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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평론/2016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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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1,080회 작성일 16-11-14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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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문학평론

당선작

 

불가능의 가능성과 공감의 서사

- 무너져버린 세상에서 때늦은 소설 읽기

 

 

불가능의 가능성

인간은 ‘나’로 태어나 ‘나’로 죽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삶이 죽음에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삶은 ‘단독’의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외면하고 싶지만 우리가 던질 수 있는 화살은 하나다. ‘나’가 ‘너’로 죽을 수 없듯이 한 번 던진 화살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삶은 견고한 불가능의 연속이다.

원더보이는 우리가 던져버린 화살이 아니라 던질 수 있었던 화살에 대해 묻는다. 그 물음은 ‘단독’의 종말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의문이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벤야민의 말을 비틀어 이야기하자면 유일한 ‘입법권자’이자 ‘행정권자’로 군림하던 세계의 질서가 뒤틀리면서 또 다른 질서가 우리 안으로 틈입하는 순간이다.

따라서 김연수가 소설의 첫 번째 장을 “1984년, 우주의 모든 별들이 운행을 멈췄던 순간을 기억하며”(9)로 시작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열 다섯 살이 되던 해, 나는 시간이 멈출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던져진 화살이 아니라 던져질 수도 있었던 어쩌면 다르게 던져졌을지도 모르는 화살에 대해 묻는 것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알았다”라는 서술어의 세계다. 시간이 멈춰질 수도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재라고 ‘인식’하는 순간, ‘상상’이 ‘인식’의 세계로 건너온 ‘행위’의 순간, 시간은 전혀 다른 체계 안에서 흘러간다. 뉴턴의 물리학에서 양자역학의 세계로, 불가능의 세계에서 가능의 세계로.

이런 점에서 원더보이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소설이다. ‘가능’의 역학을 위해 김연수는 ‘그’의 세계가 아니라 ‘나’의 세계를 선택한다. 그것은 부지(不知)의 1인칭의 세계에서 전지(全知)의 3인칭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며 ‘나’의 디에게시스와 ‘그/그들’의 ‘미메시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시도이다. 1인칭의 세계 안에 갇혀있는 제한된 화자(narrator)를 3인칭의 세계로 옮겨놓는 ‘불가능의 가능성’. 이를 위해 그는 선행적 시간을 뒤틀고 환상의 시공간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누구라도 한번은 4조5299억7028만3395번 다시 태어나고 우주의 모든 별들을 헤아릴 수 있는 순간으로. 그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견고하게 버티고 있던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 내린다.

 

2. 말하는 ‘나’와 말할 수 있는 ‘나’

“원더보이”가 된 소년의 능력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전지(全知)의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것은 ‘나’라는 제한된 화자의 자리를 전지(全知)의 자리로, ‘나’라는 1인칭을 ‘그/그들’의 3인칭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나’는 말하는 사람인 동시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나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인 동시에 ‘그/그들’의 세계를 재현(representation)하는 자이다.

‘나’가 나의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나’가 나에 대해 이야기하며 동시에 ‘그/그들’의 세계를 재현한다는 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1인칭의 화자가 3인칭 화자의 시선을 동시에 획득하는 것이며 지상의 시선이 우주의 시선을 가지는 것이다. 근대 소설이 공고히 지켜왔던 서사의 규범을 흔드는 이러한 전략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김연수는 타인의 생각을 읽는다는 ‘경이(wonder)’를 선택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의 생각은 인식 불가능의 영역이다. 인식 불가능의 영역에서 대상은 존재 이전의 자리에 놓여있는 것이다.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은 세계 안에서 무존재로 존재한다. 타인의 생각을 읽는 ‘나’의 ‘경이’는 존재 이전, 무존재로 존재하는 것들을 인식하는 일이고 활자화하는 것이다. 바흐친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생각의 형상을 포착하는 사람이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활자화되는 순간, 그것은 비로소 말해질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이 말해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음험하고 위태롭다. 말할 수 없는 것이 말의 형체를 얻는다는 것은 ‘말’의 형체를 무화(無化)해왔던 ‘세계-권력’의 균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경이’를 선취하고 독점하기 위한 ‘권 대령’의 등장은 불가피하다. ‘권 대령’은 형체를 얻어서는 안 되는 숱한 말들을 억압하고 길들이는 자이다. 억압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질서 유지자로서 ‘권 대령’은 ‘나’의 ‘경이’를 자신의 세계 속에 편입시키려 한다.

