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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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연(시, 2014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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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피아』2014년 여름호 추천작
응달에서 햇살이 외 4편
최서연
시퍼런 응달이 걸터앉은 담벼락에
어깨를 맞대고
추위를 나누는 쓰레기통이 서있다
가끔 떠돌이 먼지가 쉬고 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창문도 없고
문고리도 없는 단칸방이다
종종거리는 호기심으로
막힌 귀를 세우니
깨지고 찌그러지고 닳고 구겨진 상처들이
서로 보듬으며
은실 풀리는 봄비에 돋는 잎차례처럼
귀를 맞추는 화음이 들리고
고양이 나비수염 같은 햇살이 날아오른다
나는 한 뼘 바깥이라 여겼던
흐린 안경을 닦으며
한사코 한쪽으로만 귀 틀어진 마음의 터를
온몸 손이 되어, 짚어본다
번짐이다
먹물이 종이에 스며드는
발묵潑墨은
번짐이다
낯선 골목,
밥 끓는 냄새에
두레밥상이 생각나는 것도
번짐이다
하여,
내 나팔꽃 지는 저녁이
네 귀를 즐겁게 하는
나팔소리로 울려오고
강물이 흐르면서
더 푸르게 깊어지는 것처럼
네 봄이
청보리 물결치며 내 여름으로 익어가는
삶도 번짐이다
은하銀河
사람도 은하다
3월 하순,
빛의 터널을 지나 다압 ⃰에 이르면
구름이 환생한 듯 길이 환하다
먼 우주의 은하가 내려앉은 것 같다
구불거리는 은하 띠 따라
은빛 비늘 번진 섬진강 은어 떼처럼
흘러가는 사람들을 보면
풀벌레 소리에 귀가 맑아지고
감자꽃 하얀, 여름밤의 은하가 흐른다
은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3월 하순 다압에서는 사람도 은하다
* 다압 :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
고향 집
덕쇠 아저씨 발소리가 밀어낸 새벽이면
콩, 옥수수, 대를 자르는
작두 소리가 싹둑싹둑 쏙독새 같다.
좁쌀 꽃이 핀 눈을 비비고 나가면
새는 보이지 않고
허공을 찍고 날아간 구름다리만 용용 거렸다.
큰 가마솥에선 소여물이 뭉게구름처럼 끓었다
한 때 푸른 꿈을 가졌던 나무를
불꽃으로 다시 피는 아궁이를
혼 빠지게 바라보는 사이
한 평 자리 부엌에서 뿜는 구수한 내음은
집안 곳곳을 둘러 마을을 맴돌았다
지글지글 끓던 소리가 귀에서 점점 사라지면
덕쇠 아저씨는 솥뚜껑을 열어
여름풀처럼 오르는 김을 헤치고
여물을 구유 통에 부었다.
나는 토란 물방울처럼 또르르 구유 통 앞으로 가
소에게 옹알옹알 옹알이 하고
외양간 밖에서 콩과 옥수수를 골라먹었다.
귀한 짐승 밥 뺏어먹었다고 놀려대던, 덕쇠 아저씨는
내 옆에 막걸리 한 사발 놓고 밥을 먹었고
노을 지고 온 지게엔
다래, 머루, 돌배,
망태기에서 색깔대로 익어가고 있었다.
유리창
마음의 속적삼이
눅눅하고
주름이 깊어질 때
너를 본다
사각 벽속에 사각 틀로 앉아
봄빛 비밀한 제비꽃이야기라든가
먼 옛날 神이 돌아온 듯
십자가로 하늘을 수평질하는 새라든가
때로는 숲에 귀를 열어주는 명지바람이나
비의 발자국,
빗방울을 생각하는데
속이 맑고 훤해서
이마에서 햇살이 튀어 오르는 날엔
먼 우주의 봄까지 생각한다
속이 보이지 않는
먹통 앓는, 마음도 생각하는지
가끔
네 안에 내가 들어있다
추천평
맑고 순수한 서정성 돋보여
최서연의 응모작 12편이 모두 감동적이나 그 중 「응달에서 햇살이」「번짐이다」「은하 銀河」「고향 집」「유리창」 등 5편을 신인상으로 추천한다. 시는 맑고 순수한 영혼의 울림이어야 한다. 어린 아이의 순진무구한 마음을 닮아야 한다. 이러한 시의 울림과 마음만이 사람의 정신을 위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서연의 작품들은 시가 갖추어야 할 이러한 덕목을 충분히 갖추고 있으면서 오늘의 서정시가 나아가야할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최서연을 『리토피아』의 이름으로 한국 시단에 내보면서 시인이 되어서도 서정시의 의미에 대하여 깊은 성찰을 중단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자 한다. 아울러 대우주인 세계에 늘 겸손한 마음과 자세로 시와 더불어 살아감에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허형만(글), 장종권.
추천소감
마른내음도 향기려나
묵은 먼지를 털자/군대 간 오빠가 보내 온 몇 줄의 엽서 한 장/안부가 있고/목이 긴 가을꽃 이야기와 풀벌레 소리가 있고/그리움이 뒤안의 감나무처럼 애틋하다/그 즈음 그녀는 단발머리 여고생이었고/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아브락사스 신을 알고/바짓단이 늘 젖어있었다/펜으로 정성스럽게 쓰여진 엽서에/저녁이면 어김없이 피는 분꽃의 까만 씨처럼/영롱한 별들이 적혀있다/네게서 마른냄새가 나지 않으려면 시를 써 보려므나/왠지 온몸이 아득해지면서 뜨겁기는 하였으나/가슴이 마른다는 말을 이해 못 하였고/그저 화상을 입은 듯 되묻지 않았다/아직도 글씨는 생피가 돌듯 먹빛을 머금고 있는데/그녀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지를 못하고/손바닥만 한 엽서 한 장에/귀뚜라미 울음 하나 쓰지 못 하는/풋가을에 머물러 있다
몇 년 전 습작노트에 써놓았던 「엽서」라는 시입니다. 나의 시쓰기는 군대 간 오빠의 엽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엽서는 소월과 하이네와 아풀리네르 릴케를 이야기했었습니다. 그중에서 ‘마른냄새가 나지 않으려면 시를 써보려므나’란 말이 지금까지 시를 잊지 않게 한 말이 되었습니다. 3년 전에 폐암일지도(오진이었지만) 모른다는 진단을 받고 시인이라는 말을 듣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 가장 슬펐는데 이리 당선소감을 쓰게 되어 기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진정 나눌 수 있도록 늘 제 시를 읽어주고 사랑해준 가족과 순천시도서관 시인학교 문우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최서연
약력 : 강원대학교 사범대학졸업. 중등교원 30년 역임. 지송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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