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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산(시, 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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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산
어둠과 고요 사이
어둠이 소낙비처럼 쏟아진다.
놀란 가로등이 화들짝 깨어난다.
가로등 앞장세워 불을 밝힌 수첩들이
묘연한 어제의 행방을 찾는다.
어둠은 밤새 아리송한 길을 만들고
드러누운 도시를 일으켜 세운다.
어둠과 고요의 사이에서 춤추는 오늘이
달아나는 겨울 모퉁이를 순식간에 삼킨다.
어둠을 삼키고 고요마저 삼킨다.
길섶 야윈 풀잎과 벌거벗은 나무들이 흔들린다.
마른 바람들이 뒤틀린 빈터를 채운다.
표류하던 기억들이 사르르 줄을 선다.
맥놀이
긴장이 풀리고 맥박이 느려진다.
내막을 알 수 없는 간섭이 밀려온다.
결들이 일어나고 춤을 춘다. 타오른다.
삼킨다. 머리칼을 삼키고 얼굴을 삼킨다.
삼킨다. 기억을 삼키고 악몽을 삼킨다.
시베리아를 삼키고 시베리아 하늘의 기러기도 삼킨다.
간섭하는 교감이 우연을 이끌어 온다.
우연을 가장한 인연이 필연을 공명한다.
함정이다 아니다가 백병전을 벌인다.
얼쑤, 미로 같은 공간이 들썩이는 사잇길,
씨와 봉오리와 열매의 춤이 난장이다.
무엇이든 야금야금 삼켜지면서 그저 무방비
맥놀이 중이다.
사라진, 기억
퇴색한 버즘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중심을 잃고 날아오른다. 향그러운 꼬부랑 할미 낙엽 한 장이 아스라한 기억 속으로 들어온다. 작년 이맘 때 이곳에서 신호를 세 번 놓치고 서 있던 기억이 나. 네가 그 늦은 시각에 어딜 가는지 궁금했거든. 그리고는 그만이었어. 측두엽의 문을 열고 최면을 걸어 인출 단추를 두세 번 눌러본다. 지워진 기억이 거름도 없이 돋아날 리는 없다. 뱉어내는 한숨이 쓸데없이 거칠다.
차가 좌회전을 하자 오지랖 넓은 와이퍼가 네온사인들과 인사를 한다. 잠시의 틈도 열어두지 못하고 허둥허둥 산다는 홍등. 구르는 낙엽이 싫고 스산한 날씨가 싫다는 청등. 시간이 흘러 밥그릇 수가 늘 때마다 귀찮은 것들이 많아진다는 흑등. 매일 일과를 점검하고 끼니까지 건너뛰면서 날아다닌다는 황등. 예수 부처 공자 소크라테스가 무슨 작당을 하던 그저 조용히 살고 싶다는 회색등. 꿈이 삭제된 네온사인이다.
차가 정지하자 앞유리창에 간신히 붙어있던 버즘나무 이파리가 툭 떨어진다. 어제도, 어제의 어제도, 그리고 어느 날의 어제도, 버즘나무 이파리였던 버즘나무 이파리가 구르고 밟히고 찢기어져 상처투성이다. 전화벨, 잠시 쫓아가던 생각에서 화들짝 벗어난다. 쌀이 떨어졌다는 큰애의 목소리가 건조하다. 시선 끝 나무 한 그루가 짙푸른 깨알 전구로 온몸을 감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깨알 전구에도 필라멘트가 있을까. 절묘한 타이밍이었을 거라는, 그 놓친 기억을 끝내 찾지 못하고 쌀 대신 화장지 한 묶음을 산다.
벽화 마을
낡은 골목이 나른하게 하품을 한다.
뒤집힌 슬리퍼 한 짝이 감각을 놓친다.
길 한복판에 가부좌 튼 길고양이,
사라진 발자국을 쫓는다.
낡은 빈 의자 박제가 되어 있다.
힘들 땐 쉬어가세요.
호흡이 멈춰진 골목에 바람이 출렁이고 있다.
담벼락을 희롱하는 화가의 손길이 삐걱거린다.
