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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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일(시)/2013년 가을호(제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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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시부문)|
김태일
물방울 외 4편
물방울이 등을 말아 손금을 본다.
연잎의 손금이 물방울 따라 흔들리고,
멀리서 새벽의 저음이 밀려온다.
해는 아침마다 사다리를 내려준다.
위로 오르면 새 몸을 입게 된다.
하늘에 몸을 담가 구름이 되어라.
물방울이 눈썹에 앉은 시간을 털어낸다.
가을걷이 끝난 들판에서 잠시 생각하다가
볍씨 물고 날아오르는 새 잔등에 맺힌다.
가위 바위 보
혼자서 논다.
양손으로 가위 바위 보
비겨도 양손은 섭섭하지 않다.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어느 손이 지든 원통하지 않다.
이기고 지는 게 뭔지도 모르고 논다.
동화책을 넘기며 옛날을 부른다.
열 살 적 마음으로 마실 나간다.
언제 불러도 동무들은 모여든다.
동무들이 하나 둘 가위 바위 보
동네 개들이 앞발을 꼼지락거린다.
혼자서 노니 정말 재미있다.
물안개
강물에 쪽배 하나 떠있다.
사공의 장대가 쪽배를 들어 올리고,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물안개가 어우러져 실타래를 펼친다.
사공이 물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물안개가 스멀스멀 말을 건넨다.
수초들이 물안개를 털면서 기지개를 켜면,
물고기들이 사라진 아이들과 놀고 있다.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열차가 지나간다.
물안개가 새벽열차를 에워싼다.
차창들이 물안개를 바라보다가 물안개가 된다.
시간은 흔들리며 가고 강은 내일의 물안개를 준비한다.
동행
금가락지 속으로 햇살이 비친다.
사랑 한 보퉁이 들고 따라나선다.
빈 곳은 정으로 채우겠습니다.
발맞춰 출발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함께 걸어가는 길은 둘의 삶이요,
피어나는 것은 모두 둘의 꿈이다.
유월의 구름이 화관을 쓴다.
한 줄기 말씀이 쏟아져 내리고,
사랑의 선율이 싹을 틔운다.
가끔 세상풍파에 흔들리기도 하면서
조율을 통해 한 몸을 이루어간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된다.
금가락지 속으로 노을이 물든다.
바람의 등에 실려 노을이 흐른다.
노을을 바라보는 눈이 시리다.
눈 내린 아침풍경
할아버지가 눈을 쓸어 길을 내고 있다.
아버지는 달콤한 아침잠에 빠져있는데
아이들이 눈밭에 앙증맞게 새 길을 낸다.
강아지 발자국이 아이들을 따라다닌다.
할머니가 손바닥만 한 대청을 걸레질하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아침을 끓이고 있다.
간밤의 별들이 눈밭에 내려와서 반짝인다.
빛 바랜 관목들은 이불을 덮고 동면 중,
장독대에 대가족처럼 모여 있는 장독들이
동그란 털모자를 쓴 채 깊은 묵상 중이다.
시골동네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어머니들이 저마다의 아침을 만들어내고 있다.
소감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설렘으로
환갑을 지나 신인상을 받게 되니 쑥스럽다.
시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구용선생님과 행소동인과의 오랜 인연 때문이다.
첫발을 떼려니 뭔가 어색하고 두렵지만
사십년 만에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설렘으로 시를 써야겠다.
설익은 시의 꼭지를 따주신 추천위원님께 감사드린다./김태일
추천평/수채화 같은 작품과 향토색 짙은 작품
김태일의 작품 「물방울」과 박양추의 「범실고모집」을 새 식구로 선보인다. 이 두 시인은 리토피아 가족에게는 오래전부터 가까이 지내온 식구나 다름없는 분들이다. 단지 시인으로 등단을 안 하였을 뿐이지.
특히 김태일 시인은 나와는 대학의 선후배 관계로 학교 때부터 동인 활동을 하며 시를 써오던 시인이고 수필집도 한 권 가지고 있는 수필가이기도 하다. 나는 김태일 시인의 오랜 문학 경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처지라 그가 시 쓰기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을 늘 안타까워 한 사람의 하나로서 김시인을 만날 때마다 시단에 정식으로 이름 올리기를 독려해 왔다. 내 부탁이 통했던지 그가 시를 보내 와서 무엇보다 기뻤다. 작품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시들이 맑고 깨끗하다.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이제 다시 시작하는 시 쓰기여서인지 작품들이 어딘가 여리다는 느낌 또한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김태일 시인의 이런 시적 경향을 믿는다. 순수한 마음결이 잘 물결쳐서 아마 그가 첫시집 한 권쯤 낼 때면 아주 좋은 시인으로 있을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지켜보자.
빅양추의 작품 「범실고모집」은 향토색이 짙은 시다. 지난 세월의 우리네 여인상을 보는 것 같다. 박양추의 시 쓰기의 바탕에는 이런 여인이 깃들어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실제 박시인이 고도 경주 태생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내가 박양추 시인을 세상에 내보내면서 향토색이나 고향을 거론하는 것은 이 시인의 작품이 고르지 않고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신인들의 특색이기도 하지만. 나는 박시인이 선보이는 작품에 나타나는 화자들의 다양성을 주시한다. 「김밥집천국」의 무전 취식하는 시인이나 「꽃뱀」에 나타나는 여인 그리고 「길도 없는 길을 가다」의 화자들은 하나같이 현실에서 소외된 길도 없는 길을 가는 화자들로서 삶의방향을 잃은 모습들이 마치 고향에의 상실성과도 흡사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박시인의 이런 시 특색은 한때 민중시에서 보였던 소외된 계층과는 다른 면이어서 주목하는 바이다. 추천자로서 바람이 있다면 시속에 향토색을 바탕으로 소외된 계층을 부각시키면 좀 더 시가 감칠맛이 나리라고 보는데 이점 앞으로의 시 쓰기에 유념해 주시길 바란다.
―추천위원:강우식(시인, 글), 장종권(시인), 고명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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