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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설희/시(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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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방정식
구석구석 먼지를 빨아낸다
머리카락 과자부스러기까지 죄다 빨아낸다
라디오에서 *차가운 방정식이라는 소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나는 우주선 타고 은하로 밀항하고 싶다
은하를 빨아내고 싶다
은하의 묵은 때를 힘줄이 튀어나오도록 닦아내고 싶다
그래도 남은 때는 공들여 촘촘히 김을 씌우리라
은하의.....장판 이음매 사이에 낀 때를 천천히 문지르니
걸레 지나간 자리 축축하다
긁히고 찍힌 자국이 초승달모양으로 남아 있다
무슨 뾰족한 것에 찔렸는지
오래 김을 쐬어도 잘 지워지지 않는 희미한 별자리
처음엔 티끌 하나였으리라
그리고 자꾸 뭔가를 빨아내어
두 개 세 개... 몸이 커졌으리라
그렇게, 얼마나 오래 지나면 상처가 이렇게 초승달이 될까
초승달 모양의 발자국이
뚜구닥 뚜구닥 냉장고 쪽으로 가고 있다
은하의 방바닥이 거무스레하다
*차가운 방정식(The Cold Equations)> 톰 고드윈, SF소설
기울다
예고에도 없던 소나기다
처마 밑에 서서 바람의 방향을 기웃거리다
한발 물러서고 또 한발 물러서고
어두운 하늘
등 뒤에는 벽이 단단하게 버티고 있다
벽도 나의 등을 보고 벽처럼 서 있다
나는 벽 때문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
비가 쏟아지는 쪽으로도 갈 수 없다
시나브로 신발이 젖고 양말이 젖고 발가락이 젖는다
발목이 젖고 정강이가 젖고 무릎이 젖는다
번개가 번쩍 천둥이 우루루쿵
번개는 어느 쪽으로 사선을 그었을까
장대비가 소란하게 바닥을 쑤시다 물길을 만든다
가느다란 고랑이다
그 길로 케케묵은 먼지들이 황톳물로 흘러간다
처마와 멀어지는 저 빗물
어느 골을 기웃거리다 어떤 흐름이 되는 것일까
혓바닥이 긴 바람이 바다로 흠뻑 기울어간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곳에서 나는 그만 비와 함께
바람 쪽으로 기울어진다
새는 사람을 적신다
는개가 온다
방앗간 지붕 난간에 앉은 새 한 마리
날개를 접고 허공을 깨물고 있다
짹 짹...
새소리에 귀가 젖는다
생각이 젖는다
눈물 콧물 흘리며 매운 고추 담긴 양철통을 툭툭 치며 우렁우렁 집을 울리던
방앗간 주인, 발을 헛디뎌 휠체어 신세에 요양병원 간지 언제든가
제 생을 돌리던 벨트가 낡아 꺽꺽거리면, 그는 검은 기름 몇 방울
떨어뜨려주었을까
어느 산 아래서 요양을 하는지
발길 한 번 옮기지 못한 곳을 생각할 때
방앗간의 떡 익는 냄새가 골목에 머뭇거린다
어둑함이 길을 오래 가두고 있다
는개가 가랑비로, 소나기로 몸을 바꿨다
새는 소리를 들고 어디론가 떠나고 없다
내 귀는 텅 비었다
내가 문득 무거워졌다
염쟁이 유씨
그는 삼십년 째 무대에서 염을 한다
사자의 밥으로 쓸 쌀 찾으러 간다며 병풍 뒤로 가서는
붉은 모자를 쓴 아들이 되었다가
백발의 아비가 되었다가
허공에서 두 사람의 유령으로 펄럭이다가
꺼이거이 곡을 하다가
휴- 지랄 같으-은 세사-앙-
한탄을 하다가 문득
넋 놓고 보는 관객을 불러 세워 또 한풀이를 한다
그의 소품은 사람의 형상 하나
쌀 한 줌 알코올 한 병
소주 몇 잔
수의 한 벌
한 움큼의 솜
그가 형상의 뻣뻣한 몸을 꾹꾹 눌러 관절마다 반듯하게 펴는 동안
관객들은 한낮처럼 고요해지고
여덟 개 구멍마다 흘러나오는 한 생의 썩은 물을
솜으로 틀어막고 마지막으로 똥꼬 까지 막을 때
곡소리, 곡소리
관객의 웃음 같은 곡소리
여보게 이 몸뚱이가 썩은 물이었네 그려
이 퀴퀴한 냄새를 막고 있던 피부가 사기였네 그려
수천 년 썩은 물이 걸어 다니며
학생이 되고 선생이 되고 계장되고 과장되고 부장되고 사장되었다가
마침내는 송장이 되었네 그려
제 형상 앞에서 그가 운다
오늘치의 각본대로 운다
사진 한 장
사각의 하늘이다
꽃잎 한 장이 걸린 하늘이다
구름에 십자가가 걸린 하늘이다
꽃잎과 구름과 십자가가 평등한 하늘이다
백지가 구름과 십자가와 꽃잎이 된 하늘이다
소녀가 엄지와 검지로 그것들을 집어 든다
하늘의 모서리가 손톱 속으로 사라진다
손톱 두개만 유화처럼 화려하다
손가락을 치우면 모서리는 모서리가 되리라
직각이든 예각이든 귀는 날카롭다
그 속의 하늘 구름 십자가
모두 가장자리는 단호하다
냉정히 끝을 잡으니
문득 각이 각을 숨기고 유순해진다
사각의 속을 겹겹 포개진 하늘이라 하자
사각은 그래서 깊다
그것들이 시간의 늑막을 찌르며 오지 않을 날짜를 회억하게 한다
모난 것들이 둥글어지는 순간처럼
오리발
말을 할 때마다 오리발이 생긴다면
오리발이 많을수록 지위가 높아진다면
“안녕”
옆집 301호 아줌마는 오리발이 몇 개나 될까
볼 때마다 으흠 으흠 헛기침하는
502호 아저씨는 어디에 오리발을 숨기고 있을까
스크린에는 샴푸광고 신선하다
한 여인의 머리카락을 나부끼게 하는 저 바람은 오리발이 몇 개일까
진짜 현미 식초라 쓰인 저 식초는 오리발이 몇 개일까
오리발을 감춘 구두들이 뒤뚱뒤뚱 간다
오리발이 돋아나려는지 사타구니가 근질거린다
