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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자/시 2010년 봄호(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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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733회 작성일 10-03-02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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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저/시 2010년 봄호(제37호)

허망한 영광의 알레고리* 외 4편


구름안개 스멀거리는 능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목에 앉은 까마귀의 눈빛과 마주치며 시선의 동선이 흔들리는 지세가 높은 곳 임의대로 사용하다 처분할 수 있는 나대지에 터를 닦고 너를 위한 건축설계를 한다.

측량을 한다. 일정한 면의 두 지점 사이에 기둥을 세운다. 수직거리와 수평거리의 비를 맞춘다. 내밀한 언어의 뿌리를 어루만지듯 내력벽을 쌓는 흙손, 필연의 형영形影한 등걸로 지붕을 얹는다. 죽은 이를 위해 오페라 무대가 있는 정원을 만든다. 선혈의 장미를 심는다. 가시로 화관을 엮어 나들문에 걸어 둔다. 장미 꽃잎으로 길을 덮는다. 너를 초대한다.

사냥개처럼 달려드는 안개 속을 달린다. 과속으로 달려가는 바람을 제친다. 길 위에 나풀대는 은빛분리대, 노란점선이 승용차를 가볍고 투명하게 통과한다. 가로등의 소리 없는 비명이 등 뒤로 사라진다. 접도구역에서는 젖은 나뭇잎들의 실핏줄이 터진다. 검은 숲 가름목을 지나 멍에목에 접어들자 거리목을 지나는 고라니의 번뜩이는 눈망울을 본다. 너를 납치한다.

지하실 문을 열면 무영등 밑 벽난로에서는 장작더미 불춤을 춘다. 벽면 실험대 위에는 플라스크며 실린더 크고 작은 수술용 메스 날과 풀린 붕대가 놓여있다. 시약장 안에는 식염수에 담긴 돼지의 심장, 동물세포유사분열 몇 개가 들어 있다. 그 옆엔 반이 빈 무색투명한 포르말린으로 채워진 유리병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다. 너를 원한다.

계단마다 너의 심장을 깔아놓는다. 너는 나를 위해 남겨둔 보류지, 수평투영면적으로 내려다본다. 바닥에 내 마음을 펼쳐놓는다. 푸른 입술, 철문처럼 굳게 닫힌 눈꺼풀, 날카로운 콧날을 하고 있는 너의 얼굴을 석고로 본을 떠서 지하실 머릿돌에 새겨 넣는다. 너는 거기에 있다.

*화가 렘브란트의 명화 인용.





가을


은행을 턴다. 강도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알알이, 구린내에 이끌려 은행으로 들어가서 내부 구조를 꼼꼼하게 살핀 뒤에 비상계단을 확인한다. 번호표를 뽑아들고, 출입문 쪽 의자에 앉아서 은행원들의 머리를 하나 둘씩 들어 올려서 공굴리기를 상상을 하고 있을 때, 청원경찰이 다가오자 책 속의 여인과 얼른 눈을 맞추는 강도.

공범들과 모의한 뒤 흉기를 쳐다보며 자이툰 파병 병의 비장한 눈빛을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빌어묵을 형사 눔, 찜쩌묵게 악독헌 눔, 모지락스럽고 징헌 눔, 서운혀서 으쩌까. 거시기, 라스베가스로 가드라고, 거서 바닥 야그나 험스로 헐벌나게 묵어보더라고, 인자 나의 시상도 벹 뜰 날이당깨. 애국이 벨 것이여 나가 잘 상깨 애국이제. 

꼼짝 하지 마! 움직이면 쏜다. 들고 있던 가스총을 한 방 날리자 진동하는 똥내, 은행원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동전까지 쓸어 담으라고 협박하는 강도에게 독한 놈, 좁쌀 싸라기 같은 놈이란 말만 되씹으며 의자 밑에 숨어서 째려보는 청원경찰, 자루를 둘러메고 튀려는 순간, 주르르 쏟아지는 동전들 동전기계를 몇 바퀴 돌아 잘도 돌아가는 세상, 돌리고 돌리고, 놀란 비상벨, 놀란 아이들, 몇 몇 고객들은 비명을 지르고, 아이들 입에서는 퐁퐁 풍선 터지는 소리, 미끄러지는 함박웃음들, 강도들이 뒤엉켜 퐁퐁 뽕뽕 난리굿.




악어의 가방


자물쇠로 굳게 닫힌 창살 안 인공습지에 배를 붙이고, 눈을 뜬 채 하품을 하는 악어의 이빨은 지퍼가 열린 가방이다.

가방 속의 있는, 배경화면의 이미지 한 장이 나를 지배하는 이율배반적인 핸드폰을, 비밀번호를 누르고 계좌번호를 누르면 자동화된 삶이 하루씩 이체되는 신용카드를, 만으로 말려가는 심약한 눈물의 파도를 닦는 손수건을, 먹어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는 열쇠꾸러미를 버리고, 도시의 늪을 탈출한다.

