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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현/시(2016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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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너스 하이
야근이 없는 날이면 아버지는 강변을 달렸다
달빛이 함께 휘영청 달렸다
바람이 저를 안고 잠시 쉬어 가라고 유혹할 때쯤
빈 쌀독, 입 벌린 아기새들 생각으로
거기서, 그만 딱 멈추었다
잘 익은 감 서리를 하는 마음 같은 것으로
쓸데없이 오금이 저린다
까치밥을 주렁주렁 남겨 둔 감나무를 가리키며
해 걸이도 하지 않는다고
거들먹거리던 옆집 사내를
아버지는 욕하지 않았지만
지치지 않는 저 감나무가 부럽다
옆집 감나무를 앞마당에 옮겨 심는 상상을 한다
날갯짓 익힌 새가 꼭대기에 둥지를 틀고
계절 내내 마당을 채우는 소리도 시끄럽지 않을 것 같다
페이스 조절하는 강물처럼,
한 호흡이 고개를 넘는다
강물이 타전되는 소리와 빛들 속으로
아버지 몸이 사라져 간다.
눈물의 재구성
하산 길에 만난
까치 한 쌍이 나를 앞질러 간다
한 마리가 날아 나무로 오르면
다른 한 마리가 쫒아 그 나무 뒤를 따르고
다시 한 마리가 다른 나무로 옮기면
연신 따라가서 간격을 좁힌다
까치 두 마리가 서로를 향해 흐른다
당신이 흘러 나에게 닿은 것은
기쁨으로 나를 노크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뒤따르는 날갯짓처럼 날아서 오는 거라고
슬픔에서 기쁨까지
그 물방울의 신호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있었어요
누군가를 맑게 껴안는 고요한 간격
눈물은 항시 서로를 향해 흐르는 서정시
갈애渴愛*
덜 자란 맹수 눈이
텅 빈 우물이다
날선 밤, 세상을 달빛만이 길잡이한다
보이는 건 어둠뿐
어둠을 두려워하는 건
의지와 상관없는 태생의 불가피함
조련 받는 것은 약자만이 가지는 안식이다
조련을 포기한 강자, 겨울 밤하늘 프로키온이
숨긴 허기에 터진 욕망을 견디지 못하고
먹잇감 찾아 기웃거린다
먹잇감을 눕힌 순간은 체온을 나누는 시간
짧은 그 시간이 지나면
어둠 속 감추어둔 배고픔이 맹렬히 저항하고
다시 목마른 맹수 되어
또 다른 먹잇감 찾아나선다
마치
홍등가 불빛을 탐미하는
사내의 젖은 눈빛으로
-진짜 강자가 된다는 건
동굴에 감쳐둔 덜 자란 눈을 바깥 햇살에 당당히 드러내는 일이다
*(불교) 번뇌에 얽매인 사람이 오욕에 집착하는 것
창窓, 창槍
앞, 뒤로 닫힌 창窓이 바람을 가두었다
잎사귀가 마음껏 움직이는 건 틈새마다 열린 공간이 있기에
우리의 사랑이 질식사 한 건
우리 사이에 난 창窓을 닫아서지
나와 무관한 사랑 일 때에 당신과 나 사이에 있던 窓은
당신을 가두고 싶어지던 날부터 생겨났다
너와의 사정거리는 손가락 한 뼘,
꼼짝마
내가 꿈꾸는 세상은 당신의 그림자이어야 해
내가 타는 자전거가 낸 길은 당신 쪽 방향이어야 해
나의 독백이 당신의 심장을 찌르는 창槍이 되었던 걸
눈치채버린 날
당신의 문지방을 넘나들던 나의 바람을
한 평도 안 되는 방에 가두었다
혹, 당신 방에서 새는 불빛이 다시 내 방까지 닿는 다면
내 작은 창窓에서 풍금소리 들릴 것 같아
어쩌면 그것은
강물 같은 그런거, 막아도 돌아서지 못하고 끝도 없이 흘러가는 거, 흐르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산산이 부서진다 해도 닿고 싶은 거, 소멸 따위 겁내지 않는 거, 그게 ( )이라고 한다면 제발 ( )은 잊고 싶었지. 나와는 무관 했으면 싶었지 어쩌다 나에게도 가슴 뛰는 날, 그런 기미에 놀라던 마음이 들 때면 번데기처럼 주름을 접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곳에 숨기고 서둘러 지퍼를 채웠어 어느 날, 짧은 비명 소리처럼 투둑하고 갈라진 지퍼 안에서 쏟아진 일그러진 자아, 아 아 이건 내가 아니야 도리질 치며 접힌 부분을 찬찬히 펴 보니 ( )따위 잊고 살 거야 하던 그 때의 얼굴이 주름으로 고스란히 견디고 있는거였어 어쩌면 아무리 커다란 돌덩이를 끌어 모아 둑을 쌓아도 틈새 사이로 새어나오는 흐르는 물처럼 어쩔 수 없는 거, 그게 ( )일지 몰라. 아무리 밀어내도 나를 피해 내 안으로 슬그머니 흘러드는 거, 퍼내도 마르지 않는 옹달샘 같은 거, ( )어쩌면 그것은
