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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산/시(2011년 봄호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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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1,442회 작성일 11-03-06 18:18

본문


정치산

남자를 훔치다 외 4편

훔친다. 아폴론에게서 히야신스를 훔치고, 아프로디테에게서 아도니스를 훔친다. 셀레네에게서 엔디미온을 훔치고, 박개인에게서 전진호를 훔친다. 금잔디의 꽃남 구준표, 윤지후를 훔친다. 그녀의 이민호와 김현중을 훔친다. 장식한다. 두근두근 원반에 히야신스를, 초록 화병에 아도니스를 장식한다. 침대에 엔디미온을 장식하고, 텔레비전 속에 전진호, 구준표, 윤지후를 랜덤으로 장식한다. 화장대에 오렌지향 이민호와 김현중을 장식한다. 그녀의 서랍에는 칸칸이 훔친 남자들이 숨 쉬고 있다. 그제는 김주혁, 차승원을 훔쳤고, 어제는 톰크루즈, 디카프리오, 소지섭을 훔쳤다. 그녀의 취미는 남자들을 수집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남자들을 훔치고 서랍에 넣어두거나 장식을 한다. 밤마다 탈출을 시도하는 그녀의 남자들이 서랍을 여닫느라 온 아파트가 쿵쾅인다. 내일 그녀는 로버트 패틴슨, 김명민, 정재영을 훔칠 예정이다. 그녀는 지금 생리 중이다.



해의 장례식

벌말에서 매기매운탕에 수제비 빚어 마시고 불콰하게 돌아오는 길. 창백하게 질린 해는 삶과 죽음의 되돌이표를 빨간 신호등에 걸어 놓고 아주 원시적으로 붉은 구름을 고인돌로 세웠다.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는 그는 그의 장례로 분주한 주변을 구경하고 있다. 상록수 화원에서는 그의 장례에 쓸 조화를 주문 받느라 정신이 없다. 그는 모두가 아는 유명인사다. 그가 유명했던 만큼 보내주는 조화도 다양하다. 다양한 문구가 그들의 얼굴을 대신한다. 조화로 눈도장 찍고 부의금 봉투로 이름을 대신하며 바쁜 일상이 쳇바퀴에 걸려 굴러가고 있다. 그는 내일 태어나기 위해 구경하던 동백꽃에 투신한다. 툭, 투두둑. 핏빛 잔상이 낭자한 저녁이다. 제 목을 꺾어 지상에서 만개한 핏빛 꽃숭어리. 동박새 날개를 타고 아침으로 승천하는 중이다. 포르르, 포르르, 승천하는 소리 찬란하다.


마술

그의 손 안에서 그녀의 눈이 돌아간다. 빙빙빙 삼박자로 돌아가던 그녀의 눈이 깜빡, 감겼다 뜨는 사이 그녀의 눈은 비둘기로 날아오른다. 탁탁, 그의 지팡이가 비둘기를 장미꽃으로 만드는 사이, 그녀의 눈은 캄캄한 상자 속에 갇혀서 삼등분으로 분리된다. 그의 손끝에 찔린 그녀의 눈이 발을 내밀고 손가락을 흔들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눈에는 지금 이 세상은 진짜다. 속삭이듯 환한 눈웃음을 지으며 최면을 건다. 그녀의 눈이 깜빡 감겼다가 뜨는 사이 그녀는 쇠사슬에 묶여 자물쇠로 잠겨있다. 짧은 시간 동안 화려한 탈출을 시도한다. 쇠사슬이 더욱 옥죄어 온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눈이 깜빡, 감겼다가 뜨는 사이 그녀의 눈은 색색의 손수건이 되어 줄줄이 쏟아진다. 다시 그녀의 눈이 깜빡 감겼다가 뜨는 사이, 그의 모자 속에서 꽃가루로 흩뿌려지는 그녀의 눈은 천 개의 별가루가 되어 다닥다닥 이어진 판자촌 위 은하수로 흐른다. 그의 도시는 매혹적이다.


