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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섬/시(2010년 가을호, 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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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1 외 5편
자꾸 가슴이 답답해. 자꾸 목이 따가워. 진통을 이기지 못한 하늘이 쿨럭쿨럭 기침을 해. 대책 없이 단발머리 여자아이는 여행을 떠나고. 기침을 삼킨 바람은 기우뚱기우뚱 숲에 누워 여자아이의 애매한 주소를 찾고 있어. 눈앞이 침침해. 서걱서걱 자꾸 눈이 아파. 안구건조증이야. 노출을 삼가야 해. 얇은 목소리로 처방을 끝낸 숲은 손을 씻고 있어.
빨간 사이렌 불이 요란해. 새들은 다른 별로 하나 둘 이민을 가고 걸핏하면 외출금지령을 내리지만 조제실엔 약이 없어. 하데스*에게 매수당한 검은 발자국 소리가 다가와. 바람은 대책 없이 자꾸 잠을 깨워. 여자아이의 뽀얀 웃음이 갇힌 줄도 모르고 숲은 자꾸만 등이 간지러워 몸을 부벼. 여자아이의 하얀 마스크 위에 는 검은 발자국이 난무하고 하늘은 쿨럭쿨럭 자꾸 기침을 해.
뽀송뽀송한 햇살은 아직 감금 중. 호사스러운 외출을 꿈꾸는 철없는 진달래를 보아. 자꾸 사이렌은 울리는데 가슴이 답답해. 전보다 핼쑥해진 숲은 청진기를 들이대며 내쉬고, 후― 들여 마시고, 후― 호흡기에 이상이 왔어. 손을 쓰기엔 늦었어. 젖은 목소리로 처방을 마치고는 서둘러 하얀 커튼을 쳐. 쿨럭쿨럭 자꾸 기침이 나. 자꾸 눈이 침침해. 별들이 자꾸 흔들려. 여자아이의 담을 넘던 검은 발자국 소리가 티브이 속에서 쿵쾅 쿵쾅 뛰어다녀. 담이 해체된 숲에는 여자아이, 자꾸 쿨럭쿨럭 비릿한 기침을 해.
*하데스: ‘보이지 않는 자‘의 뜻.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죽음과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신. 죽음의 신(남신).
황사․2
―수선화, 바람의 날개를 훔치다
바람을 쫒던 구름이 푸른 밀밭에 눕는다. 판박이 기계 속에 막 찍혀 나온 수선화가 노란 창문으로 화들짝 쏟아진다. 바람의 날개를 흠모한 밀밭은 순식간에 빛의 방향을 바꾼다. 행진곡에 놀란 구름은 커다란 날갯짓으로 솟구치듯 날아오른다. 찰나에 저장된 수선화 웃음소리가 아득하다.
바람은 밀밭에 누운 구름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춘다. 아주 잠깐 분명히 수선화의 입술일 거라고 생각한다. 울렁증에 못이긴 구름은 울컥 구토를 한다. 수신되지 않는 신호음이 새 떼가 되어 날아간다. 수선화는 얼른 새의 등에 납작 엎드린다. 싱싱한 바람이 새의 날개를 힘차게 밀어 올린다.
묵은 옷장에서 눅눅한 냄새를 만지던 구름이 오래도록 앓아눕는다. 수신되지 않는 신호음은 밀밭에서 하품을 늘어놓는다. 사랑, 목구멍 속에서 채 준비되기 전에 희미한 미소가 밀밭에 번진다. 봄이 넘다가 쩔룩이던 언덕 위에는, 한가롭기 짝이 없는 목련이 눈이 얼얼하도록 알몸으로 밤을 지키고 있다. 아무 대꾸가 없다.
차용된 존재의 혼돈․1
―괜찮아
홑겹 수은등이 뿌옇게 밤을 핥는다. 버터를 깎아 만든 등이 깜박이자 전자벽화 속에서 오색 언어들이 까만 천공 위로 깔깔깔 날아오른다.
새벽. 새벽 같은. 새벽. 새벽 같은. 수탉은 밤새 천공 위로 언어를 토해낸다. 새벽의 경계가 삭제된 양계장에선 어질어질 무정란이 복제 중이다. 계란 반숙이 아침상에 올려지고 반쯤 죽은 언어들이 돌돌 말려 매끄럽게 목구멍으로 빨려들다 쿡쿡 웃는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수은등은 혓바닥으로 축축한 언어들을 유리곽에 집어넣는다.
차용된 존재의 혼돈․2
―시이소를 타는 벌을 본 적 있니?
빙그르르 물방울이 돌다 꽃을 낳는다. 꽃에 날아든 벌은 씨방에서 잉잉 시이소를 탄다. 지나가던 바람은 공연한 심술을 부린다. 꽃이 진다. 바람은 허공에다 지나온 꽃의 흔적을 저장한다.
끊임없이 꽃은 새로운 매뉴얼로 출시되고 새로운 매뉴얼에 따라 꽃은 진화를 거듭한다. 더 이상 벌은 날아들지 않는다. 물방울도 필요 없다. 여전히 꽃은 화려하다. 향기가 삭제된 꽃잎은 매뉴얼에 따라 열렸다 닫혔다, 꽃잎은 지지 않는다. 매뉴얼을 찾지 못한 벌은, 공연히 씨방 위를 배회한다.