오리발들이 노 젖듯 미세 먼지 속을 떠가는 오후
천길 아래 진실이 뱀처럼
혓바닥을 날름거린다
추천사
이경림(시인)
진중한 접근과 확고한 중심의 시
이천년 대의 한국시는 두 개의 이데올로기로 분명하게 갈라졌다. 그 하나는 전통적 서정에
바탕에 두고 인간과 세계 사이에 공유된 부분을 찾으려는 시와 다른 한편은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재조직하여 새롭고 낯선 서정을 불러내려는 시들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비록 이 시대에 생겨난 것만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소월과 이상이 그 예이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이런 현상들은 있어 왔다. 사실 그런 정신이 문학을 아니 예술의 다양성을 획들하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 것도 사실이다.
김설희의 시 차가운 방정식 외 5편을 읽으며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은 현상에 대한 고집스러울 정도로 진중한 접근이었다. 그런 그의 태도는 자신의 어떤 개성도 철학도 없이 그저 시류에 편승해 자신도 알 수 없을 시를 쓰는 시와 대비 되며 오히려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가령 ‘차가운 방정식’에서 스팀 청소기로 청소를 하다 발견한 초승달 모양의 얼룩이 발자국이 되고 이윽고 방바닥이 은하가 되기까지 곰곰 따라가는 시인만의 사유의 흔적은 성실하고도 진중하였다. ‘염쟁이 유씨’에서는 한 염쟁이의 일생을 다룬 유장한 소리극 한 편을 보는 듯 먹먹한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시들이 대체로 편차가 없고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그간의 시력을 짐작할 수 있어 믿음직하다는 평들이었다. 염쟁이 유씨에 나타는 그의 생각대로 인간은 모두 제가 주인공인 한편의 연극 속에서 살다 간다. 그 속에서 /학생이 되고 선생이 되고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고/ 사장이 되/었다가 마침내는 송장이 되는 과정이 인생이다. 그의 표현대로 모든 인간은 제 형상 앞에서 울다 간다. 그 날치의 각본대로. 시인은 어쩌면 삼라만상이 제 몫의 울음을 어떻게 울다 가는지 곰곰 살피는 일을 화두로 받아 안은 자 들인지 모른다.
등단은 그저 출발에 불과하다. 그의 한발 한발이 어떤 확고한 중심을 가지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진중하고 성실한 그러나 자유롭고 유쾌한 발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소감
여기가 어딘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가만히 기억을 들쳐본다.
아직 철이 무엇인지도 모를 적이었다.
아랫방 마루 한쪽에 놓인 책장들은 ‘마을문고’ 라는 명패를 이마에 달고 있었다.
소설책, 잡지, 신문...
지금 생각해보면 속기 책이었던 것 같다.
지렁이가 구불거리는 듯한 선들을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따라 해 본 기억이 한 장 열린다.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나를 따뜻하게 데운다.
어느 햇살 좋은 날, 황토와 짚을 섞어 벽돌을 만들며 땀을 훔치는 아버지의 마당을
보며 마루에 걸터앉아 달랑달랑 햇살을 흔들며 책장을 넘기던 때,
배나무 아래서 장작을 패는 아버지의 굵은 팔뚝을 보며 책을 읽던 때,
그런 디딤돌을 딛고 걸어오면서 어느 때 심한 파도를 만난 적 있었다.
파도는 나를 밀고 당기며 번쩍 허공으로 동댕이쳐 버렸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손에서 시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고 물으면 모르겠다고 그냥 놓을 수 없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저 언젠가는 이 파도가 잠잠해져서 바다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리토피아가 나의 바다가 되었다.
파도의 끝자락이라도 잡고 끝까지 가 보고 싶었던 곳
나의 젖은 눈과 귀 머리와 가슴이 부디 마르지 않길,
존경하는 시인의 말처럼 현상을 잘 관찰하며 현상이 말하려하는 것을 잘 받아 적으며
천천히 겸손하게 가고 싶다.
졸작을 추천해 주신 선생님들과 선뜻 거두어 주신 리토피아에 깊이 감사드린다
힘이 되어 준 현상동인들과 숲동인들, 가족들에게도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다
김설희
62년 경북 상주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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