80년대는 “대자보처럼 내 몸 안에 검고 붉은 자음과 모음이 가득한 것 같았”던 시대였고(133) 말이 육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풍문으로만 떠돌았던 시대였다. 오로지 자백만이 승인되던 시대에서 ‘나’의 ‘경이’는 고통 그 자체이다. “그 겨울 내내 고문실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고문당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렸다”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나’와 ‘그들’에게 행해졌던 고문은 무엇인가. 고문은 오직 하나의 질서만을, 그 유일성을 신체에 폭력적으로 새겨놓는 일이다. ‘입법권자’가 자신이 창안한 질서를 타인의 신체에 폭력적으로 각인시키는 것이다. 이 도저한 비윤리성 앞에서 ‘나’의 말은 ‘권대령’으로 상징되는 ‘자백의 질서’ 안에서 왜곡되고 변질된다. 하지 않은 것, 기억나지 않은 것을 자백하는 것은 자신의 삶이 그 안에서 폭력적으로 편성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앞서 원더보이」가 불가능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소설이라고 할 때, 권력에 의해 변질되고 왜곡된 ‘나’는 복원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복원의 가능성은 비윤리적 강압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라지지 않는 ‘나’의 세계, “내장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끌어 모은 “허연 것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세계의 질서가 “지울 수 없는” “저마다의” “삶의 순간들”이다. 개별자를 지우고 세계 질서의 유일성으로 환원시키는 비윤리적 권력의 작동에도 지워지지 않는 개별적 삶의 순간들. 그것은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며 “자기가 개나 돼지나 혹은 곤충이나 벌레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일들”이며 “가슴이 터지도록 누군가를 꽉 껴안아 다른 인간의 심장에 가장 근접했던 순간들”이다.(98)

단일하고 유일한 질서를 강요하는 ‘자백의 어법’에 맞서 ‘나’의 말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의식적일 수밖에 없다. 아빠가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고 해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적어두는” ‘비망록’ 적기에 열중하는 것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무엇을 적느냐고 물으면 아빠는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기록한다고 대답했다. 기억하지 않으면, 혹은 기록하지 않으면 인생의 모든 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듯이. (…)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생각일지라도 수첩에 모두 적었다. 이뤄질 가능성이 없는 몽상들, 두 눈을 뜨고 바라보는 꿈들, 문장으로 만들 수 있을 뿐 아무런 현실성도 없는 소망들.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그런 몽상과 꿈과 소망을 수첩에 적는 이유가 나는 궁금했다.(119)

아빠의 ‘비망록’에는 “이뤄질 수 없는 몽상들”만 잔뜩 적혀있다. ‘몽상과 꿈과 소망’은 ‘지금-여기’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지금-여기(뉴턴의 물리학)가 아닌 ‘너머’의 세계(양자역학)가 존재한다면 아빠의 ‘비망록’은 몽상과 꿈을 실현하는 구체적 기반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양자역학의 그 유명한 ‘슈뢰딩거 고양의 역설’을 등장시킨다. “죽은 반쪽의 고양이는 바닥에 쓰러져 있”고 “산 반쪽의 고양이는 여전히 서 있는”는 삶과 죽음의 역설적 동거를.

