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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한(시/2016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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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한/시
달의 여정
엷은 어둠이
달빛에 희석되어
화학반응을 하고 있다
은빛의 십자가는
바다로 내려앉는 녹슨 달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차의 핸들을 잡고
라디오를 틀어본다
그녀가 좋아했던 달이
몰락하고 있다고 전한다
물수리 한 마리가
다리 위로 포물선을 그린다
달빛을 먹은 숭어 한 마리가
숨통을 버리고 하늘로 올라간다
곤줄박이
은빛의 머리와 검은 눈
죽은 감나무 가지 위에서 기다린다
갈증
황사가 불어오는 날
물안경과 마스크를 쓰고
쿠부치 사막으로 몸을 실었다
사막의 바람은
모래 틈에서 숨을 고르며
물 없는 황하계곡을 만든다
북쪽 밤하늘 은하수에는
잊고 지냈던 몽고반점이 반짝거린다
울타리로 사막의 침입자 막으며
모래 속에 버드나무를 심고
물 머금은 검은 흙으로 덮었다
낡은 가죽 신발 신은 아이가
두 손을 높이 흔든다
초롱초롱한 눈망울 속에
오아시스를 보았다
사막을 맛보고 돌아온 뒤로
물을 먹어도 먹어도
갈증은 풀리지 않는다
지난밤 쿠부치에 나타난
눈망울은 신기루인가
옻나무
뒤뜰에 새가 앉았다
검은 열매를 따 먹고 있다
얼굴은 하얗고
목선은 검어서 어두운데
누굴까
알고 앉았는지
모르고 따 먹는지
뱃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바람 부는 봄날
새싹을 훔쳐먹고
달빛과 입맞춤하였는데
온몸에서 붉은 잎들이 솟아 올라
나는 지금도 노을이다
내일은 어떤 색으로
나의 가지에 앉을까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스탕달의 혼은
거짓 사랑을 고백한다
카메라
박제된 시간을 사냥하러 떠난다
얼음을 자르듯 시간을 잘라서 냉동시켜 자루에 넣는다
겨울잠을 잘 때는 머리맡에서 추억을 꺼내어
얼은 달빛의 맛을 보면서 순수 애인을 찾았다
간식이 많은지 자루는 먼지로 바래지고
먼지 위에 모래가 쌓이면 낙타가 태어난다
낙타는 사냥총을 메고
모래가 많은 아파트를 장화 신고 걸으면서
채취한 하얀 모래를 무지개로 염색을 할 거야
칼라로 박제된 모래도 먼지가 쌓일 것이다
눈빛은 크롭인지 틈이 비좁다
셔터로 필름에 어둠을 지워보지만 세상 헛도는 소리만 들리고
칼라로 진화하며 뇌가 커지고 있다
집이 부족하여 매일 구토를 하면서
아픈 노동을 삭제하고 있다
내일 새벽 태양을 잡으러 잠들고 있는 그물을 깨운다
푼크툼
헤비메탈이 출렁이는 겨울 바닷가에서
보드카 한 잔 한 잔이 머릿속 음계에 치매를 그린다
최상의 오르가슴을 만났는데 절벽이 다가오고
청춘이라고 웃지만 가발 속 새치는 백야 속에 산다
잘 찍었다고 생각되는 사진은 아무 말이 없고
실수로 찍힌 사진은 작품성이 높다고 댓글이 달린다
밥 먹자고 문자를 보냈는데 하루살이는 은수저만 탐색하고
좋은 글을 낚아보려고 나가보지만 배부른 복어만 올라온다
가죽 장갑을 끼고 낫으로 아카시아 나무를 베었는데
갈색의 가시는 손바닥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다
* 푼크툼(punctum) :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
타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진 속에서 자신의 심장에
화살처럼 꽂히는 어떠한 점.
