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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태(시, 2014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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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1,224회 작성일 14-06-05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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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태(본명 우범)

오후엔 갯벌을 생각한다 외 4편

 

 

이제 바람만 남아서 쓸쓸히 울고 있는가

무창포의 하루하루에 안개가 짙어

그 처절한 흐름은 보이지 않는다

챙이 긴 모자를 눌러쓰고

질펀히 드러눕는 갯벌

 

한 망태기 촘촘히 비린 날들을

주워 담다 말고

명치끝을 움켜쥐며

허옇게 타들어 가는 어머니의

배앓이

 

그런 날이면 갈대밭을 지나서

소스라치게 밝은 달이

한 움큼

아린 갯내음을 게워내고 있었다

 

갯지렁이는 진흙 속에서만 숨어 사는가

그 아득한 시간의 깊이로

층층이 먼 바다의 소리를 듣는

고만고만한 생존들

 

따가운 햇볕 아래 혼자서

흰 집게발을 움직여

심심히 아픈

그 유년의 탑을 쌓던 게 한 마리

 

문득 눈을 들면 어머니는 어느새 저만큼

싸한 봄빛 속으로 멀어지고

어리석음처럼 푸른 수평선이

그 거뭇한 얼굴에 섬뜩 그어지고 있었다

 

 

 

 

 

잔설

 

 

대섬 외진 뒤쪽에 언뜻

낮달이 흐른다

 

서글한 눈매에

성긴 백발

어머니는 여전히 무고하신가

 

저녁 시린 어스름

포구의 이마에

닻을 내린다

 

얼어붙은 북극성

그 외로운 천년 고도까지

심지를 돋우고

 

가물가물 호롱불이

돌아오는 시간

 

대섬이

잠시 기우뚱 흔들린다

물거품이

혼백처럼 하얗게 부서진다

 

 

 

 

새우

 

 

9월 초승달이

알곡처럼 속살이 여물 때쯤

휜 허리 마디마디

외할머니는 괴질을 앓는다

 

그 황혼 한 자락에 손을 넣으면

내장이 비쳐드는 아린 알몸에

오한처럼 서걱이는

한 줌 소금기

 

높새는 밤새 처마 끝에 울고

그 청상의 아련한 불빛 사이

톡톡 튀어 오르는

어린 손자들의 은빛

비늘들

 

한평생 촉촉이 베틀에 앉아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천을 짜는 그 눈의

긴 촉수여

 

한갓 목숨쯤이야

있는 듯 없는 듯

뜰 아래 흰 고무신 한 켤레

 

새벽녘까지 허옇게 모시를 삼다

뿔테 고운 돋보기를 벗어놓고

윤기 좌르르

이때 한 번 외할머니는 허리를 펴신다

 

 

 

 

속리산俗離山

 

 

저 점점이 뜨는

산새들도

조롱 속에 갇힌 적이 있을까

 

애증은 또다시 지상의 아침을 연다

길들은 아직 침묵중이고

자욱한 안개를 헤치며 산을 오른다

 

오리 숲을 지나고

개울을 건너자

어디서 승방僧房의 독경 소리가 맑게 울린다

 

고사목 사이로 돋아나는 달빛의

울음 같은

여인의 속살 같은

 

천왕봉天旺峰의 구름은 아직도 아득하다

잠시 가을의 잔등에 앉아 안경을 닦는다

몇 점 서늘히 잦아드는 적막

다시 문득 이별한 여자를 생각한다

 

내가 진정 떠나온 곳은 어디인가

빈 골짜기를 돌아오는

종소리

 

올라도 올라도

속세俗世를 떠난 것은

구름밖에 없구나

해는 벌써 한낮으로 설핏 기운다

 

 

 

 

 

포클레인

 

 

모든 무너지는 것에는 사이렌 소리가 난다 허리 부분이 앙상히 잘린 도로 확장 공사장 빈 터, 달빛이 은은히 떨어지고 있다 벽돌들의 잔해 속에서 월셋방 벽보가 지느러미를 파닥인다 그 수없이 드나들던 산동네 골목길, 다시 언뜻 가겟집의 백열등이 눈앞에 흔들리다 사라진다

 

아직도 나팔꽃은 낮은 담장을 기어오른다

 

거기 통장네 집 손바닥만 한 창문 앞까지, 거인처럼 포클레인이 무기질의 근육을 완강히 감추고 눌러 서 있다 외등 둘레로 왁자지껄 한파가 깔린다 귀 기울이면, 나팔꽃 속에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지금쯤 어느 강을 건너고 있을까

 

퍼런 집념의 삽날들 사이로 물고기의 비늘처럼 달빛이 떨어진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는 또 소박한 가슴들을 얼마나 무너뜨렸는가 무너지는 것에는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어쩌면 차라리 그것이 힘인지도 모른다 신호등에 걸려 있는 저 천진한 눈빛들

 

 

추천평

1980년대 후반 인천에서 시를 쓰는 여러 사람을 만났다. 등단에 연연해하지 않는 고집불통 지역 시인들이었다. 30년이 지났다. 그 중 한 분을 추천한다. 그 동안 시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시를 지켜왔으니 당연히 시인이다. 시인의 마음과 시인의 시선, 시인의 철학을 버리지 않고 시와 더불어 살아왔으니 당연히 시인이다. 늦은 감이 있다. 기묘하지만 이 시작은 새로운 출발이라기보다 시와 시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긍정의 결과라고 믿는다.

문명은 발전인가, 파괴인가. 알 수는 없다. 거대한 괴물인 포클레인을 자연스럽게 가리며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끄집어내는,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들을 따뜻한 언어로 건져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개발이라는 명분의 파괴적인 문명 앞에서도 우리가 잃을지도 모르는 본질과 인간성을 기억하려는 긍정적인 시각의 결과이다. 이제 ‘얼어붙은 북극성, 그 외로운 천년 고도까지 심지를 돋우고, 가물가물 호롱불이 돌아오는 시간’이다. 손댈 곳이 없는 문장이 30년 각고의 노력을 짐작케 한다./장종권(글), 강인봉, 남태식.

 

 

 

추천소감

어둠의 깊은 곳으로부터 울부짖는 고통의 환희

 

불행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시는 나에게 그 불행을 감출 수 있는 좋은 보호색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을 위장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선택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썼던 시는 내게 위로는커녕 더 위선과 독선을 키웠고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시를 떠났고 불행을 맞섰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직시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한 모습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나를 위해 희생하는 가족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버렸던 시는 또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서 소리 없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그 어둠의 깊은 곳으로부터 울부짖는 고통의 환희. 이제야 나는 참으로 시다운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리토피아에 감사한다./허문태(우범)

[이 게시물은 리토피아님에 의해 2024-04-25 16:32:35 신인상수상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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