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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석(시/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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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시부문)|
정남석
손돌목 외 4편
그는 뜨거운 철판 용접쟁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절은 늘 겨울이었다.
바람이 끊이질 않는 강
마지막 길도 얼어 있었다.
그의 오십 초겨울 배는
강의 중심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건강해야 오래 산다고
몇 년 전부터 산을 오르고
담배를 끊고 술까지 끊었다.
벗겨진 이마를 들이대며
삶의 근육을 자랑하던 그
나도 모르는 빈 바가지 가는 길
이곳에 와 묻는다.
가루받이
하얀 배밭은 달빛 초례청이다.
밤이 으슥하도록 과수원 영감은
꽃잎을 더듬으며 가루받이를 한다.
단내 물씬 풍기는 김 씨 할머니는
봉지를 묶으며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떠올린다.
그 집 宗婦의 꽃은
십 년이 넘게 그냥 쉬 떨어지고 말아
하는 수 없이 宗婦도 가루받이를 하였다.
손주를 받아 안은 영감은
과수원을 팔고 도시로 이사를 갔다.
영감이 살고 있는 아파트 앞,
M&B 산부인과 빌딩에는
가루받이를 기다리는 하얀 배꽃들이
밤마다 층층 줄서기를 하고 있다.
원적외선 히터
그가 작동을 멈추자 몇 번이나 긴장하고 스위치를 강약으로 돌린다. 시간은 석면 사이에 치명적인 증거를 남기고 싸늘한 묵비권을 행사한다. 가고 오기를 반복하는 뜨거운 인내 앞에 약속의 간격이 사라진다. 적당한 거리에서 그의 세상을 엿보며 가지 못한 마음의 코일을 더듬는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고마움을 더듬거리는 말로 표현하는 건 쑥스럽다. 차가운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끊어진 용광로에 다시 스위치를 넣는다. 노여움이 가득한 철심에 투명 밴드를 붙이며 까만 인연의 전류를 집어넣는다.
겨울 판화
―봉선이 연
담장에 등을 기댄 두 칸짜리 오두막이
고양이 낮 울음에도 쓰러질 듯하다.
황해도 해주에서 피난 내려와
딸인지 손녀인지 어린 봉선일 키웠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봉선이 방패연은 동네 최고였다.
날마다 봉선이는 보름달로 떠올랐다.
연줄이 한 번 진저리 칠 때마다
누군가는 한 번쯤 연줄이 끊어지기를 바랐다.
연의 꼬리가 살랑거릴 때마다
사내아이들은 몰래 연줄을 당겼다.
연은 결국 꼬리가 잘리고
감나무가지에 걸리고 말았다.
봉선이 몸에 누런 감물이 들었다.
노인은 새 꼬리를 달아 날려보려 했지만
연은 다시 날지 못했다.
봉제공장은 서둘러 소녀를 데려갔다.
마을에 봉선이 연은 다시 오르지 못했다.
詩
호접란 화분에
물을 준다.
잎의 마당 가득
물방울 꽃이 피었다.
분갈이 이후
잎은 더 무성해졌으나,
벌써 십 년
꽃대를 밀어 올리지 못했다.
날개를 접으며
물방울들이 묻는다.
뿌리야,
네 꽃은 어디 있느냐.
소감/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나무를 오르며
바람 골 지푸라기 같은 겨울이 지나면 아이들은 산과 들에서 허기를 풀었다. 여자아이들은 나물을 뜯었고, 사내아이들은 나무에 올랐다. 겨우 두서너 개, 그것도 엄지발톱만한 새알을 향해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사십여 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나무를 오르고 있다. 잔가지가 너무 많은 나의 ‘시나무’, 몸집을 줄여야한다는 걸 안다.
그만 오르고 싶었을 때 용기를 준 동인들, 무성한 줄기와 잎 치는 법을 가르쳐주신 이가림 교수님, 장종권 주간님, 아득하게 높은 시의 나무에 사다리를 놓아주신 강우식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정남석
추천평/서사가 있는 독특한 서정이 감동을 이끌어내는 시
정남석 시인을 추천한다. 시인에게는 어떤 일정기간이 지나면 자신을 여러 면에서 재충전할 필요가 있고, 그런 면에서 자신의 작품을 신인처럼 당당하게 물어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일부 신진 시인들이 등단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관문을 통해 자신의 시를 묻는 경향도 그와 같은 현상이 아닐까 싶다. 정남석 시인은 서정시를 잘 쓰는 시인이다. 다섯 편의 작품 중 좀 색깔이 다른 「원적외선히터」와 여타 작품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으리라. 이 시인이 서정시를 잘 쓴다는 말은 정남석 시인만의 특색 있는 서정시를 잘 쓴다는 말이다.
작품 「손몰목」에서 철판용접쟁이의 익사는 어찌 보면 무명성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일상성 같아 가슴이 아리다. 늘 건강을 챙기면서 아등바등 살아가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침몰하는 우리들의 모습 같다. 「겨울판화」의 봉순이도 마찬가지다. 봉순이의 연은 모든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꿈과 희망이 담긴 연이었다. 그런데 연줄이 끊어져 연은 연으로서의 기능을 잃자, 봉순이도 병들어가고 봉제공장으로 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정남석 시인의 서정시에는 이렇듯 서사가 담겨 있다. 이 서사는 자연을 묘사한 「가루받이」의 종부가 불임으로 인공수정하는 장면이나, 「시」에서 호접난의 꽃피지 못하는 불임성에서도 볼 수 있다. 정남석 시인의 서정시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서정이 아닌 점만으로도 이 시인의 발굴은 의미기 크다고 하겠다./강우식(시인, 글), 장종권(시인), 고명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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