은 손 내밀어 어쩌다 걸려든 헐렁한 사내 둘 사로잡는다. 안기듯 감기어서 잦아들듯 따라 준 술잔 비우고, 황송한 안주 대신 손가락만 빨고 나면, 처량히 늘어지는 사이공 아리랑, 한시도 잊지 않았던 반나마 흐르는 배달의 피, 그 자랑스러운 아버지 나라에 왔어도 그리운 따이한 아비가 없어, 밤마다 검은 꽃으로 피어나는 꽁까이들, 오늘도 흐릿한 붉은 등불 아래 기억에도 머언, 아버지…… 아버지처럼 서러운 가슴 보듬어 줄 어느, 어느 사내 품이 그립다.
밤꽃
6월 물오른 피부엔 툭 툭 도홧빛 열꽃들 터져 오르고
몸피 살피 풍만 팽팽해져 가고,
나날이 젖은 사타구니 녹음 무성해져 갈 때
아흐,
시뻘건 태양, 너, 너로 향한 욕망 더, 더는 주체할 수 없어
무수한 꽃자루마다 강한 페르몬 향기로 분칠한 채
부끄러움도 잊고 바야흐로 저 혼자 한창 오르가즘이구나
당선소감
눅진한 화약 냄새 풍기는 흐린 나날들, 절룩이는 숲속 사냥길은 달팽이처럼 속으로 기어들어만 갔다. 흐려진 시야로 더듬이를 움직여 이리저리 총구를 겨누어 보았지만 메아리 없는 총성만 이명처럼 울렸다.
호피와 박제로 장식된 숲의 영광이여, 정글을 헤치고 산맥을 굴렀던 야성의 금빛 광휘는 다시 타올라야 하리라.
다시 가죽 신발끈 질끈 동여매고 온몸 세포마다 푸른 날 곧추세우면 잊혔던 포효소리, 따라 끓어오르는 피, 거침없이 내딛는 힘찬 발걸음 앞에 내내 보이지 않던 숲길 비로소 환한 지평선을 펼쳐 보인다.
마침내 가시 갈기 세운 핏빛 전율의 시선 앞에 맞닥뜨린 생의 표적/장재원
추천평
오늘의 현실을 잘 묘파
케케묵은 옛날이야기 같은 한 토막이 오늘의 현실을 가장 잘 묘파하고 있는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은 심심풀이로 던진 소리인지 모르지만 그 소리를 맞은 소녀는 돌에 맞은 개구리처럼 죽는다. 감수성 예민한 소녀가 겪었을 심리적 타격을 환등으로 비춰주듯 잘 비춰주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미친 여자로 끝나지 않고 自我를 극복해 더욱 강한 여인으로 발전해간 점이다. 운명의 여신을 눕히고 그 자리에 앉아서 불행한 여인들의 ‘서러운 가슴’을 달래주는 왕버들나무처럼 유연한 강인한 신어미로 변모해간 점이다. 작은 불행에도 쉽게 무너지는 요즘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너무나 당당하게 禍를 부리고 사는 ‘주막거리 작부의 딸’ 이야기가 산소처럼 신선하다. 그런데 그 산소가 가장 묵은 언어, 토속어를 입고 있어 더 더욱 신선하다./김동호(시인, 본지 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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