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 신인상
- 수상자
- 투고작
정령(시, 2014년 봄호)
페이지 정보

본문
정령
연꽃 홍수 외 4편
몰랐었네. 비가 오면서 시나브로 개울을 덮고 논밭을 쓸고 댓돌을 넘을 때까지 그칠 거야 했었네. 못물이 차올라 있을 때는, 차마 그러리라는 것을.
홍수에 휩쓸려 정처 없이 흘러가던 송아지의 애처로운 눈빛을, 가시연꽃 잎 떠다니는 혼탁한 못 속의 연보라빛 봉오리를 보고서야 알았네.
지게 한 짐 구호물품 등에 업고 건너오시던 아득한 철도다리, 눅진한 홍수 끝에 저리도 넓적한 등판 있었음 하는 바람으로 하늘 밑에 연잎 떡하니 벌어져 알았네.
장독 엎어지고 깨어지고 허물어졌어도 대추나무가지에 매달린 솥단지 내걸고 푹 퍼진 수제비 뜰 때, 켜켜이 연이파리 못 속에 앉았는 걸 보고야 알았네.
흙탕물에 절은 방바닥 물때 벗기고 푹 꺼진 마루 훔치던 후덥지근한 그 날의 햇님, 발그레 붉힌 연꽃이었네.
책장에 촘촘히 꽂혀있다 물벼락 맞은 몸들 낱장 헐지 않도록 쭈굴하게 말리던, 한 여름의 연잎들이 책갈피 같은 연밥을 내주는 걸 보고야, 홍수였네. 연꽃 홍수!
푸른 잎 펼치고 유구한 세월을 안아 떠받치고 온, 인자한 꽃무리의 환호성. 연꽃 물결, 홍수로 일렁거렸네.
밥상머리대왕모집공고
다음과 같이 밥상머리대왕을 선출하오니 참고하시고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모집일시는 모르년 알게월 될일 조치시부터, 간년 위월 대장일 갑상선시까지. 참가자격은 온몸이 삐걱대는 아무나. 심사기준은 인생사십면책수정 인생오십혈압당뇨 인생육십황혼이혼 인생칠십자유선언 인생말년무사안녕 인생종말호호사망. 참가방법은 새파란 처녀들과 한나절 수다 떨고 우둔하고 우직한 청년들과 씨름 한 판 달달하고 알큰한 풋사내들과 탁주 한 사발에 착한 밥순이 아낙네 살짝 시치미 뗄 때 오지고 까맣던 흑발 한 움큼 떠나는 그 순간. 접수마감은 건강검진 받은 날.
뇌구조테스트
뇌가 생각하는 모습을 찍어댄다. 평균 무게만 천이백 그람이 넘고, 산소결핍에 숨막혀 하지 않아도 되는, 뉴런이란 신경세포가 굳이 두개골을 감싸고, 내척수막에 쌓여 뇌척수액을 보호하지 않아도 되는, 대뇌피질의 주름을 펴면 신문지 한 장 펼친 정도라는, 사람다움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중추기능하지 않으면서, 욕구조절하는 시상하부가 명령하지 않는, 단기기억을 장기로 저장하지 않아도 되는, 엄지손가락만한 뇌간이 없어도 생각을 하고, 생명유지를 위한 연수가 활동하지 않아도 살아 숨쉬는, 뇌구조.
이름만 대면 스마트하게 날아온다. 하루 딱 한 번만 허용되는 마케팅전법으로, 휴대폰 접수만 가능하다. 깨알 같은 바램과 비대해진 열망이 포도송이처럼 영글다가, 텅 비어버린 두뇌가 말라붙은 언어로 찍힌다. 빈틈이 빼곡하게 찰수록 허점이 드러나고, 굵직한 대뇌에서 고작 한다는 일이 물음표 하나 던지고, 일말의 느낌표 같은 감성 찾는 일.
시나브로 점(占)집 간판 올리고, 천문도사 글문도사 장군신 불러 모아 점통 흔들며, 점치듯 점사를 받는다.