양자역학은 여러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살거나 죽은 상태 모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뚜껑을 열기 전에도 살고 있거나, 죽은 단 하나의 상태로 존재한다. 죽은 고양이와 살아 있는 고양이가 서로 다른 우주에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평행우주 혹은 다중우주의 서사적 소환)

 

3. 공감의 서사와 우주의 비밀

‘원더보이’가 되는 것은 “특별한 능력을 소유”하는 일이며 그것은 “매순간 삶이 놀라움으로 가득해지는 일”이다. ‘원더보이’가 된 ‘나’는 그 누구도 “짓밟거나 파괴할 수 없”는 자기 안의 “놀라움”을 간직하게 된다.(87) 이 “놀라움”을 변질 불가능한 ‘심층’이라고 명명할 때, 그 ‘심층’이 맞닿는 것은 ‘공감’과 ‘공감의 전달’이다. ‘나’가 자신의 ‘경이’에 대해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의 순간에 떠올리는 아름다운 추억들을 함께 느끼는 게 무슨 초능력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할 때(135) 강토이자 희선 누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네게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느끼는 능력뿐만 아니라 남들에게 네 마음도 그대로 전해주는 능력, 그러니까 교감과 동조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지. 나는 왜 네게 그런 능력이 생겼는지 알아. 사고가 일어났을 때, 너는 어떤 빛을 봤다고 했어.(135)

‘원더보이’의 정체는 바로 ‘공감’의 능력을 가진 자이다. ‘경이’는 “간절히 원하”면 타자와 내가 “닮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며,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그리고 그 고통을 또 다른 타자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능력이다. 레비나스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신체적 존재가 타자와의 관계에 들어서는 과정을 ‘존재론적 모험’이라고 규정할 때 이러한 ‘공감’의 능력은 ‘나’의 말이 ‘그/그들’의 세계로 모험을 감행하는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원더보이는 공감의 가능성이 극한으로 확장할 때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경이’는 생득적(生得的)인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과 그 생각을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147)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다른 우주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이라고 할 때 “타인의 생각을 이해한”다는 것은 새로운 우주의 질서, 그 ‘비의(秘意)’를 ‘이해’하는 순간이다. ‘공감’의 무한 확장을 위해 소설은 ‘무공 아저씨’와 ‘희선 누나’를 등장시킨다.

“오 년 동안 단학을 수련한 끝에” “우주의 비밀을 깨닫게” 된 ‘무공 아저씨’는 ‘우주의 비밀’을 묻는 ‘나’에게 “산은 더욱 산이 되어야만 하고 물은 더욱 물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우주의 비밀”이라고 말한다. 흡사 선문답 같은 이러한 답변은 다음의 진술에 의해 또 다시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데 그것은 1980년대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국가’에 대한 ‘우주적’ 비판이다.

마찬가지로 대통령은 더욱 대통령이 되고 법관은 더욱 법관이 되어야만 하는 거야. 대통령이 사기꾼이 되고 법관이 권력의 시녀가 되면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 이 나라는 잘못된 거야!(148)

‘살인마’를 살인마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진실의 말이 육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시대, ‘살인마’가 대통령이 되고 ‘권력의 시녀’가 ‘법관’이 되는 ‘위장의 정치학’이 군림하던 시대가 바로 80년대였다. ‘나’의 디에게시스가 아닌 오직 ‘자백의 디에게시스’만이 존재하던 시대.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무공 아저씨’의 입을 빌려 말하는 ‘우주의 비밀’이란 ‘순리’가 파괴된 우주에 대한 고백인 동시에 ‘순리’의 우주적 복원을 꿈꾸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순리’의 복원이 ‘너머’의 우주적 질서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새로운 우주가 등장한다는 것은 날마다 창조되는 것이며 날마다 종말을 맞는 것이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시작이었고 또 새로운 끝”인 삶.(151) 들뢰즈의 어법으로 이야기하자면 우주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무한 반복인 것이다. 그래서 ‘나’가 꿈에서 “우주와 내가 숨을 두고 서로 실랑이를 벌이”며 “숨쉬는 법을 새로 배”우는 일은 “숨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우주와 나의 한판” “무승부”의 세계인 것이다.(149)

이렇게 ‘경이’의 능력을 수련하게 된 ‘나’는 “누군가에게 집중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느리게 숨을 쉬고, 더 많은 감각으로 이 세상을 받아들이면 그만큼 더 천천히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른다.(152) “나의 시간과 다른 사람의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흐른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주의 시간이 단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인 동시에 새로운 우주의 질서가 뉴턴의 물리학의 세계로 틈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뉴턴과 양자역학의 불가능한 공존의 가능성)

우주의 비의(秘意)란 그런 것이다. 서로 다른 질서의 공존을 인지하고 이해하는 것. 무존재/존재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새로운 존재의 출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 하나의 세계가 또 다른 세계가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만남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가능성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 그 무한 반복과 무한 출현의 비밀을 기꺼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받아들이고 바라보되 휩쓸리지 않고 매몰되지 않는 것. “매일매일이 새로운 시작이고 또 새로운 끝”이라는 것. 이러한 우주의 비의(秘意)는 슬픔이 위로가 되는 역설을 만들어낸다.

