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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숙(시/2016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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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문 신인상/2016년 여름호(제62호)
물봉선화
산들바람 새털구름 사이로 어김없이 네가 오는구나 가녀린 허리, 고운 얼굴의 누이처럼 오는구나 새끼손가락에 꽃지짐 해주던 버선발의 누이로 오는구나 아침이슬처럼 가만 가만히 오는구나 팔월 폭염 거센 비바람 재우고 또 재우며 비로소 네가 오는구나 이름 모를 잡풀들이 다투어 피어나던, 돌멩이 뒹구는 그 언덕, 다홍빛 물들이며 네가 나에게 오는구나 머무르는 곳마다 맑은 물 흐르고, 네 손짓 하나에도 물의 길이 트인다지 물이 꽃이 되고 꽃이 다시 물이 되어 젖는다 우화등선 나비처럼, 모든 것들의 처음으로, 배냇시절의 너를 안고 네가 나에게 오는구나
맑은 날
개울을 곁에 끼고 걷는 숲길, 길 따라 오르는 발길과는 달리 마음은 물소리 따라간다 발걸음 멈추고 뒤돌아보니 멀리 보이는 산도 가까이 서 있는 나무들도 입춘 지난 눈빛 푸근하다 섬돌 위에 앉아있는 정갈한 고무신과 어디선가 다듬이 소리 들릴 것 같은 낯익은 뜰, 키 낮은 돌담의 홍매화 가지 위로 햇살이 톡톡 꽃봉오리 빚는다 햇볕을 당기느라 연못 위 홀로 처진올벚나무는 올올이 제 깃털을 허공으로 띄운다 작은 나무 대문 열면 외할머니 금방 맞아줄 것 같은 안중지인眼中之人 선암사, 아들과 함께 기와불사 하며 올 한해 소원도 새기고 와송 곁에서 따뜻한 차 한 잔으로 화엄에 든다 무릎 위에 앉은 햇볕에게도 고마움 건네는, 설 초하루 한나절이 둥둥 떠 맑게 흐른다
역류성 식도염
모래밥을 먹고 있었지
쓰디쓴 바닷물을 울컥울컥 삼키며,
바람의 묵음黙音으로 북쪽 벽엔 허옇게 곰팡이가 자라나고
해질녘엔 삭정이 가슴이 조였어
보이는 것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그녀를 문밖으로 밀어내고 있었지
발효되지 않는 말들이 밀물처럼 치밀려와
밭은기침을 만들고 죄를 만들고 감옥이 되었어
식사의 끝은 그녀가 원할 때 오는 것이 아니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도 없어서,
목련 가고 모란이 피고 다시 목련 오도록
그녀는 모래 밥을 쉬지 않고 먹어야 했어
누군가 잔디도 한 줌, 조개껍데기도 약간 넣어주었지
문밖에 일찍 온 적막을 불러들여
무너진 돌담 속에서 같이 저물었지
밀물이 모래를 휩쓸며
해안을 넘어 산기슭까지 밀려왔어
아기 고양이가 나를 따라와요
그림자도 뜸한 둘레길 어귀에서
한 뼘도 안 되는 깡마른 아기 고양이 한 마리,
날갯죽지를 축 늘어뜨린 채 칭얼대며 따라와요
자꾸만 따라와요 나는 네 엄마가 아냐
더 이상 덧날 상처는 만들고 싶지 않아
내 가슴은 마른 귤껍질 같아
너를 들여놓을 한 치의 공간도 없어
거미줄 앞에 흠칫거리는 풍뎅이를 좀 봐
잎 떨군 나무들도 손사래치고 있잖아
넌, 달빛의 푸른 망토를 날리는
빨간 지붕 위의 낭만 고양이가 아니야
바람이 지나는 허공은 울고
뜰 밖의 작은 채송화도 어느덧 시들었어
곰팡이 핀 그리움 하나 가슴에 안고
네가 걸어가야 할, 때론 숨찬 저 언덕
물 위에 일렁이던 햇빛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잎새마다 노을이 뚝, 뚝, 지는데
움츠려 말아드린 네 기진한 발자국
나는 네 엄마가 아냐
나는 네 엄마가 아냐
응시
길을 오르는데 누군가 내내 나를 따라왔다 넘어질라 길 잃을라 서너 살 적 내 아이 걸음으로 왔다 코끝을 간질이던 아까시나무 꽃은 흔적도 없고, 때깔 고운 보랏빛 꿀풀의 자태는 아니다 쪽동백 때죽나무 꽃은 더더욱 아니야, 아니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산책길, 찔레꽃 향기를 약간은 닮은 듯한, 그녀를 찾느라 오늘 아침도 많이 더디다 오래 두리번거리던 까치 한 마리 떡갈나무 사이로 훌쩍 날아오른다 누구일까? 바위 틈 사이로, 가시덤불 사이로, 숨죽인 사흘만이다 바람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노랑나비 흰나비 떼 지어 앉아있는 듯 덤불속 꽃무리, 하늘 한쪽에선 햇살 내려오고 숲은 기쁨으로 푸르게 일렁인다 그 눈빛 넋 놓고 바라보는데 언뜻 지난밤의 꿈 생각이 스친다 안아보고 싶어서, 기대보고 싶어서, 둘레둘레 둘레길 함께 걸어보고 싶어서, 그리운 것들이 산처럼 많아도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한동안은 환할 꽃 편지로 화면을 물들이는 딸아, 인동초 꽃이란다
