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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구명-이산)/시(2015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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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읽은 편지
모퉁이길 돌아가면
어느새 초겨울의 짧은 해가 저물고
달빛 부스러기 환한 강둑길의 흔들림이 있다
기다리지 않아도, 기다림마저 잊었을 때도
너는 어김없이 와서 성큼 다가선다
바람은 급한 사연 품고 어딘가로 달려가고
부시시 눈 비비며 늑장 부리는 너
불어갈 바람의 흔적이라도 알고 있는 걸까
어김없이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들,
뭔가 쏟아질듯 냉한 하늘 바라보다가
궁금하게 밀봉된 편지 한 통 앞에 나는 머뭇거린다
문득 내 앞에 놓여 있던 길이 사라지고
여기저기 사람들도 사라진다
기다리던 눈은 내리지 않는다
우리들의 생명에 불을 지필 수 있다면
밟고 밟아 단단히 길이 된 땅에서도 다시 꽃 한 송이 피울 것이다
들판 위에 서 있는 이름 모를 나무도
한 계절 쌓인 낙엽 무더기 크기만큼의 사색을 가졌다
이 계절에 분명해질 수 있는 것은
새로 태어나기 전 아득함만큼의 고요이다
지난 계절을 담은 밀봉한 편지 앞에서 나는 머뭇거린다
부게로의 그림 앞에서
흐릿한 부게로의 그림 앞에서 그대를 찾는다
횡단보도 신호대기중의 익숙한 침묵 같은 고요 앞,
내 속마음 탄로 난 듯
그리움 담은 상상의 지도에 표시를 남기고
늦겨울 바람이 떠나가고 있다
비밀스럽게 꼼꼼히 적어둔 주소록은
내려놓고 싶지 않은 추억만큼 은근하다
그대 체온 간직했던 손끝이 무디어 가고
잠시 망설이던 그 바람을 깨닫는다
누군가 잠을 설치며 두런거리던 밤이 깊어간다
눈 녹은 먼 산, 허전한 모습 같았던
겨울의 주문진 바다 여행을 꿈꾸어 보았다
허공은 방향감각을 잃었다
*부게로 :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
인상주의를 반대한 엄격한 기법으로 완벽에 가까운 표현을 하였다.
대표작으로 ‘바느질하는 여인’이 있다.
포구의 기억. 1
고요 속, 밤은 조각조각 별빛 부스러기로 내려앉는다
어둠이 반짝이는 해안선
기억 따라 침묵이 앞서 가는 늦은 계절
불안한 발걸음에는 선착장 어수선한 사연이 담겨 있다
새벽 바다로 떠났던 허기진
어부의 주린 배 채우기 위한 명목으로
몇 마리 오징어는 난도질당했고
먹물 검정색으로 스스로 조상하며 죽음을 기념하였다
만선의 느긋함, 어둑한 선착장 내려서
그 사내 허름한 술집 작부와 그만의 찬란한 밤을 보냈다
돌아온 배들이 단단히 묶여 숨죽인 선착장
사연들, 묵직한 어둠 속 침묵하는 밤
그 시간 어루만지듯 별빛 시퍼런 해안가
묵혀둔 그리움에 떠밀려 나는 길 위로 시선을 빼앗겼다
포구의 기억. 2
시선이 끝나는 그곳,
가도가도 만나지지 않는 신기루 같은 점
내 숨결이 지나쳐온 회상 속의 수많은 기억들
그렇게 이어지고 이어진 흔적들,
어디였는지 모를 순간의 기억들이 헝클어 진 채
그 점들 하나하나 밟히는 길이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뒤섞인 혼돈의 걸음
곤한 잠은 민박집 차디찬
방바닥에 무기력하게 내려놓고
아우성으로 창문 틈 비집고 드는
심란한 바람 소리에 깨어버린 시간
나는 시어들을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만들고
두런두런 삶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꿰맞추어
뭉클한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거칠기만 한 주문진 바다의 바람과
긴 저음의 파도소리가 동행해 주는
사연 많은 시커먼 밤의 골똘한 시간 속의 점들,
그것은 결국 나였다
적영赤影
빛 그리고 내가 투과된 그림자
긴 그림자가 붉다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이후의 공허한 색채
그건 고갈된 그리움 내려놓은 기다림이다
붉은 빛으로 응집된 나는
이제 누더기를 벗으려 한다
그들이 나를 버리고 얻은 착각이 있다면
나 또한 버리고 자유로우리라
모든 것은 마음
밝고 가득한 이 따사로움의 빛
얼마나 긴 세월 내게 돌아오라 손짓 보내고 있었을까
빛 속으로 걸어갈수록
빛이 벅찰수록 그림자 작아지고
붉고 긴 나의 그림자 모래바람으로 사라진다.
<심사평>
자아 성찰을 위한 참신한 기획 엿보여
우리는 왜 시를 쓰는가? 미적 기획이란 아무리 십분 양보한다 해도 실용성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시’는 자아에 대한 반성적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실용적 목적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시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지극히 당연한 명제를 가끔은 간과하거나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안타깝다. 이영석 시인은 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으로서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이 계절에 분명해질 수 있는 것은/새로 태어나기 전 아득함만큼의 고요이다/지난 계절을 담은 밀봉한 편지 앞에서 나는 머뭇거린다”(「못 잃은 편지」)고 표현했다. 또한 “빛 속으로 걸어갈수록/빛이 벅찰수록 그림자 작아지고/붉고 긴 나의 그림자 모래바람으로 사라진다.”(「적영(赤影)」)는 부분은 반성적 인식이 시작되는 지점을 적확하게 지시하고 있다.
이영석 시인의 미래를 위해 첨언하자면, 아직 군데군데 육화(肉化)되지 못한 관념의 편린(片鱗)들이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점은 꼭 시정해야 할 것이다. 현대인의 일상은 ‘자동성, 단순성, 반복성’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이것은 철학적으로도 심각한 과제이며, 당연히 시적 테마로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영석 시인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피상적 인식을 개선하는 방법은 ‘관찰 → 통찰(insight)'로 사물과 사태를 끊임없이 탐색해 보는 것이다. 시인의 충분한 역량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장종권, 백인덕
<당선소감>
W.H. 허드슨의 “詩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라는 말을 기억한다.
우리들의 삶은 그러한 상상과 감정의 물결 속에서 나름대로 타고난 성향과 경험에 의한 체계로써 살아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를 tM는 나의 모습은 익숙하게 본질의 나를 찾아가는 수행의 한 방편으로 서서히 생활 속에서 굳어져간 것 같다.
중년을 지나는 이 나이에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어설프고 부끄러운 것들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그래서 종종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일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시를 쓰며 위로를 받고 마음을 다스리며 맑은 새벽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시는 나에게 있어서 위로의 존재이고 치유의 과정이고 하나의 수행법인 것이다.
부족한 사람에게 시인으로써 거듭나게 기회를 준 <리토피아>를 마음에 깊이 새겨봅니다.
<장 종권> 주간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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