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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현(기재)/시(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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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현 신인상 원고
애기똥풀
그대 발걸음소리 들리네.
체온이 느껴져도 볼 수는 없네.
지난 이야기는 아직도 살아 몸속을
휘감아 도네.
사흘 밤낮을 누워있어도 증세는 나아지지 않네.
한 곳으로만 달려가고 있네.
이별은 이별로 받아들이지 못하네.
길섶마다 밟히며 자라더니
지나간 바람 찾지 못해
보이지 않는 바람을 잡고 미친 듯이 몸을 흔드네.
바람의 혈흔들만 사방에 널려있네.
사립문 밖, 아파트, 멀어질수록, 가까울수록,
어머니 옥양목 치마가 온몸으로 감기네.
그건 어머니의 향(香)이네.
바람의 진동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데.
멀어지네. 다가오네.
사연들의 기지개
그냥 잠자는 거지. 고된 계절은.
왕년의 삶은 내려놓을 줄 알지.
덮고 덮어 다 잊어도,
지나간 사연은 소리 없이 돌아오지.
돌아온 사연은 생소하여 새로운 사연으로 다시 시작되지.
달래보지도 못한 사연,
차마 보여주지 못한 속내가 이리도 아파 다 드리려는데,
부끄러운 얼굴 분홍으로 아름다워 발길 움직이지 못하는데,
풋풋한 당신보다 더 사랑한다는 맵자한 모습인데.
쑥쑥 자라 쑥대밭이 되었는데,
기어이 눈물샘 반짝이는데,
자신의 몸을 데워 행복을 비네,
사연은 사연으로 다시 시작되지.
달래, 냉이, 진달래, 개나리, 쑥, 씀바귀, 복수초, 툭툭 털고 나오지.
땅속 사연은 묵직하여 건져 올릴 수 없고,
묵은 사연은 그냥 묻혀지지.
그저 택한 길을 따라 상기된 얼굴 삐죽 내밀지.
천지가 분만하는 햇살에,
바람포대를 살살 감아 나르는데
향기에 취하지.
이상한 문제
주민센터에 나타난 그 사람, 말투에 꼬깃한 세월이 묻어있는데, 세든 사람 얘기다. 사라진지 석 달, 밀린 월세는 보증금을 넘었고, 문을 딸 수도 없는데, 창틈으로 빨래만 물려있단다. 쉼 없는 얘기에 가리사니를 구하는데 그를 소개한 사람의 주소가 필요하단다.
정보보호란 얘기가 불을 질렀다. 이사한 주소만 알려달라는데, 이게 시민을 위한 자세냐고 호령이다. 변호사의 무료상담을 받아보라 달래 보낸다.
다시 온 그 사람, 변호사의 상담은 주민센터에 가서 잘 얘기해 보라 한다네. 법이 있어도 법을 얘기 않는 변호사, 답이 있어도 법이 아니면 안 되는 주민센터, 그 사람은 동사무소가 야속하고, 동사무소는 변호사가 어이가 없고 변호사는 그 사람이 막막하다.
금기
가까워지려 하지.
눈으로 달짝이는 입술로 스치는 손끝으로 구애하지.
또 다른 가까움도 있지.
본관, 학교, 출생지,
대번에 졸음을 쫓고
팔짱 낀 팔을 풀고
마시던 커피가 엉거주춤하며 두 눈을 치켜뜨지.
이게 믿음이고 버팀목이지.
피의 순결로,
까막눈을 함께 연 청춘으로,
돌아만 봐도 숨결이 묻어있는,
가슴이 울렁이고 마음이 달리는데,
무슨 일로 터럭을 뒤집어썼을까.
태고부터 우린 스스로 족쇄를 채웠지.
그러나 아담은 사과를 먹고 말았어,
프쉬케와 판도라는 상자를 열고 말았어,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보고 말았지.
결국은 깨어질 것들이었어.
없어야 할 것이 있듯이,
멀수록 신비하고 빛나는 별도 있지.
풍금소리
멀리서 바람을 타고 오는 잊히지 않는 소리다.
풍금소리가 있는 교정은 웃음이었다.
태양은 시뻘겋게 열이 오른 체 머물기도 했고
구름은 검은 보자기를 펴고서 바쁘게 지나갔다.
온통 교정이 적막으로 잠길 때에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세찬 물세례를 퍼부었다.
풍금소리는 시인을 만들고,
음악가를 만들고,
건축가를 만들고,
마침내 도시의 꿈을 만들었다.
풍금 타는 선생님은 천사였다.
악동들은 천사와 결혼하고 싶어 했다.
도시의 꿈이 이뤄진 날.
천사는 날아가고,
풍금도 사라지고,
악동들은 모두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
추천사
정무현시인은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고 나름 재주가 많은 시인으로 알고 있다. 시를 읽으며 누군가 그 재주의 물고를 확 터주면 일사천리로 잘 흐르리라 나는 확신한다. 나의 경우에도 시인이 되기 전과 시인이 된 후의 작품이 완연히 달라졌기에 그런 기대를 나는 걸어본다. 가령 정기재시인의 ‘애기똥풀‘이란 시를 보면 시적 흐름이 리드미컬하게 흐르는데 비해 시에 나오는 퍼소나가 “그대”에서 “어머니”까지의 전환이나 전개가 분명하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반면 ’풍금소리‘ 같은 작품이 오히려 보다 솔직하고 서정이 물씬 풍긴다.좋은시를 쓰리라 믿으며 박수를 보낸다./강우식, 장종권
소감
길가에 꽃들이 화사하게 피었고 걸어가는 오솔길은 가끔 이야기가 있는 집이 한 채씩 다가온다. 집 뒤로는 대나무밭이 무성하다. 어디선가 함께 한 무척 낯익은 곳인데 길을 가다 잠에서 깬다. 행복한 순간이 꿈으로 끝난 게 서운하여 못내 그곳이 어딘지를 생각해 보지만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런 꿈을 몇 차례 꾸었다.
내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곳이 꿈에서는 아주 친근한 곳으로 다가오는 마술 같은 시간. 내가 꿈꾸는 이상세계가 어쩌면 이런 곳인가. 현실은 꿈처럼 달콤하지도 않고 녹녹하지도 않다. 하고자 하는 것은 깊이가 약하고 올곧고자 하는 것은 욕심이 앞선다. 시간이 제어되지 못해 물처럼 흘려보낸 양이 부피를 알 수가 없다. 그저 지구본 속에서 툭 튀어나와 오히려 지구본을 돌리며 마냥 신기해하며 하나하나 신천지를 살피는 아이처럼 파고들 곳을 헤쳐본다.
즐거우니 이제 갈 곳은 정해졌다. 이제껏 절은 옷 훌훌 털어버리고 하나하나 새 옷을 걸쳐보련다. 옷이 맞던 안 맞던 중요하지 않다. 어쩌다 날개달린 옷이 걸려들지도 모른다. 추락하는 옷이 될 수도 있다. 본 등단의 시점이 꿈속에서 본 영겁의 고향을 찾아가는 용기가 되리라 믿는다.
많이 어긋나고 뒤틀릴 수 있지만 믿고 기꺼이 인내해 주신 장종권 선생님, 말없이 지켜봐주신 강우식 선생님. 그리고 막비회장님 및 선배들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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