당선소감
시 쓰기는 상처를 다독이는 일.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서도 귀한 것을 배우게 되는 숲길입니다. 한때 사랑하였으나 빛을 잃고 흘러가버린, 냉이꽃 생강나무꽃 애기똥풀꽃 남산제비꽃 산복숭아꽃 각시붓꽃......모든 봄꽃이 다 겨울부터 준비해온 꽃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아름답고 소중하기 그지없습니다. 움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잎을 펼치고 씨앗을 맺어온 고단하고 환희에 찬 삶의 무늬들, 그 빛나는 삶을 겨울부터 미리미리 준비합니다. 냉이꽃 한 송이가 제 안에서 거듭나며 살아 일어서는 시간의 숲길 이야기들은 내 시의 화음을 이루고 근원이 되었습니다
봄 숲의 초록은 이따금씩 안개를 불러올 때도 있습니다. 한 겹 베일에 싸인 숲은 새소리마저 물기에 젖어 멀리서 들리는 것 같습니다. 시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직 한참을 더 안개 속으로 들어가야 하겠지요. 시 쓰기는 제가 제 속에서 거듭나면서 겨울을 견디고 안개 속으로 들어가 비로소 따뜻하게 피어나는 일이라는 생각합니다.
지난 일 년은 뿌리 없는 풀처럼 흔들리고 메마른 시간들이었습니다. 내 안에 자욱하게 눈물 머금은 것들을 하나하나 종이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 미약하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치유의 전부, 그때마다 말들은 얼룩지고 여백은 흐렸지만, 시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힘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영화관의 관객처럼 오늘은 행복한 제 모습을 지켜보며 아침을 맞이하겠습니다.
내 마음 속에 시詩로 살고 계시는 어머니... 사랑하는 내 아이들과 내 생의 모든 필연과 잠시 찾아온 달콤한 휴식과도 같은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며 사는 삶이 무엇인지 가슴 깊이 새겨주신 신병은 교수님, 문우들, 부족하고 부족한 저의 글에 눈 마주쳐 주신 리토피아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더욱더 정진해서 시를 쓰는 것으로 답하겠습니다. 부족하기만 한 시를 격려해주신 장종권 주간님께 온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자아성찰의 강한 의가 피력된 힘 있는 시행들
시를 쓰는 이유를 굳이 몇 갈래로 구분해 보자면, 그 전제로 ‘자아/세계’의 관계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자아와 이상’에 대한 것인가, ‘세계와 현실’을
향한 것인가를 분별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겸손하고 소박하게 생각해 보면, 치열하게 시를 쓰는 이유 중에는 ‘자아에 대한 이해’를 기획, 의도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박효숙 시인은 이런 차원에서 대단한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번에 선정하게 된 다섯 편의 작품이 그런 상징성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팔월 폭염 거센 비바람 재우고 또 재우며 비로소 네가 오는구나”(「물봉선화」)에서 ‘너’는 물론 직접적 지시대상으로서는 ‘물봉선화’지만 ‘누이처럼’이라는 비유를 통해 보다 순수했던 시절의 시인의 초상(肖像)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함축적 이미지들이 종국에는 “나는 네 엄마가 아냐/더 이상 덧날 상처는 만들고 싶지 않아/내 가슴은 마른 귤껍질 같아/너를 들여놓을 한 치의 공간도 없어”(「아기 고양이가 날 따라와요」)라는 힘없고 여린 존재를 향한 일갈(一喝)을 반어(反語)로 들리게 한다. 그래서 시인은 ‘인동초 꽃’을 향해서도 “그리운 것들이 산처럼 많아도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한동안은 환할 꽃 편지로 화면을 물들이는 딸아”(「응시」)라 지칭할 수 있다. 존재를 향한 그 응시가 결국은 자아를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장종권, 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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