나만의 성
<심사평>
개성적 시어 획득을 위한 노력 돋보여
두말할 나위 없이, 글로서 시의 기본 단위는 어휘(시어)이다. 음운이나 음절 단위에서는 이른바 시에서 지칭하는 '의미(meaning)'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도 좀 자세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독으로 떼어낸 시어의 수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의미(sense)'일 뿐, 사실 ’의미(meaning)'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시적 의미는 대체로 후자를 지칭하지 전자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무슨 말인가? 전자를 강조할 경우 시어는 축자적, 즉 사전적 의미의 한계를 넘어서는 함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송정현 시인은 오랜 습작과 나름의 시작 방법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소재의 선택이나 이에 따른 시형(단련 산문시나 연 갈이 한 서정시)의 구성 등에서 흠잡을 데 없는 완숙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누군가를 맑게 껴안는 고요한 간격/눈물은 항시 서로를 향해 흐르는 서정시”(「눈물의 재구성」)나 “진짜 강자가 된다는 건/동굴에 감쳐둔 덜 자란 눈을 바깥 햇살에 당당히 드러내는 일이다”(「갈애(渴愛)」)처럼 완성도나 강렬도를 떠나 시적 명제를 제안하려는 노력을 높이 살만하다고 할 수 있다. 정서적 교감이 시의 본령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지만, 마찬가지로 통찰을 통한 이해의 확산 또한 시의 다른 쪽 핵심이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 통찰적 이해를 표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이른바 ‘시적 명제’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송정현 시인이 미래를 걸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의 특징은 오히려 “앞, 뒤로 닫힌 창窓이 바람을 가두었다/잎사귀가 마음껏 움직이는 건 틈새마다 열린 공간이 있기에”(「창(窓), 창(槍)」)나 “( )어쩌면 그것은”(「어쩌면 그것은」)처럼 미완 혹은 특정되지 않은 가능성에 있을지도 모른다. 앞에 언급했지만 좋은 시어란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놓는 것들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시인이 가급적이면 시의 표면에서 시어의 의미를 강제하려 들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 또한 시인의 미래를 위한 한 제언일 뿐이다./장종권, 백인덕
<당선소감>
자유를 걷듯 시를 걷다
믹스커피를 좋아한다
언젠가 스푼이 없어 그대로 녹여 마셨다
그런데 웬걸,
약간 쓴 첫맛이 지나자 점점 부드럽고 점점 달콤한
고유의 맛들이 차례로 오감을 자극하고 텁텁한 맛이 사라지는
새로운 맛의 신세계에 입문하는 순간이였다
시가 주는 세상이 그랬다
때론 종일 외롭게 때론 종일 무기력하게 때론 정신없이
들쑥날쑥한 수많은 표정들을 단속하지 못해
벽 없는 방에 갇히는 꼴 이였던 한 때,
한 자 한 자 적은 활자들이 시의 모양을 갖추어 갈 동안
벽은 허물어지고 자유를 걷는 순간,
신병은 교수님과 정윤천시인 정도전시인께서 앞에서 당겨주시고
늘 위태로운 뒤태를 기꺼이 든든하게 받쳐주는
갈무리문학회 가족들에게 감사드린다
더불어 문창 도반들에게도 감사드린다/송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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