강토 형이 내 손을 잡았다. 넌 나하고 있으면 돼. 강토 형이 말했다. 나는 맞잡은 두 손을 바라봤다. 그 손으로 온기가 전해졌다. 그리고 나의 슬픔이 전해졌다. 강토 형이 더욱 힘을 줬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토 형의 슬픔이 내게 전해졌다. 강토 형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며, 지금 그에게 없는 것은 무엇인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두 개의 슬픔이 합쳐졌으니, 고통받아야 마땅했지만 그 순간 나는 위로받았다.(159)

타자의 아픔과 ‘공감’할 때 ‘나’는 위안을 받는다. ‘공감’은 자아를 치유한다. ‘공감’의 ‘경이’는 ‘나’와 ‘그/그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현재’와 ‘미래’의 경계마저 허물어뜨린다. 이러한 경계 지우기는 ‘나’가 “두 겹의 눈”을 갖게 되는 것으로 형상화된다. “두 겹의 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통과 분노와 축복과 경이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현재의 젊은 눈동자”인 동시에 “멀찌감치 물러나 관망하는 미래의 늙은 눈동자”(159)이다. ‘나’가 “두 겹의 눈”을 갖게 되는 순간 ‘현재’와 ‘미래’는 하나의 무대에 동시 출현한다. 이는 ‘나’의 디에게시스와 ‘그/그들’의 미메시스가 하나의 연극 무대에 동시에 상연되는 연극의 시간이며, 부지(不知)의 1인칭과 전지(全知)의 3인칭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는 ‘응시’의 시점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것은 바로 ‘공감’의 ‘경이’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공감’은 어떠한 불가능도 가능의 무대 앞에 세우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불가능의 역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원더보이가 말하는 ‘경이’의 세계이다.

“사람들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란 결국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그들을 사랑하는 일”인 것이다. 이처럼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우주의 비의(秘意)란 결국 하나의 세계와 또 다른 세계를 넘나드는 일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며 N개의 우주가 만들어내는 무한의 ‘행(行) 걸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이리라.

인생이란 한강과 같은 것이라고. 해가 지는 쪽을 향해 그 너른 강물이 흘러가듯이, 인생 역시 언젠가는 반짝이는 빛들의 물결로 접어든다. 거기에 이르러 우리는 우리가 아는 세계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 사이의 경계선을 넘으리라. 그 경계선 너머의 일들에 대해서 말하면 사람들은 그게 눈을 뜨고 꿈 속의 일, 그러니까 백일몽에 불과하다고 말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내가 본 그 수많은 눈송이들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인간은 누구나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고, 결국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그 빛들을 경험한다는 사실을.(199)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우리는 우주의 비의(秘意)를 경험한다. 그것은 지(知)의 세계와 무지(無知)의 세계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또한 ‘공감’은 또 다른 국가를 상상할 수 있는 원천으로 작용한다. 1980년대가 ‘나’의 디에게시스 조차 용납하지 않았던 시대였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것은 80년대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월경(越境)의 시작이다.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해서는 경외하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또 다른 국가, 또 다른 우주를 꿈꾸는 출발선에 우리를 서게 한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 자체가 탄압의 대상이고 이적행위니까요. 그러니 고통받는 사람들은 더욱 고독해질 수밖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국가는 왜 자기 안에 고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면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이적행위자로 몰 이유가 없지 않아요? 우리에게는 이런 국가 말고 다른 국가를 선택할 권리가 없는 건가요? 만약 그런 권리가 우리에게 없다면, 무자비한 국가 폭력에 겁을 먹고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건 타인의 고통을 공포보다 더 강하게 느끼게 만드는 일이에요.(190~191)

‘공감은’ 또 다른 국가를 선택할 수 없는 것인가라고 묻는 구체적 물음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이제 선택의 자리가 문제인 것이다.