롯데백화점 앞을 지나간다. 쇼윈도에서 스포츠카를 타고, 은여우 코트를 입고, 전자시계를 찬 손에 여행 가방을 들고, 감각에 익숙한 힐을 신고 있는 마네킹처럼 비상구로 향하는 짓무른 눈동자, 딱딱한 심장만 콩닥거린다.

편두통이 배란되고 이명의 징소리 문을 연다. 고통은 날개 죽지 파닥거리며 비명을 낳고, 솜이불은 무딘 시간을 덮는다. 답답한 가슴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달리고, 숨구멍들은 벽돌처럼 쌓인다.

금빛으로 장식한 빌딩은 무너진 나의 꿈, 환각의 늪, 환청의 늪, 암울한 불빛들을 삼키며 꼬리를 흔들어 본다.




콘솔


유럽황실가구들의발은모두사자의발을하고있다긴갈기와황금빛털을펄럭이는사자들콘솔에달린네개의발이달리자수많은발들이달린다가구점에가구들은없고온통사자들뿐이다진열장을박차고달리는사자들숲을달린다초원을달린다케냐의광야를달린다나도지프차를타고비포장도로를달린다평화롭던초원에울리는총소리황혼속으로사자의왕이쓰러진다황폐해진광야엔총소리만달린다마사이마라국립공원앞마사이족들유창한영어로관광객들을따라다니며외치는소리액세서리살래라이온이빨살래

초코파이

고등학교 은사님이 돌아가셨다
장의차나 선두 차의 꽃장식 및 리본 대여
소나무관 구입 시 화장장 최고급 유골함 제공
생화제단 구입 시 생화바구니, 생화액자 제공
수의 구입 시 도포, 원삼, 관이불 일체 제공
장례식장 입구에서 판매되는 고인의 용품을 지나
취향에 따라 소주, 막걸리, 맥주, 커피, 음료를
골라 먹는 사람들 앞의 영정사진은 
대형마트에 진열된 돈키호테 초코파이
뛰어다니는 양떼를 기사들이 싸운다고 우기고
마부에게 악마의 마법을 건다고 우기고
양동이를 투구라고 우기는 용감한 초코파이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는 슬픈 초코파이 
병실침대를 지나 냉동 창고를 지나 
화장장를 지나 납골당이나 공원묘지로 간다.
검은 것이든 흰 것이든 쓴 것이든 달콤한 것이든 
이십사 시간 찍어내는 초코파이




당선 소감
많은 꽃들이 피어날 눈길을 치우며

가평에서 보내는 첫해부터 폭설과 한파가 몰아닥쳤습니다. 며칠이 멀다하고 쏟아지는 눈, 모든 장비를 동원하여 치운 길을 돌아서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전에는 눈 오는 날이면 아파트 베란다에서 구릉 위의 흰 눈을 바라보며 상상의 날개를 펼치곤 했습니다. 마음속에서 그 무엇이 물결처럼 일렁이는 그런 날이면 켜켜이 쌓인 눈으로 백설기 케익을 만들어 파티라도 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접하는 눈은 아름답고, 포근하고, 새털 같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요즈음 아침은 염화칼슘의 포대자루를 옮기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시골의 마당이란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내가 지나다니는 길은 모두 내 마당이다 싶어 작업의 반경 또한 그 만큼 넓어집니다. 뉘엿한 햇살에 어깨가 뻐근하고, 팔다리가 퉁퉁 부어오르고, 여기저기 파스를 붙여도 통증이 쉽게 사라지지 않지만, 뒤를 돌아다보면 땀의 흔적들이 눈꽃처럼 반짝입니다. 내년 봄 이 길에서도 많은 꽃들이 피어날 것입니다. 저를 항상 격려해주는 가족들과 추천해주신 선생님과 수요회 동인들께 감사드립니다./당선자 천선자




추천평
큰 보폭을 기대하며
 
체험과 경험을 구분한 것은 벤야민. 대도시 시대에는 순간적 체험이 지배적이고, 마을 시대에는 영구적 경험이 지배적이다. ‘자극 과잉의 대도시’에서 일일이 그 자극에 대응하기란 힘든 일이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다. 웬만한 자극에는 꿈쩍도 않는다고 하는 편이 나을 듯. 그래서 자극의 최대화다. 시에 ‘자극의 최대화’가 반영되고 있다. 자연서정시의 급격한 퇴조가 이를 증명한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빌딩이고 지하철이고 군중이 아닌가. 자연서정시의 퇴조는 자연스런 현상. 물론 낭만주의를 말할 수 있다. 빌딩, 지하철, 군중에 대한 외면이 낭만주의다. 우리 시단에서 대도시 시는 걸음마 단계다. 천선자 씨의 큰 보폭을 기대해 본다./추천위원 박찬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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