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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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양추(시, 2013년 가을호, 제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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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시부문)|
박양추
범실 고모집 외 4편
토함산자락 범실마을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기와집에 선머슴 하나 있었네. 작달막한 키 하얀 머리 검게 물들이고 앞가르마 곱게 타고 몸빼옷 입었지. 청춘에 홀로 되어 딸 둘 출가시키고 칠십 년 사립문 옆 감나무와 친구하는데, 황토마당 디딤돌 사이에 자작자작 피어있는 채송화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청하네. 댓살로 엮은 사랑채 문을 열면 고비, 산취, 묵나물, 두루미 향내가 알싸하네. 작은 가마솥 콩조림 만드는 손놀림은 날래고 짭조롬하지. 긴 밤 황토방에 호롱불 켜고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 읽어드리면, 벽장 속 단지 꺼내 녹숟가락 가득 고욤을 퍼주시지. 가끔 딸내집 오가기도 하지만 마음 둘 곳 없어 찾은 양로원, 석굴암 아래 웃범실에는 펜션이 가득 들어서고 주인 잃은 빈집에는 돌절구가 뒹굴고 있네.
김밥집 천국
베레모의 정 시인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안다.
신호등을 건너고 연육교를 넘고 모퉁이를 돌아간다.
막일을 하다가 종종 끼니를 놓쳐서 천국으로 들어간다.
바늘구멍 만한 천국의 문을 제 집 대문 드나들 듯한다.
하루에도 거짓말을 수없이 하지만 들통 나지 않는다.
하느님이 집을 주고 김밥도 주고 술도 주고 용돈도 준다.
하느님은 열 명 백 명에게 무임승차권도 나누어 준다.
천국에 가면 선악과도 주고 당뇨에 좋다는 잡곡밥도 준다.
메뉴판 앞에 긴 줄 서서 눈알 데굴데굴 굴린다.
아내가 없는 날이면 천국의 문으로 들어간다.
베레모의 정시인 청사초롱 매달린 천국으로 간다.
꽃뱀
볼륨 있는 엉덩이를 만진다.
그녀의 아름다운 독니가 입맛을 다신다.
요염한 눈빛이 똬리를 튼다.
연애경험이 없는 심장에 맹독을 집어넣는다.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내 스타일을 연발한다.
귓불의 찔레꽃, 향기가 나는 아르페쥬
향수냄새에 탄성이다.
친친 감아올린 그녀의 망사스타킹을 벗긴다.
호흡이 가쁘다.
그녀가 꼬리를 푼다.
첫 경험이 두렵다고 속삭인다.
참을 수 없는 욕망이 그녀를 덥친다
침대와 탁자 사이 잡힐 듯 미끄러지며 잘도 달아나는
그녀, 에덴의 모텔 탁자에 앉아 기다린다.
휴대폰에 문자가 송신된다.
오즈세컨, 흰 담비털 롱코트 두 벌,
오리무중인 그녀가 시베리아의 벌판으로 내달리는,
느낌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에덴이 아니다.
악어표피가 아프리카로 사라진다.
영실靈室
곰솔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영혼을 인도한다.
진눈개비가 흩뿌리는 계곡의 폭포수가 마치 엿가락이다.
팔만 나한상이 서두르며 동양화를 그리고 있는데,
솟대 위 까마귀 한 쌍의 눈동자가 빛난다.
천국의 계단에 못을 박고 나사를 끼운다. 밧줄을 동여맨다.
아이젠을 묶은 매듭이 풀어진다. 한 발 한 발 구름을 밟는다.
설문대 할망의 아들이 오백장군 바위를 거느리고 진을 친다.
눈꽃 터널 지나 신선들이 사는 병풍바위,
영실 안은 안개로 자욱하다.
숨이 깔딱깔딱 목까지 차오르는 해발 400미터,
죽은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 산 자들이 줄 서 있다.
길도 없는 길을 가다
바람결에 휘청거리는 물결을 따라 주야장창 휘어진다.
에너지가 고갈되면 소주 한 잔으로 허기를 달래며,
토박이집 대문을 인정사정없이 밀치고 들어간다.