 

4. 기억의 창조-‘경이’로 향하는 길

원더보이의 전반부가 ‘공감’의 ‘경이’가 만드는 불가능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 뒤는 기억의 복원 혹은 창조를 시도하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은 개인을 동일한 자장 안에 포획하려는 권력의 전체성을 돌파하는 방법으로 채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타자를 동일한 전체로 환원하고 과거를 동일한 기억으로 수렴하는 권력을 돌파하기 위해 기억은 새롭게 재편되어야 하며 때로는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중반부에 가서 작가는 화자를 달리하여 남장을 하게 된 강토/희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잠시 소설의 서사를 따라가 보자. 1974년의 서울, 권력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이 사형을 당하자 감옥 안에서 그들과 만났던 젊은 시인은 그가 들었던 말을 완전히 외울 때가지 되뇐다. 숱한 반복 속에서 기억된, 죽은 자들의 말들을 시인은 어렵게 구한 종이에 적는다. 진실을 전하려는 자와 진실을 부정하는 권력의 대결은 결국 기록이 압수되면서 권력의 승리로 끝이 나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후 사흘에 걸쳐 젊은 시인의 기록이 신문에 발표되고 만다. 감찰에 나선 정보부는 내무부에서 파견된 이사관을 조사하지만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한다. 하지만 신문에 발표된 시인의 글에 오식이 발생한 이유를 궁금해 하던 정보부는 이사관의 집을 압수수색한다. 그 과정에서 2층 딸의 방에서 오식된 글자에 빨간색 사인펜으로 동그라미가 그려진 신문기사를 발견하게 된다. 동그라미를 연결하자 그것은 기억의 천재 이수형의 이름이 된다. 이사관은 자신의 사무실을 찾은 이수형에게 시인의 글을 보여준 것이다. 이수형은 그것을 통째로 외웠고, 자신의 기억력을 희선에게 과시하기 위해 몇 개의 글자를 바꾼 것이다. 이로써 이수형이 정교하게 기억했던 기억이 수형과 수형의 부친, 희선을 파멸로 내몬다.

기억 속 저장공간 중에서 가장 정교했던 것은 ‘1974년 기억의 서울’이었어. 그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종로 5가까지의 거리를 통째로 머릿속에 넣은 거야. 그건 일 년에 걸쳐서 아주 공들여서 만든 가상의 거리였어.(76)

일 년에 걸쳐 만들어낸 기억의 거리에는 “반체제 세력에게 고급정보를 제공하는 정부 내 관리들의 명단과 그들이 유출한 정보들, 수배자들의 뒤를 봐주고 있던 종교인들과 자금을 대주던 기업가들에 대한 정보”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질서를 위협하는 모든 정보들이 담겨 있었다. 수형은 “취조실에서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그것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 때문에 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한 달만에 풀려난” “그를 기다린 것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끔찍한 비극 앞에 이수형이 선택한 것은 자신의 기억을 부수는 일이었다. 수형의 기억 속에서 폐허가 되어버린 1974년. 수형은 1974년 이후로는 자신조차도 기억하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하지만 1980년 봄. 수형과 희선이 다시 만난다. “정보부에 끌려가기 전에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그가 잊지 않으려고 애쓴 유일한 사람” 희선은 그에게 “다시 기억의 서울을,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운 1980년 기억의 서울”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희선은 “기억한다는 것, 그 자체를 두려워했”던 수형을 설득하고 그들은 다시 주말마다 광화문 네거리에 서서 1980년 기억의 서울을 새롭게 만들기 시작한다.(280~281)

하지만 이들의 시도는 1980년 여름, 그 날의 일 때문에 중단되고 만다. “光州 일원 데모 事態”라는 여덟 글자가 신문 1면에 실린 그날. “우리가 믿고 소망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얼마나 연약”하고 “곧 사라지게 돼 있”는지 “언제나 무너지고 무서지고 잊힐 뿐”이라는 좌절만이 부패한 안개처럼 가득하던 그 해. 수형은 1980년 기억의 서울 대신 1980년 기억의 광주를 유인물로 뿌리고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생을 마친다.

