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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광봉/시(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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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광봉 신인상 원고
어느 봄날에
시시한 일상에 너울너울 벚꽃이파리
봄인가?
안산(鞍山) 에델바이스
설악에 피었단 소릴 들었네
안산 깊은 절벽 끝에 솜다리꽃
곰취
쌉싸래한 향으로 감추인 것을
기어코 익히고 마는 사람의 혓바닥
수달래
주왕산 화살촉에 피어났는가
뱀사골 탄피에 녹물 들었나
진달래 능선
화르르 화르르 용맹정진도
후두둑 허물어지는 능선길
나팔꽃
별빛 아래 배배 꼬던 몸
백주대낮 헤픈 웃음 어쩐 일일까
하얀 싸리꽃
별무리 은하수로 흐른다
너울 너울 조팝꽃이파리
오월 청보리
뉘 부르는 소리에
밀려갔다 밀려오는 청보리 물결
선자령에 서서
바람 부는 선자령엔 파도 소리가 보여
눈 내린 선자령엔 들꽃 향기가 들려
천왕봉 쑥부쟁이
유혹이 두려웠던 게지
구절초와 다투어 바람 뒤에 숨다
교동여자
교동 브로끄 담장 너머
빨간 장미, 숨 막히게 그리울 때가 있다
낮술
회사야
니가 이리 오든가
황태
황태는 말라서 썩지 않는데
메마른 삶은 우째 푹푹 썩느니
봉인
현관문 비밀번호와 싸우다 지쳐
초인종을 누르는 무모한 남자
여름
그네 그림자 두엇 바람에 삐걱이고
텅 빈 운동장 가로질러 플라타너스 그늘 길게 눕는 오후
하지(夏至) 근처
한 해 허리 돌아서는 유월도 깊어
바람마저 숨죽여 볕을 피하는데
반물리학
이제 내 눈물에도
만 톤의 배를 띄울 수 있게 되었다
안산 백리향
떼지어 넘어가는 안개구름
백리향도 무리지어 안산 저 편에
봉인
현관문 비밀번호와 싸우다 지쳐
초인종을 누르는 무모한 남자
여인의 손
건널목 멈추어 아이 머릴 쓰다듬는 여자
내 머리칼이 간질간질하다
선자령에 서서
바람 부는 선자령엔 파도 소리가 보여
눈 내린 선자령엔 들꽃 향기가 들려
사월초파일
원통사 대웅전 마당엔
연등 그림자 하늘을 날고 있다
추천사
시란 문학의 장르 중에 가장 복잡하고 예민한 분야의 하나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단순하게 표현되는 분야의 하나이다. 나는 시인이 되고자 하시는 분들은 요즘 젊은 시인들이 쓰는 까탈스러운 시를 본뜨지 말고 가슴 속에서 가장 시가 되고 싶어 하는 것들로 시를 만들었으면 한다. 남들이 쓰는 시를 열심히 따라가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자기 목소리를 내는데 머뭇거리지 말아야 한다. 우선 본성에 충실한 시를 쓰기를 당부하고 싶다.
허광봉의 2행시 ‘어느 봄날에’와 정기재의 ‘풍금소리’ 등을 시인으로 첫발을 내딛게 한다.
허광봉의 2행시를 만나게 된 것은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반가웠다. 2행시란 내가 2행시에 대한 간단한 이론과 함께 지난해에 2행시만 모은 시집 <살아가는 슬픔, 벽>을 낸 바 있기 때문이었다. 後生而可畏라 했던가. 뒤에 오는 시인이 나보다 훨씬 상쾌하게 시를 잘 만들어내서 기쁜 것이다. 2행시가 쓰기 어려운 것의 하나는 자꾸 아폴리즘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는데 허광봉시인은 이런 폐단을 많이 극복하고 있어서 기대가 된다./강우식
소감
꽃을 처음 ‘발견’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 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는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산길, 들길을 가까이 하면서 길섶 꽃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풀도 보이고 나무도 보였다. 그네들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제1부에 실린 꽃과 풀과 나무들은 그래서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름을 부르자 비로소 그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들이 듣고 보고 느꼈던 소리들. 그들이 만났던 사람과 역사와 비와 바람들. 그 소리가 들리면서 겨우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메신저가 아닐까 싶다. 하늘과 바람, 꽃과 풀과 나무의 이야기를 전하고 날짐승과 들짐승, 풀벌레와 미생물까지 한데 섞여 우주를 구성하고 창조하는 이야기를 조물조물 연결하고 전달하는. 만일 시가 ‘우리’를 연결하고 이어주는 끈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구 역사상 인간만큼 파괴적인 존재도 없었다. 인간은 고백해야 한다. 더 많이 가지려고 빼앗았던 욕망의 지난날들을 고백해야 한다. 시인은 그 고백의 메신저가 돼야 한다. 그래서 산, 들, 강, 바다, 풀과 꽃과 나무가 다시 사람과 손을 잡도록 해줘야 한다.
대학 때부터 ‘시’를 놓치지 않고 늘 곁에 맴돌게 해주신 은사 강우식 선생님과 늦은 나이에 시 쓰는 힘을 보태준 대학 후배이자 시 선배인 김주대 시인에게 참말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지금 나는 ‘당선’을 ‘뽑았다’로 읽고 있다. 다시 ‘뽑았다’를 ‘거뒀다’로 확장해본다. 나락은 익어야 거두는 법인데, 빈 쭉정이가 아닐까 걱정부터 앞선다. 겨울 지나고 산동백 피는 봄이 오면 제대로 씨앗이나 뿌릴 수 있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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