심사평
시작은 시작(詩作)의 방향을 지시하는 보이지 않는 키
-윤은한의 시적 태도의 미덕
요즘 세상은 쉽게 ‘상식’을 조롱한다. ‘천 리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면, 위트가 되지 못하는 댓글 중에 금수저, 은수저 운운하며 구백 구십 리쯤 헬기로 날아가서 나머지 십리만 걷는 세태를 신랄하게 비난할 것이다. 결과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사회 분위기 탓도 있겠지만, 시작(始作)의 중요성, 즉 동기(動機)와 자세(姿勢)를 가르치지 않는 제도 교육의 문제가 가장 크다.
윤은한의 경우, 이번에 투고된 십 여 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의 시작(詩作)이 가장 충실한 기본기에서 출발할 것이란 믿음을 갖게 한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내면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밖으로 끌어내느냐,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재현하느냐, 언어적 존재의 숙명성을 탐구하느냐 하는 것은 결국 시가 작품으로 외재화 되었을 때 사용하는 수법의 문제일 뿐, 시(poetry)를 형성하는 표현 이전의 단계를 모두 드러내지는 못 한다.
일반적으로 시의 힘은 ‘관찰 →통찰 →직관 →상상력’이라는 단계를 무한 반복하면서 키워진다. 윤은한은 이 순환 과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은빛 십자가는/바다로 내려앉는 녹슨 달을/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달의 여정」)는 부분은 밤바다의 달빛에 취한 몰입 상태보다는 ‘물수리/송어’의 생사교환이 일어나는 현실에 대한 차가운 관찰의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높이 사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시단의 데뷔 연령이 높을수록 앞에 언급한 단계적 순환 과정을 삭제한 채, 어떤 결론(도그마)을 제시도 아닌, 과시하려는 듯한 섣부른 포즈가 심심찮게 눈에 띄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윤은한은 “잘 찍었다고 생각되는 사진은 아무 말이 없고/실수로 찍힌 사진은 작품성이 높다고 댓글이 달린다”(「푼크툼」)는 사실을 고백할 용기를 지녔다. 출발로서는 좋은 징후(徵候)라 해야 할 것이다.
어설프게 그의 시적 지향을 예상해 보면, “낡은 가죽 신발 신은 아이가/두 손을 높이 흔든다/초롱초롱한 눈망울 속에/오아시스를 보았다”(「갈증」)는 ‘쿠부치 사막’에서의 체험적 발견과 “사막을 맛보고 돌아온 뒤로/물을 먹어도 먹어도/갈증은 풀리지 않는다”는 자기 인식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시대정신의 큰 맥에 가 닿게 되리라 기대한다.
소감
돌과 흙이 공존하는 척박한 땅에 토종의 씨앗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어린 나무로 크면서 눈물은 땅속에 뿌리고 원망은 달빛에게 쏘았습니다. 숲으로 성장한 나무는 세상을 바라보며 침묵으로 지내다가 입술이 마르기 시작한 어느 해 가을이 되어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늘이 시의 씨앗을 채취하여 키울 수 있는 행복을 선물하였습니다.
시는 혼자 쓰는 것이라고 하지만 외롭지 않았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시는 저의 눈물을 받아주었고, 생활에 위로와 활력을 주면서 매력에 빠졌습니다.
시의 첫발을 내딛게 해주신 순창 이용옥 선생님, 글을 쓰는데 묵묵히 지켜봐 준 아내와 아이들, 산을 가꾸고 사랑하는 동료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나무를 키우듯 부단히 노력하고 심혈을 기울이며 진실되게 시를 쓰고 시를 낭송하려고 합니다.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울창한 장복산 아래 경남문학관에서 같이 공부하던 문예대학 문우님들, 가르침을 주신 김미윤 관장님과 김륭 시인, 김혜연 시인, 그리고 글이 멈출 때마다 시의 세포를 살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박서영 선생님 고맙습니다.
초보 농사꾼처럼 많이 부족한 저의 글을 격려하여 주시고 쓸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주신 리토피아 장종권 주간님등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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