다소 장황하게 이야기를 진행했지만 수형과 희선이 1980년의 서울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기억을 복원하는 행위가 아니다. 과거의 반복이나 복기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1980년의 서울을 창조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말하는 것인 동시에 기억을 동일하게 편성하려는 권력의 자장을 뒤흔드는 것이다. 또한 개인이 단단한 세계의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선택’의 주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나’가 꿈 속에서 엄마와 만나는 장면은 바로 이러한 선택이 ‘경이’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전제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렇게 두 팔을 펼쳐봐. 네 몸은 종이처럼 가벼워질 거야. 눈을 감고 너를 끌어올리는 거대한 힘을 느껴 보거라. 우리 머리 위 몇 만 미터에서 부는 우주의 바람을 상상해. 그 바람을 타고 거대한 봉우리를 넘어간다고 생각하는 거야. 모든 건 너의 선택이라는 걸 잊지 말아라. 원하는 쪽으로 부는 바람을 잡아타면 되는 거야. 절대로 네 혼자 힘으로 저 봉우리를 넘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 혼자서는 어디도 갈 수 없다는 걸 기억해. 너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람이란다. 너는 어떤 바람을 잡아탈 것인지 선택할 수 있을 뿐이야. 불타는 저 도시는 우리의 기억이 머무는 곳. 그리고 이쪽은 우리가 평생 오를 봉우리. 끝내 한 번은 넘어야만 하는 검은 봉우리란다.(300~301)

“우리의 기억이 머무는” 우주, 그리고 “우리가 평생 한 번은 넘어야만 하는 검은 봉우리”를 상상하고 그 둘 사이를 자유롭게 떠다니는 것. 세상의 우주와 우주의 세상의 행간에서 자유로운 비행을 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비행의 순간 타인과 함께 하는 것. 자유로운 비상과 공감의 가능성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원더보이가 보여주는 ‘놀라운 세계’인 것이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원더보이는 우리가 던질 수도 있었던 또 다른 화살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다. 우리는 소설에서 타자의 슬픔에 ‘공감’하는 화살의 궤적과 마주한다. 화살은 ‘경이’의 과녁을 정조준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 하나를 던져볼 수 있다. 그것은 왜 하필 ‘경이’인가라는 물음이다. 이것은 왜 ‘공감’은 ‘경이’의 영역에서 작동하는가라는 문장으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상은 환상으로서만 존재한다. 이 동어반복의 문장 앞에 ‘왜’라는 질문은 용납되지 않는다. 환상이 질문을 받아들이는 순간, 환상은 그 스스로 현실 세계에서의 작동 불가능을 고백하는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공감’을 이야기하기 위해 환상의 세계로 월경해버린 것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공감’이 환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환상이 아니고서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환상을 소환할 때 자칫 그 환상이 또 하나의 닫힌 세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닫힌 세계, 불가능의 세계를 반복하는 것이다. 문학의 무기가 사실과 환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서로 교차하는 열린 공간이어야만 한다. 원더보이가 내세우는 월경의 알리바이가 ‘경이’가 아니고서는 공감할 수 없는, 공감이 ‘경이’가 되어버린 시대, 혹은 ‘경이’로서라도 ‘공감’하고자 하는 당대의 한계와 욕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당대의 질료에서 환상의 과녁을 향해 날리는 화살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음의 물음에 답해야 한다. 우리가 던질 수 있는 화살은 과연 남아있는가. 우리는 어떤 화살을 던져야 하는가.<끝>

 

 

심사평

소설 읽기의 수완과 발군의 순발력

 

문학비평의 언어는 작품의 질서를 비평의 논리로 재편한다. 비평가는 작품의 질서를 독자들에게 되풀이하여 보여주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언어로 전혀 다른 질서의 독물(讀物)을 창조해낸다. 그리하여 작품의 매혹은 물론이거니와, 그 너머 세계와 작품의 교차와 겹침에서 발생하는 매혹까지를 언어화해낸다. 그런 점에서 좋은 작품이 으레 그렇듯이 좋은 비평도 독자들을 설레게 한다.