주인과 마주치면 덜컹거리며 가는 길을 묻는다.
돌담길을 기웃거리다가 쭈그러진 캔을 걷어찬다.
발에 밟히는 빈 종이팩 빨대가 튕겨져 나온다.
축축한 비를 맞으며 몽돌에 떨어지는 빗소리,
마늘밭 훈기 따라 쭈삣거리며 묵어 갈 하우스를 찾는다.
시끌벅적한 여관방 핑크불빛 아래에서 야동을 본다.
뒤척이다가 귀를 막는다. 맴돌다가 뜨거워진 밤을 태운다.
삐걱거리는 색소폰 소리로도 허전함을 달랠 수는 있구나.
비문도 문드러진 어느 여류시인의 무덤가에 앉아서
구시렁구시렁 이바구를 주거니 받거니 한다.
몇 백 리 지나쳐버린 간이역을 찾아 끝이 없는 길을 간다.
소감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열대야로 잠못 이루던 긴 여름이 지나고 있다.
연장 들고 시의 숲으로 들어온 지 몇 년이다. 무엇을 어떻게 사냥할 것인지 계획도 없이 이 길 저 길 헤매고 다녔다. 숲에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고, 헐떡이며 물길 건너면 하늘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잡을 수는 없었다.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시를 공부하면서 생각하는 폭이 좀 더 넓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바로세워주고 내 나이를 멈추게 해준 시에 고마움을 느낀다. 느긋하게 기다리며 도와준 가족들, 그리고 막비시동인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강우식 선생님, 그리고 추천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박양추
추천평
수채화 같은 작품과 향토색 짙은 작품
김태일의 작품 「물방울」과 박양추의 「범실고모집」을 새 식구로 선보인다. 이 두 시인은 리토피아 가족에게는 오래전부터 가까이 지내온 식구나 다름없는 분들이다. 단지 시인으로 등단을 안 하였을 뿐이지.
특히 김태일 시인은 나와는 대학의 선후배 관계로 학교 때부터 동인 활동을 하며 시를 써오던 시인이고 수필집도 한 권 가지고 있는 수필가이기도 하다. 나는 김태일 시인의 오랜 문학 경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처지라 그가 시 쓰기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을 늘 안타까워 한 사람의 하나로서 김시인을 만날 때마다 시단에 정식으로 이름 올리기를 독려해 왔다. 내 부탁이 통했던지 그가 시를 보내 와서 무엇보다 기뻤다. 작품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시들이 맑고 깨끗하다.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이제 다시 시작하는 시 쓰기여서인지 작품들이 어딘가 여리다는 느낌 또한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김태일 시인의 이런 시적 경향을 믿는다. 순수한 마음결이 잘 물결쳐서 아마 그가 첫시집 한 권쯤 낼 때면 아주 좋은 시인으로 있을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지켜보자.
빅양추의 작품 「범실고모집」은 향토색이 짙은 시다. 지난 세월의 우리네 여인상을 보는 것 같다. 박양추의 시 쓰기의 바탕에는 이런 여인이 깃들어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실제 박시인이 고도 경주 태생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내가 박양추 시인을 세상에 내보내면서 향토색이나 고향을 거론하는 것은 이 시인의 작품이 고르지 않고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신인들의 특색이기도 하지만. 나는 박시인이 선보이는 작품에 나타나는 화자들의 다양성을 주시한다. 「김밥집천국」의 무전 취식하는 시인이나 「꽃뱀」에 나타나는 여인 그리고 「길도 없는 길을 가다」의 화자들은 하나같이 현실에서 소외된 길도 없는 길을 가는 화자들로서 삶의방향을 잃은 모습들이 마치 고향에의 상실성과도 흡사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박시인의 이런 시 특색은 한때 민중시에서 보였던 소외된 계층과는 다른 면이어서 주목하는 바이다. 추천자로서 바람이 있다면 시속에 향토색을 바탕으로 소외된 계층을 부각시키면 좀 더 시가 감칠맛이 나리라고 보는데 이점 앞으로의 시 쓰기에 유념해 주시길 바란다.
―추천위원:강우식(시인, 글), 장종권(시인), 고명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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