별사탕 먹는 법
막대기만 빼낸 알사탕이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거리네
네가 떠나던 그 밤 흔들리는 다닥나무 그늘에 숨어있던
달달한 입맞춤을 주워다가 침과 버무려 오물거리네
사랑니와 잇몸 사이에 흐르는 단물 쓴 풀맛이 나네
너는 가고 흐려지는 불빛에 줄줄 바다가 흐르고
풍랑에 놀란 어금니가 와작 응어리를 오지게 깨트리네
싸늘한 바람을 업고 가는 네가 가슴언저리로 녹아드네
혓바늘이 오톨도톨 알갱이 같은 밤별들이 입 안으로
와르르 쏟아져 목구멍으로 달콤하게 쓰라리게 넘어가네
너도 나도 넘어가네
종이배의 꿈
노아의 방주가 오랜 세월 종이로 탈바꿈 했겠다. 산을 깎고 아스팔트가 난 길 석조울타리에 나앉은 걸 보았거든. 하늘이 까매지고 통곡하는 소리 격하게 들렸거든. 그럴 때가 있었거든. 온몸에 흐르던 핏줄기가 거꾸로 솟아 멈추지 않고 귓속에 선바람소리만 쌩하니 지나가고,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하던 그런 세상이 무너지는 날, 모든 생명들의 연장을 위한 단 하나의 짝들만 탈 수 있었던 안식처, 홍수를 이겨내고 월계수잎을 입에 문 그 날 방주의 문을 열고 힘차게 내디딘 맨땅의 기운 이 종이배도 그랬겠다. 조금씩 말라가며 또 다시 물 위에 뜰 그 날을 위해 당분간은 제 몸을 깎아 종이로라도 있어야했겠다. 작은 개울에서 물에 뜨는 연습을 하고 반가움에 눈물 조금 흘렸겠다. 아무도 그 심정 몰랐겠다. 오늘 저 배도 하늘이 무너지고 거센 비바람 몰아칠 때 통곡하며 짝지어들 오던 그 기억,
오도카니하겠다.
추천소감
창밖에 눈이 내립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만들어준 썰매를 타고 얼어붙은 논 위에서 죽죽 문지르고 달리던 그때가 생각이 납니다.
그 아이가 부모가 된 지금, 그것은 기억 속에만 있는 추억이라고 명명되는 것을 보고 정말 기록하고 싶다고 느끼고 난 후, 한없이 책상머리에 앉았던 날들이 책장에 고스란히 흔적으로 먼지를 날리며 꽂혀있습니다.
먼지를 불어대면서 다시금 뒤적거렸습니다.
또 다른 책꽂이가 생기고 새로운 인쇄물들이 책이란 이름으로 빳빳하게 날이 세워져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생길수록 나이가 들수록 나라는 사람은 퇴행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꾸만 시선이 추억속으로 빠져드는 이유, 아쉬운 고향이야기를 빠뜨릴 수가 없습니다. 발달이라는 현대의 물결에 밀려 물속에 가라앉은 고향땅이 갈 수 없는 평양 땅보다 더 크게 다가와서 일거라고 단정지어봅니다.
제가 기록하는 모든 일들이 추억이야기로 퇴보하기보다는 아쉬움이라는 것, 그리고 제가 말하는 고향은 모두의 마음이라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토록 마음을 읽어주고 다독거리게 하고 마음 한 쪽이 아련하게 밀려오게 하고픈 그런 글들로 모두의 마음을 토닥거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열심히 노력하라고 주신 상으로 여겨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글들로 삶에 자그마한 희노애락을 그려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추천평
신인상을 통해 문단에 첫발을 내딛는 시인들의 작품이 기성시인보다 미숙하고 매끄럽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들을 시인으로 등단시키는 것은 이 시인들의 좋은 시를 쓸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고 등단시키는 것이다. 나는 이 분들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늘 내가 처음 문단에 나설 때를 생각하고 나를 끌어준 스승을 떠올린다. 스승은 나에게 질책보다는 늘 격려를 해 주셨다. 그래서인지 시인이 되었다는 책임감이어선지 등단 이후 작품이 훨씬 좋아졌었다. 나를 통해 시인이 되는 분들께 거는 이 시인들이 작품이 어떻게 변할까 하는 궁금함과 기대가 크다.
정령의 ‘연꽃 홍수’ 외 4편을 선보인다. 이 시인은 산문시 형식의 시를 즐겨 쓰는 경향이 있는데 읽어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고 있다. 그만큼 다양한 시적 모색을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연꽃홍수’는 홍수가 져서 연못에 물이 차오르는 것을 작품화한 것인데 그 스케일 상당히 크고 홍수로 인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연꽃물결, 홍수로 일렁이는 마무리의 시적능력이 돋보였다. 그와 대조적인 작품으로 ‘종이배의 꿈’에서는 모든 배는 노아의 방주 같은 꿈을 가지고 있다는 발상 아래 종이배와 동일시하여 시를 이끌어가는 능력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강우식(글), 고명철, 장종권
- 이전글이중산(시, 2014년 봄호) 14.03.02
- 다음글권순(시, 2014년 봄호) 14.03.0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