울퉁불퉁 흘러내린 벽화 끄트머리에
낙엽 한 줌이 바스락거리며 허공을 움켜잡는다.
시간을 잃어버린 창문들이 화들짝 놀란다.
기지개를 켜자마자 콘크리트 외진 벽 뚫고나오는
구기자 씨알 동동 품고 어느새 담벼락이 붉다.
군상
전동차 안이 고요하다.
산을 내려온 남자, 자전거를 타다 온 남자,
뜨개질을 하는 여자, 화장을 고치는 여자,
다리가 휘어진 남자와 허리가 굽은 여자,
허리가 굽은 여자가 물건을 정리 중이다.
다리가 휘어진 남자가 낡은 쇼핑백을 들고 있다.
온갖 물건이 뒤섞여 바닥에 흩어져 있고,
전광판을 쳐다보는 여자의 표정이 다급하다.
저는 다음역에서 내려야 합니다.
흩어진 물건들을 지나
빙판길 미끄럼 방지 아이젠이 지나가고,
휴대폰 터치가 가능한 장갑이 지나가고,
사업에 실패한 칫솔이 그냥 지나간다.
병든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아이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쉰 목소리가 지나간다.
목덜미가 발갛게 익은 여자가 허리를 편다.
다리가 휘어진 남자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린다.
다시 터질 듯 터질 듯 불안한 쇼핑백
제가 정말 이번 역에 내려야 해서요.
추천평
시인이 제일 가져야할 것은 사물을 어떻게 보고 그 사물을 자기만의 색깔이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는 것이다. 랭보는 이것을 봐이앙(견자)라고 했다. 시인은 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시인은 단순히 견자만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물을 보고 이 사물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인내와 끈기도 필요하고 때에 따라서는 시적 변용에 대한 사물을 시로 변하게 하는 능력도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인으로서의 가장 큰 힘을 상상력이라 보고 있다. 상상력이 없다면 무엇으로 시를 만들 것인가. 아무리 언어를 주물러도 모래알 같은 메마른 언어가 되고 말리라.
이중산의 시는 작품을 상상력으로 이끌어가는 힘이 있다. ‘어둠과 고요 사이’나 ‘벽화의 마을’, ‘구상’ 등을 보면 견자로서 사물을 세밀히 보는 눈이 있고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능력도 있다. ‘어둠과 고요 사이’에서 “달아나는 겨울 한 모퉁이를 순식간에 삼킨다라는” 대담한 표현이라든지 ‘벽화마을’에서 “가부좌를 튼 고양이‘나 ”시간을 잃어버린 문짝들이 화들짝 놀란다.“라는 사물에 대한 감정 이입된 표현들은 앞으로 시를 써도 되겠다는 흔적이다. 특히 이 시인과 연관이 깊은 ’맥놀이”에서 시적 긴장을 유지해 가면서 소리 속에 사물을 혼융시키는 대목들은 볼만하다. 정진하시길 바란다./강우식(글), 고명철, 장종권
추천소감
전화가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손 편지를 자주 썼던 기억이 난다.
편지 끝엔 늘 좋아하던 시 한 편과 말린 꽃잎 등을 붙여 보내곤 했었다.
그중 정성껏 써놓고도 부치지 못했던 편지들이 있었는데,
두세 번 읽을 때마다 글로 마음을 전하기엔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주고받았던 편지들이 삼십년이 지난 지금도 책꽂이에 꽂혀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부치지 못한 편지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자판을 두드리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갈증도 많아진다.
타악을 하는 나로서는 아직은 북을 두드리고 연주하는 것 보다 어렵다.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다. 산을 오르듯 한발 한발 내딛고 있다.
걸음을 재촉하기보다 쉼 없이 갈 수 있는 길을 택하고 있다.
첫 걸음마를 할 수 있도록 부족한 저를 추천해주신 강우식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언제나 긍정의 힘으로 독려해주신 장종권 선생님과 막비 동인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나의 가족들, 특히 멀리 호주에 있는 작은 아들에게 기쁨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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