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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령(시/2016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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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령/시
잊혀 질 모든 짐승
모든 불이 다 꺼진 집에서 푸른 색 수조만이 나를 반긴다.
수조 속에 있던 물고기들은 모두 잊혀진 짐승이 되어 먼 길을 떠났다.
내가 그 수조를 깨버린 것은 실수였다.
동생과 나는 주사위를 던지며 놀았는데 던진 주사위가 수조에 맞았을 때
나는 두 손은 맞잡고 울었는데, 두 손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왔는데,
어머니는 그 슬픈 짐승을 변기통에 버렸는데 나는 악다구니를 썼고 수조에선 물이 새어나와 바닥을 적셨다.
목욕을 할 때면 욕조에 수조 물을 떠다 놓는다.
잊혀질 짐승을 위해 이 글을 쓴다.
장마
지금 음악이 되어 낙하하는 그들은 먼 이국에서 왔다. 낙하하기 위해 그들은 태어났다. 그리고 결국 음악으로 끝날 생이었다. 자신이 왜 낙하하고 있는지, 언제부터 낙하했는지,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들은 그저 낙하하는 데만 집중한다.
그들이 낯선 땅으로 들어서자 땅은 그들을 반기지 않았다. 땅은 그들에게 생을 요구했고 그들은 온전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몰락이 그들에게 왔을 때, 그들은 몰락하지 않았고 동시에 몰락했다. 결국 음악으로 끝날 생이었다.
그들에게 몰락은 중요치 않았다
컷팅
바람에 나뭇잎들이 살짝 흔들렸다.
주위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바쁜 버스들, 자동차들이 달리고
불쑥불쑥 솟은 빌딩들은 무심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죽은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다.
친구들끼리의 비밀을 훔쳐보는 느낌은 아니었다.
편지라기보다는 자신의 독백을 써 놓은 듯, 한 느낌이었다.
외로운 자의 독백. 자신의 신전이 사막화 되어가는 것을 보는 자의 독백.
여전히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에 나뭇잎 하나 잘릴 때 쯤,
떨어진 것은 나의 눈물이었다.
파란 거리
늦은 새벽, 카페에서 잠들어 있는 커플을 본다.
곧 한 명이 일어나서 잠들어있는 사람에게 키스를 하고,
그 둘은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그 둘에게 키스는 한낮의 키스.
거리는 어둡고 밤은 길고 그대와 나는 하나의 신화를 쓸 수 있었다.
마음이 이렇게 파란 날엔 거리를 끊임없이 걸어야 한다.
싯다르타는 야쇼다라 공주를 버렸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것은 창백한 말과 긴 밤.
지금도 비오는 골목 가로등 앞에선
붓다의 창백한 손톱을 보는 사람이 있다.
나도 봤다고 착각한 날이 있지만,
내가 본 것은 야쇼다라 공주의 눈물자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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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공감의 이면(裏面), ‘말하지 않을 비밀(秘密)’을 탐색하는 어려움
-정호령의 방법적 모색에 대하여
프랑스의 상징주의 효시(嚆矢) S. 보들레르는 ‘언어는 신의 은총, 인간의 저주’라는 말을 남겼다. 언어의 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표명이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우리의 야만적인 언어 사용에 대한 날선 비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언어의 쓰임’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시’다. 구체적으로 ‘시쓰기’다. 시어의 경제성도 포기할 수 없고, 유려한 리듬에의 이끌림도 포기할 수 없고, 경이로운 시적 발견도 추구해야 하고, 나아가 카타르시스를 초극(超克)하는 공감의 지대를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시쓰기가 어렵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 한다.
정호령은 ‘자연/문명(인간)’이라는 낡은 이분법을 완벽하게 배경으로 침전시킨 가운데, 어떤 ‘순간’을 포착하려는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준다. 이는 우선 ‘장마’의 굵은 빗줄기로 표현되는데, “자신이 왜 낙하하고 있는지, 언제부터 낙하했는지,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들은 그저 낙하하는 데만 집중한다.”(「장마」) 이유와 지속기간이 아니라 행위에만 집중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유아기 때 놀이를 통해 세계를 학습하는 것과 유사한 일면을 지닌다. 또한 이 학습이 결국은 언어로 사고화 되고 살아가는 내내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시작에서 ‘방법’을 지나치게 좁은 의미, 즉 기교와 어휘 수준에 한정하려는 태도는 우리 시단에서는 매우 강력한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시적 현실을 구조화하고 나아가 시 세계를 건설하려는 시인에게 있어 ‘방법’은 우선적으로 자기 체험을 조직하는(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재영토화’하는) 어려운 작업이라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정호령은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이를 암시하고 있는데, 그 전에 “어머니는 그 슬픈 짐승을 변기통에 버렸는데 나는 악다구니를 썼고 수조에선 물이 새어나와 바닥을 적셨다.”(「잊혀 질 모든 짐승」)는 유년의 트라우마를 밝힌다. 변기 구멍에서 하수구를 따라 바다로 돌아갔다고 상상한다면 행복할 순 있겠지만, 대체로 자기기만에 만족하는 수준에서 시는 그 발전을 멈춰버릴 것이다.
시의 비극은 어쩌면, 쓰인 대로 읽히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써야 한다는 데서 비롯하는 지도 모른다. 정호령은 이를 「컷팅」, 「화형」과 같은 날카로운 표제의 작품으로 보여주는데, “불에 타서 죽은 친구가 있다./다들 울었는데/친구들, 친척들, 개구리, 귀뚜라미까지 울었는데/여긴 유리세계./시퍼런 유리창에 입김을 불면/내가 글자를 쓰고,/네가 소리 내어 읽었지./나의 비밀은 유일해야만 했다.”고 주장한다. 문자 그대로 친구가 아닌 모든 ‘잊혀 질 짐승’에게서 이러한 관계의 비밀을 읽어내기 시작할 때, 정호령의 시 세계는 자연스럽게 확장할 것이다.
당선 소감
머릿속에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고 뒤엉켜 있을 때, 나는 오늘 시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 글을 쓴다. 지금 나는 어느 지점에 있는가.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고, 당신은 누구인가. 왜 나는 이것을 묻는가. 누군가와 이별한 날, 나는 시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지금 나는 이 글을 쓴다. 축하한다는 말이 축하한다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 기뻐야 하는 건가.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들이 뒤엉켜 있다. 감사하다. 물론 감사하다. 몇 년 동안 염원하던 꿈이 이뤄졌고 이제 새로운 길이 열릴 테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테니. 나는 그 곳에서 나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이 기분은 주신 분들께는 죄송하다. 상상은 현실보다 강하다. 죄송하고 감사하다. 지금 이런 기분으로 상을 받아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시님에겐 죄송하지만 이런 기분을 시적인 기분이라고 해도 괜찮을 런지. 시를 모르는 내가 이런 큰 상을 받아도 괜찮을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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