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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시, 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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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1,385회 작성일 14-03-02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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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 신인상 추천작품

나전역 외 4편

 

 

 

영동선 열차 차창에 그해 5월이 터덜거렸다

열차는 검은 골짜기에 굴을 파듯 숨어들었다

제천 지나 영월 지나 정선 지나

골짜기, 골짜기의 끝에 당신이 서 있었다

은사시나무 눈부시던 그 5월

 

양은그릇 달그락 거리는 소리 너머

탄가루처럼 저녁이 내려앉았다

이마에 간델라 불을 단 사내들은 삼삼오오 막장으로 가고

큰 눈을 껌벅이며 따라가는 당신이 있었다

옥양목 도시락 보자기에 잔꽃이 만발했다

 

그 밤, 짐승처럼 버티고 선 산 밑 사택 골목에는

땟국이 쫄쫄한 아이들이 늦도록 사방치기를 하고

낮게 내려온 깊고 어두운 하늘 속으로 뱀모기들이 날아올랐다

 

 

 

 

다리의 다리를 보았다

 

 

구절초 하얀 길에

좁다란 다리 하나 있다

 

발목은 부러질 듯 아슬 하고

녹슨 철골 앙상한 종아리는 자꾸 부서져 내린다

거뭇하게 더깨 앉은 저 다리 아래

물의 살이 다리의 종아리를 갉아 먹는다

다리에서 떨어져 나간 자갈이

물의 살에 밀려 자그락거린다

 

누가 입에 물었다 뱉어 놓았는지

아랫도리에 멍이 든 갈대들

다리의 다리를 빠져나온 바람이 쓸고 간다

바람이 물의 살을 삼키려 한다

 

다리의 다리를 보았다

샛강 낮아진 날 보았다

다리의 다리가 위태로웠다

 

 

 

 

마른 것들이 운다

 

 

갈대가 운다

마른 논에 바람이 운다

마른 것들이 운다

그것들의 몸에서 나는 팥죽 냄새가 운다

팥죽색 스웨터를 입은 엄마의 냄새가 운다

들뜬 것들 잠재우는 냄새가 운다

 

마른 것들은 텅 빈 들에서 바람을 맞는다

떠난 자리를 지키는 일

등으로 맞는 바람 같다고

 

바람의 모양으로 휘어진 갈대들이 서로 몸을 비빈다

허옇게 머리 풀고 구불거린다

그 속에 새소리 소란하다

휘리릭 휘리릭

소란이 총총 날아오른다

 

 

 

 

오후

 

 

읍내에 5일장이 서는 날, 동네 어른들 다 장에 가고난 뒤 오후가 적막하다 나는 끈끈이 가득 파리가 달라붙은 구멍가게 밀창 옆에 쭈그리고 앉아 친구를 기다린다 술도가에서 배달 온 털보 사내가 빈 술통을 텅텅 울리며 지나간 뒤, 시큼털털한 막걸리 냄새가 날아온다 오후가 잠시 찌릿하다 털보는 정미소 옆 개울가에 자전거를 세우고 굵은 팔에 냇물을 끼얹더니 재빠르게 정미소 헛간으로 들어간다 헛간에 사는 여자의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시집간 지 한 달 만에 소박맞았다는 여자가 거기 살고부터 드나드는 남정네가 여럿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은 알고 있다 적막하고 심심한 오후

 

 

 

 

산왕거미집

 

 

새벽이슬 영롱하다

들녘에 거미집들이 빛난다

저마다 혼자 들어앉은 팽팽한 집들

가로수 사이에 대저택 같은 산왕거미 집이 있다

넓고 촘촘한 그 집,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역세권 원룸처럼 풀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긴호랑거미 집은

키 작은 풀들 사이에 납작 엎드려 있다

넓은 논 가운데 아파트처럼 빽빽한 논늑대거미 집도 있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저 집들

느리게 걷는 오늘에야 칸칸이 빛나고 있다

집집이 혼자다

 

산왕거미집에 걸린 잠자리 한 마리, 버둥거린다

날개를 파르르 떤다

줄이 팽팽하다

느닷없는 산왕거미의 먹방 앞에

온몸으로 파닥이던 잠자리 날개가 접힌다

날개 사이 햇살이 접힌다

휘황하게 움직이던 눈동자, 스르르 멈춰선다

그 유려하던 비행술이 접힌다

 

집집마다 혼자인 저들이 빛난다

고독에 쩐 주머니 같은 몸을 웅크리고

그들은 지금 먹방 중이다

 

 

 

 

 

 

추천평

시적 대상과의 거리 확보에 성공

 

 

권순의 작품 「나전역」 외 4편을 추천한다. 그의 작품은 근자에 발표되는 시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 있다. 첫째는 유행처럼 번지는 관념적 진술시와는 다르게 리얼리티가 바탕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또 비교적 시적 대상과의 거리 확보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상과의 거리가 확보되지 않으면 시는 육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쉬우면서도 끝까지 시인을 긴장하게 만드는 부분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현란한 수사나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대부분 건조하리만큼 단조로운 현상을 시적 소재로 쓰고 있었지만 그것이 주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가령 나전역이란 시에서/양은 그릇 달그락 거리는 소리 너머/탄가루처럼 저녁이 내려앉았다/라는 구절에서 느끼는 아득한 충격 같은 것이 그렇다.

또 「오후」라는 시에는 한 시골 마을의 한때를 덤덤하게 이야기 하는, 마치 단편소설의 지문 같은 시이지만 한적한 시골마을의 독특한 분위기가 시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이 부분에서 독자는 문득 과연 모던함이란 어떤 것인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시인은 밤하늘의 별처럼 돌올한 빛과 광휘를 가져야 한다. 자세히 보면 별들은 같은 것이 없다. 크기와 거리 반짝임이며 빛깔까지 별들은 오로지 자신만의 것으로 아름답다.

부디 권순 시인이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과 밝기를 가지고 반짝이는 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이경림

 

 

 

추천소감

 

 

문단(文丹)에 가고 싶다. 오래전 그곳을 떠난 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유년의 어느 겨울 새벽, 첫차를 타기 위해 엄마 손에 이끌려 얼어붙은 눈길을 걸어야 했다. 어둑한 그 길 끝에 文丹驛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언 발을 자박 자박 옮겨 놓던 그 걸음으로 지금껏 왔다. 철이 들고 가슴이 먹먹하거나 눈이 내리면 가끔씩 기차를 타곤 했다. 기차는 울면서 떠날 수 있어서 좋았다.

 

심심한 날이 많았다. 그런 날이면 교과서를 꺼내 읽었다. 교과서 중에서도 사회과부도를 보고 또 보았다. 읽을 책이 없기도 했지만 지도를 보는 게 참 좋았다. 지도를 보면서 노선별 기차역을 외우며 놀았다. 열여섯 무렵, 시 비슷한 것들을 일기장에 쏟아내며 혼자 놀았다. 아무도 없는 골방에서 빌린 시집이나 소설을 끼고 누워 낯선 세상에 떨어지는 상상을 하곤 했다.

 

누군가 시를 쓰려고 조바심 내지 말고 기다리라 했다. 끄달리지 말고 온 몸으로 밀고 나가라했다. 하지만 언제나 조바심이 났고 끄달리기만 했다. 누가 맺어주었는지 분명치 않은 시와의 인연을 어쩌지 못해 끙끙거리다 자주 절망했다. 뒤늦은 발걸음에 길을 열어 주신 추천위원 선생님들과 리토피아에 감사드린다.

 

[이 게시물은 리토피아님에 의해 2024-04-25 16:32:35 신인상수상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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