농담 

끈적끈적한 타르, 
축축하고 서늘한 파충류의 혀가 비릿하다. 
십팔을 질겅질겅 씹는다. 
온몸을 훑고 가는 눅눅한 딱지들의 입김이 진득하다.
화들짝 솜털들이 곧추서며 바람을 할퀸다. 
바람이 날름거리는 혀를 후리고 간다. 
나뭇잎들이 파문을 일으키며 
빙글빙글 흔들리다가 잠잠히 가라앉는다. 
침묵, 
금세 제자리를 찾는 풍경들, 
나른한 눈으로 하늘을 할퀴려는 바다의 
손을 보고 있다.


들꽃요양원

그의 행성이 그의 지배를 거부한다. 그의 명령과 상관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이며, 그를 절판된 책 속에 가두어 미로를 헤매게 한다. 그의 행성은 하루 종일 빈집에 걸려 있다가 슬그머니 컴퓨터에 앉는다. 정신없이 맞고에 빠져 게임머니를 잃기도 하고, 축구게임에 빠지기도 하다가, 자동차 경주에 빠져든다. 가로수에 부딪히고 자동차와 충돌해도 무작정 달린다. 마구 달리는 그의 행성이 컴퓨터 앞에서 멈췄다가 들썩들썩 가라앉는다. 옆에 있던 그림자가 자동차에 깔려 길게 늘어진다. 팽그르르 돌다가 멈춘 그의 행성이 미로 속에 갇힌다. 그의 행성이 갇힌 순간 그의 흰머리가 부스스 일어선다. 그는 먼지 쌓인 헌책방에서 쿨룩쿨룩 마른기침을 뱉으며 길 찾기에 나선다. 빛바랜 책 속에 절판된 그가 갇혔다가 그녀의 시치미에 걸린다. 그는 책방을 나와 오거리 교차로를 향해 터덜터덜 걸으며 방향을 가늠하고 있는 그녀 옆에 있다. 그의 길 찾기, 아직은 유효하다. 



당선소감-아직도 내 귓가를 울리는 기적소리

방문을 열면 개울 건너 논밭이 펼쳐진 풍경 너머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지나갔다. 처음엔 기차가 지나는 소리에 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기찻길 옆에 살다보면 차 시간을 굳이 외우려 하지 않아도 여객선과 화물차 시간을 절로 외우게 된다. 머리보다 몸이 반복되는 시간들을 체득하며 외워버린 기차시간처럼 시도 내게 그렇게 지나가기를 반복했다. 만원버스로 통학하며 멀미를 참으려고 수없이 외웠던 시를 노트에 일기처럼 배껴 쓰면서 시에 젖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힘든 길에 들어섰는데 힘든 줄 모르게 여기까지 왔다. 가끔은 버겁고 답답했던 시간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못하고 다시 또 이 길을 걷는 건 몸으로 체득한 기적소리가 아직도 내 귓가를 울리기 때문이다. 묵묵히 지켜봐 준 가족들과, 힘들 때마다 옆에서 격려해준 동인들, 시를 보는 안목과 시를 다루는 힘을 키워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추천해 주신 강우식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당선자 정치산

추천평-개성 있는 시세계 

정치산의 ‘남자를 훔치다’외 4편을 신인상으로 내보낸다. 정치산의 시는 한마디로 놀랍다. 신인이라 하기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개성 있는 자기만의 시세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면 누구나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시를 쓰고 자기 세계를 갖고 싶어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닌데 정치산은 신인이면서 자기만의 시의 색채가 확실하다. 정치산의 시는 시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전개가 매우 현란하고 스피드 있고 현대적이다. 작품 ‘남자를 훔치다’. ‘마술’, ‘들꽃요양원’ 등을 읽으며 마치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우리 시가 한때 지나치게 시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어느 사이에 탈피하여 이제는 많이 다양해지고 개성 있는 작품들을 쓰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격세지감이랄까 은연중 세대 차이를 절감하게 되었다. 특히 정치산은 여성이면서도 성이 구분 안 될 정도로 시적 소재나 호흡이 굵은 시를 써내고 있는 것도 우리 시가 그만큼 발전해 온 것이라 믿고 싶다. 앞으로 자기만의 개성 있는 좋은 시를 쓰리라 믿으며 정치산을 시인으로 내보낸다./추천위원 강우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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