투명막 위로 초속으로 풍경화가 바뀐다. 왕성한 혈관을 만든 꽃길은 씨방을 내보이며 빠르게 풍경화 속으로 빨려든다. 풍경화 속 꽃은 아직 유통 중이다.
앞으로도 죽, 내게 거짓말을 해 줘*
머리가 뜨겁다. 이런 날은 괜히 떼를 지어 밤마실을 나선다. 느슨한 남한강 아랫도리에서 쉬어 가려면 품위를 지켜야지. 수면 위로 거꾸로 서서 자라는 모텔촌은 언제 봐도 매혹적이야. 사시사철 피어나는 붉고 푸른 꽃. 꽃의 빛깔 같은 건 상관이 없어. 그냥 꽃이면 그만이지.
어질한 창은 점점 휘어지고 꽃에서 꽃, 꽃 속의 꽃, 꽃의 출구에 달이 떠오른다. 물비늘로 피는 꽃의 몸 밑바닥에 달콤한 날개를 새겨 넣는다. 믿어 봐. 축축하게 젖은 바람이 어둠을 툴툴 털고는 속삭인다. 믿어 보라니까. 깊은 여울 속으로 야들야들한 꽃의 날개가 까무룩 떨어진다.
출구 없는 모텔촌은 밤새 어질어질 피어나고 온통 물비린내를 뒤집어 쓴 물오리는 꼬물꼬물 꽃그림자를 쪼아댄다. 북적북적 오리집엔 젖은 모텔촌이 통째로 구워지고 식탁 위엔 조각조각 썰려 나온 남한강의 아랫도리. 한 철 허기를 너끈히 채워줄 상냥한 여름밤의 만찬이다.
*앞으로도 내게 거짓말을 해 줘:노석미의 그림 작품 제목을 따 옴.
꽃의 또 다른 출구
지금 꽃을 보고 있어. 그 꽃 역시 날 보고 있어. 바람이 어께에서 그네를 내리면 꽃은 팔랑팔랑 그네를 타고 언덕에 올라, 언덕에서 굴렁쇠를 타고 놀다가 달을 따러 가기도 해. 아이들이 남겨놓은 웃음소리로 허기를 채우고는 그네에 올라 앉아 낮잠을 자. 잠에서 깨어나면 빨간 태양이 입혀준 원피스를 입고 달팽이관 피리를 불어. 그 피리소리에 애벌레의 등에선 달콤한 깃털이 자라나곤 해. 지금도 그 꽃을 보고 있어. 길고 부드러운 부리를 가진 새들은 그 꽃물을 길어와 투명한 둥지를 그리고 있어. 뚝, 뚝, 꽃의 진통이 지는 아슴프레한 저녁, 둥지 안에서 초롱초롱한 달이 깨어났어. 그 달은 그 꽃이 왔다가 간 흔적을 쫒아 구름사다리를 하늘의 뜰에 비스듬히 세워 놓았어.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그 꽃을 들여다보고 있어. 그 꽃은, 먼 하늘 그 너머에서 꽃잎 출렁이는 바다를 상상하며 다시 꿈을 꾸고 있어.
당선소감
시는 안개 속에서 나를 불러
손끝이 가슴보다 먼저 두근거린다. 지방 백일장을 통해 처음으로 감히 시인을 넘보게 된 후, 동인활동을 하며 습작 십여 년으로 시인 흉내를 내보았으나 詩는 점점 멀어져가고 나는 도망가는 詩를 붙잡으려고 전전긍긍했다. 詩의 본질도 모른 체, 詩를 넘본 죄 값으로 시의 감옥에 갇히고 만 것이다. 주변 글벗들이 하나둘 등단을 하고, 예기치 않은 등단소식에 기쁘다는 당선 소감을 읽으며 한없이 부러웠었다. 그런데 드디어 마침내 이런 날이 내게도 온 것이다. 이 순간을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광화문 네거리에 현수막이라도 내걸고 싶은 심정이다. 함께 시를 공부하다가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세상을 달리한 글벗에게도 이제 해 줄 말이 있어 다행이다. 아직도 詩는 안개 속에서 나를 부르고 있다. 두렵다. 운전 중에 만난 안개처럼, 하지만 전진 할 것이다. 어차피 詩의 종착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거니까./당선자 권섬
추천평
산문시의 폐단 잘 극복하고 있어
권섬의 「차용된 존재의 혼돈」 외 4편을 추천한다. 권섬은 듣자하니 이미 문단생활을 오랫동안 한 시인인데 다시 투고를 했다고 한다. 권섬의 산문시들은 산문시에 대한 많은 생각을 천자에게 하게 하였다. 근일 시단에 발표 되는 산문시들은 시이기 보다는 산문인 것이 대다수였다. 시를 시답게 하는 시적 표현이 너무나 부족한 시들이 많았다. 권섬은 줄글로서 산문시의 이런 폐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극복하고 있다. 권섬은 산문보다는 시에 가까운 산문시를 잘 소화해내고 있다. 시에서 산문이 가지는 보편성을 극복하는 길은 이상시가 보이는 난해성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천자가 생각하기엔 권섬은 이런 난해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틀과 상상력을 대담히 가진 시인이라 나는 믿는다/추천위원 강우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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