김연수 장편소설 『원더 보이』를 분석한 「불가능의 가능성과 공감의 서사―무너져버린 세상에서 때늦은 소설 읽기」(김동현)는 작품을 찾아 읽고 싶게끔 독자들을 도발한다는 점에서 호감이 가는 비평이다. 김연수 소설 제목의 ‘원더(wonder)’를 ‘이상한’이나 ‘낯선’으로 옮기는 대신 ‘경이’로 번역하면서, 그것을 다시 작품 속의 ‘우주의 비의(秘意)’와 결부시키는 김동현 씨의 소설 읽기의 수완은 사뭇 믿음직스럽다. 이 소설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고자 한 것도 이 분이 그동안 많은 소설을 공들여 읽어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원더 보이』의 전반부가 ‘공감’의 ‘경이’가 만드는 불가능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 뒤는 기억의 복원 혹은 창조를 시도하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와 같은 논리는 확실히 자기만의 고집이 있어 보인다. 김동현 씨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기억의 복원 혹은 창조”를 일종의 ‘환상’으로 보고 이 작품에 대한 가치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김동현 씨가 말하는 ‘환상’은 조금 더 엄밀하게 보면, ‘픽션’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정훈’은 ‘강토’에 의해 장차 ‘작가’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이것은 김동현 씨가 “기억의 복원 혹은 창조”라고 부른 것과 관련하여 전혀 의미 없는 설정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작품에 대한 김동현 씨의 최종평가는 조금 수정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심사위원들은 김동현 씨의 비평이 한 편의 작품에 갇혀 있어서 다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그에게는 작품을 적확하게 읽어내고 그것을 재빨리 자기 논리로 조직하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 우리는 그의 미덕에 더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그의 꼼꼼한 독서가 작품과 작품, 작가와 작가의 관계망으로 더 촘촘해져야 하리라는 당부의 말씀도 덧붙여 놓고 싶은데, 이와 같은 우려는 아마 기우였음이 조만간 드러나리라 믿는다. 또 하나의 ‘원더 보이’의 출현에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2016년 여름/심사위원: 김동윤(문학평론가․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장이지(시인․본지 편집위원)

 

 

소감

 

시작이라기 하기에도 시작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늙은 것도 늙지 아니한 것도 아닌, 젊음은 진작에 바닷가 한 구석에 처박아 놓은 지 오래인 데, 그렇다고 청춘의 심장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도 아닌, 참으로 애매한, 그야말로 애매한 날에, 한 여름 에어컨도 고장 나고, 예의라곤 전혀 없는 버스 기사가 모는, 만원 버스를 타고 와서, 언제 빨았는지도 모를 속옷 같은 땀내에 환장했던 몸에 벼락같은 찬물을 끼얹는 느낌으로, 그야말로 느닷없이, 덜컥, 수상 소감을 쓰고 있다.

내가 쓰는 글들이 누군가의 '밥'이 될 수 있을까. 한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을 때 습관처럼 내뱉던 말은 '먹고 싶다'였다. 말은 밥을 대신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먹고 싶다'고 말은 내 마음의 허기에 스스로 던지는 야광찌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쓰는 글들이 누군가의 '밥'은 되지 못하더라도 밤바다 한가운데 던져진 야광찌 정도라도 되면 좋겠다. 깊은 바다에서 가늘게 흔들리는 어신을 놓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부족한 글에 채찍질 하는 심정으로 심사를 했을 심사위원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린다. 읽고 쓰고, 다시 읽고 쓰는, 밭을 가는 소의 심정으로 고마움을 대신하고자 한다.

 

 

약력

제주 출신. 제주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신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에서 공부했다. 국민대학교에서 로컬리티의 발견과 내부식민지로서의 '제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제주, 우리 안의 식민지가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공간인식의 로컬리티와 서사적 재현양상-화산도와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중심으로」와 「‘표준어/국가’의 강요와 지역(어)의 비타협성-제주 4·3문학에 나타난 ‘언어/국가’문제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을 근거지로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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