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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리(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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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리
서검도 외 4편
논둑길에 천 년의 눈꽃이 피었다. 한겨울 꽁꽁 얼었던 얼음장이 깨어지고 뒤엉켜 바다로 흘러든다. 밀고 밀리며 떠내려 온 얼음이 섬 둘레를 가득 메운다. 어디에서 흘러온 얼음인지 알 수가 없다. 겨울의 전장은 섬을 건너 건너 또 건너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바다가 온통 폐허다. 외줄에 묶여 있는 여객선은 얼음 위에 마냥 앉아 있다. 육지로 향하는 발들이 선착장에 묶여 있는 동안에도 얼음은 끊임없이 섬으로 밀려든다. 선창가의 보따리들이 얼음 밑으로 가라앉는다. 얼음이 힘 빠진 여객선을 바다로 밀어낸다. 얼음이 잠 자는 섬을 먼 바다로 끌고 간다. 바다는 포효하고 얼음덩어리들은 춤을 추어도 섬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겨울을 지키려는 바람이 아직도 바다를 휩쓴다. 발길 돌리는 논둑길에 천 년의 눈꽃이 피어있다.
아버지의 장롱
아버지가 안방을 굳게 지켜온 장롱문을 엽니다. 칠십 년 넘게 입었던 옷들을 뒤적거려 꺼냅니다. 묵혀둔 손끝 탈탈한 양복들도 꺼냅니다. 두 줄 낸다 타박 들으며 어머니가 잘 다리곤 했던 바지들입니다. 소매가 헤어져 한 번만 더 입는다던 와이셔츠도 꺼냅니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들도 덩달아 따라나옵니다. 며느리가 정성껏 뜨개질해준 두터운 쉐타도 꺼냅니다. 손녀딸이 선물한 빛이 바랜 넥타이도 끌려나옵니다. 아직 입을 만한 것이고만, 은근하게 말리는 어머니의 말을 못들은 척합니다. 주섬주섬 속주머니 뒤집으며 혹시라도 묻어있을 세월의 먼지를 털어냅니다. 평생 털어내고도 아직 남은 먼지들입니다. 마지막 남은 당신의 먼지 한 점 사라지기 전에 당신의 손으로 당신의 먼지가 담긴 장롱이 비어갑니다.
해장국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집니다. 범퍼에 빗방울에 떡이 된 먼지가 수북합니다. 누군가 뱉어낸 가래침도 엉겨붙어 있습니다. 밤새 쓰렸던 뱃속이 다시 뒤집어집니다. 이런 미친, 습관처럼 꼬이는 속을 꾸욱 누르며 핸드폰을 꺼냅니다. 아버님, 해장국 드실래요. 아버지가 받습니다. 일도 안 되는데, 외식은 머 하러 하냐. 한 술 더 든 열꽃이 핍니다. 해장국 안 먹는다고 일이 생기나요. 모시러 갈 게요. 이른 아침 해장국집 앞이 장사진입니다. 밤새 속 쓰린 사람들이니 동지애가 만만찮아서 바라보는 눈도 애틋합니다. 해장국 뚝배기 위로 살점이 두둑한 뼈와 국물이 넘칩니다. 우거지가 산처럼 쌓여있습니다. 말 좀 하면서 드시지, 딸아이 말입니다. 질긴 우거지가 입안에서 버팁니다. 목을 넘어가다가 멈칫거립니다. 아버지가 한 말씀 하십니다. 잘 먹었다. 햇살이 창문을 뚫고 쏟아져 들어옵니다. 비를 뚫고 오는 봄입니다.
늙은 고양이
지저분한 건물 사이를 어슬렁거리다가 쓰레기통 앞에서 발을 멈춘다. 골목을 휘돌아오는 바람이 털끝을 가른다. 땅바닥에 닿을 지경인 뱃가죽은 많이 먹어서가 아니다. 비틀거리는 사지에서도 날렵함은 사라진지 오래다. 버린 음식물들이 얼어붙은 채로 쌓여 있다. 발톱을 들어 슬쩍 봉투를 건드린다. 자존심은 풍요로울 때의 훈장이다. 숨겨놓은 발톱은 다 닳아빠진 갈퀴로 변해버렸다. 코를 바짝 대고 냄새를 맡는다. 혼자 살던 주인이 사라졌다. 말도 없이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도무지 돌아올 것 같지가 않다. 겨울로 들어가는 골목길 썩은 냄새뿐인 쓰레기통 앞이 늙은 고양이의 집이다. 바람이 골목 끝에서 총을 겨누고 있다.
붉은 입술
일단 정지, 일루 와 보세요, 언니 오빠, 마른 침이 넘어가고, 숨이 넘어가고 허리도 넘어간다. 아직 개시도 못했어, 일루 와 봐요. 퍼덕이는 광어를 바가지로 툭툭 친다. 물번개가 번쩍 한다. 이거 한 마리에 우럭 두 마리, 그리고 개불은 서비스. 성질 센 우럭 한 마리가 튀어 나와 시장바닥에 나뒹군다. 쓸 데 없는 힘이 장사다. 하얀 배를 드러낸 넙치와 물메기까지 바가지 속에 담긴다. 아가미를 들썩이던 숭어가 숨을 고른다. 이거 다 하고 우럭 한 마리 더. 연달아 터지는 물번개 피하며 돌아서는 등에 그녀 마주 등 돌린다. 돌아보고 웬만하면 다시 오슈. 어느새 마른 입술에 립스틱 덧바른다. 비릿한 어시장 골목에 징한 꽃이 핀다.
소감/두런두런 소리를 만드는 새벽
어릴 적 할아버지댁에 가면 날이 밝기도 전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두런두런 대화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곤 했습니다. 가끔 아버님댁에 가면 아버지 어머니 날이 밝기도 전에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분들의 세상 이야기가 편안한 말씀으로 귀에 들어오고 가슴속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나는 신새벽에 컴퓨터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거움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두런두런 소리를 내가 만들어가는 재미 때문입니다.
내게 시가 특별한 것은 아니라고 믿지만, 시가 네게 편안한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은 압니다. 추천해주신 강우식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박예송
추천평/서사가 있는 독특한 서정이 감동을 이끌어내는 시
박예송의 「서검도」 외 4편은 산문성을 미처 떠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시의 요건은 충분히 갖춰져 있다고 판단된다. 고향으로 보여지는 「서검도」를 보면 섬이라는 바다에 둘러싸여 외부와 단절된 상황 속에 다시 이중으로 폐쇄되는 얼음이 밀려온다.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나 풍경의 묘사는 한 개인의 고립이 아니라 현대인들의 처절한 소외 양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또 「아버지의 장롱」에도 한때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장롱을 채워가며 살았던 아버지의 삶이 늙어가면서 온갖 추억이 담긴 옷가지들을 스스로 정리하는 밀려가는 삶의 쓸쓸한 그림자를 담고 있다.
박예송은 아마 그의 시가 이런 사회의 한 구석진 자리로 밀리거나 소외된 계층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해장국」에 나오는 아버지도 해장국을 사주는 딸에의 고마움보다는 딸의 사업을 걱정하는 따스함이 묻어나지만 아버지는 이미 밀려난 계층으로서의 아버지이며, 또 「늙은 고양이」의 고양이도 버려져 야생으로 살아야하는 밀려난 존재다.
나는 박예송의 시 속에 부각된 이와 같은 관심이 바로 시를 쓰는 따뜻한 마음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고 다듬어서 우리들에게 좋은 시를 보여주길 기대한다./강우식(시인, 글), 장종권(시인), 고명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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