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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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제7호 신인상(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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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제7호 신인상(수필)
1962년 부산 출생
2002년 리토피아 신인상
중앙대 일문학과 졸업
지원상사 대표
'일본문학취미' 싸이트 운영자
(http://hobbian.netian.com)
<당선작품>
노래하는 사람 외 1편
'미술관 옆 동물원(Museum by The Zoo)'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비교적 짜임새 있고, 내용 있는 시나리오로 시간이 아깝지 않은 작품이었다. 이 영화의 이미지는 나의 머리 한편에 자리잡고 새로운 시각으로 과천 서울대공원의 미술관과 동물원을 보게 만든다. 우리들의 휴식처, 우리들의 공원, 바쁜 일상을 떠나온 우리에게 생명의 공기를 숨쉬게 해 주는 곳. 영화의 배경이 되듯, 우리의 여유로운 삶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미술관과 동물원, 정과 동, 침묵과 소리, 여자와 남자…….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술관과 동물원을 이웃으로 몸을 맞대게 배치한 발상이 새삼 멋지게 느껴진다.
그 미술관의 앞뜰에 세워진 조각품들 중에 가장 눈과 귀에 띄는 것은 '노래하는 사람'(A Singing Man)이다. 은빛 몸으로 잔디 위에 우뚝 서서 저 쪽의 동물원을 바라보며, 쉼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뚜렷한 가사가 아닌, 웅~웅거리는 듯한, 어떤 주문과도 같은 노래가 아래턱의 움직임과 함께 흘러나온다. 나도 動物이니, ― 즉, 움직이는 物이니 ― 나를 저기로 데려다 주라는 소리인지, 저 동물원에 있는 친구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인지, 어느 나라 말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건 지금과 같은 말이 생기기 이전의 원시시대의 음성과도 같은 것, 즉 원천적인 노래, 노래의 원천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노래는 아마 가사가 붙고 나서 노래라고 하지 않는가 ? 그러나 가사는 역시 하나의 메시지. 이 소리가 뚜렷한 단어나 문법적 조합을 결여하고 있지만, 분명 그 소리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감정의 표현인 것이다.
평면적인 그림이 많이 걸린 옥내 전시관을 벗어난 뜰에는 입체적인 조각이 자리잡고, 더 나아가 뜰의 끝 무렵에는 움직이는 조각인 '노래하는 사람'이 서 있다. 그 앞은 바로 확실히 움직이는 동물들의 세계이다. 그래서 '노래하는 사람'은 정(靜)과 동(動)을 이어주는 하나의 연결고리이며 경계이기도 하다.
미술관은 '노래하는 사람'의 입을 통하여 동물원에게 말을 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구애를 한다. 사람이 만든 예술은, 사람의 원초적 모습, 본질을 향하여 손짓을 한다. 사람이 예술을 하는 것은 사람이 현실사회에서 잃어버린 순수, 본질의 모습을 되찾기 위함이다. 동물들은 작으나마 울타리처진 뜰에서, 연못에서 먹고, 교미하고, 오수를 즐긴다. 자연에 맡겨진 몸이다. 그래서 미술관과 동물원은 같은 색깔을 가진, 마음이 통하는 사이이다. '노래하는 사람'의 소리에 동물원의 사자와 코끼리, 새들이 그들의 목소리로 화답하고 있다.
동물원의 동물들과도 같이 '노래하는 사람'도 하루 종일 노래하지는 않는다. 근무시간에만 노래를 한다. 녹음기와 구동기구의 작동이 미술관 근무시간에 맞추어져 있는 듯하다. 그렇다. 고귀한 고려청자는 사람들이 하루종일 많이 쳐다보면 색이 닳아 피로해진 느낌을 준다고 한다. 그림들도 보여지는 것에 피로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보는 사람들이 무심코 쳐다봐도 보여지는 것들은 잔뜩 긴장된 자세로 포즈를 취하는 것이다. 더구나 움직임과 소리를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보여지고 있는 '노래하는 사람'은 가장 피곤한 전시물, 피사체(被寫體), 피시물(被視物)이다. 그러나 그 만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없다. 그는 미술관과 동물원 사이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 있다.
일견 그에게는 동물이 갖는 생명의 유한성을 갖고 있다. 녹음된 음성이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질을 유지할 수가 없다. 턱의 구동기구도 고장도 날 것이다. 조각된 몸은 어느 때 파괴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옥내의 벽에 조용히 걸린 그림보다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보다 동물에 가까운 존재가 갖는 슬픔이다.
그러나, 동물이 자식을 통하여 자신의 유전자를 내려보내, 유전자로서는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면, 그런 면에서는 그림보다 생명이 더 영원할 수도 있으리라. 자식이 없다면 생명이 끝이고, 그림도 파괴되면 그 것으로 끝이 나니, 그 둘은 엇비슷한 유한성과 무한성을 동시에 갖는다. 그래서 '노래하는 사람'도 시간이 지나 녹이 슨 소리와 구동기구를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 질 터인데, 그렇다면 그는 이미 태어난 모습의 그가 아니라, 새로운 제 2세의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생명이 이어지는 것이리라. '노래하는 사람'의 존재의 의미, 목적, 본질을 그대로 유전자와도 같이 이어 간다면 말이다.
우리는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나와 노래하는 사람의 노래를 들으며 동물원으로 걸음을 옮긴다.
'잘 가세요. 또 오세요. 고독한 예술의 세계를 벗어나 동물원에 가서 힘찬 생명을 느껴 보세요. 그들도 우리의 친구랍니다…….'
혹은 시끌벅적한 동물원을 나와 조용한 미술관으로 올라가면서 그의 노래를 듣는다.
'어서 오세요. 동물원 친구들은 잘 있나요? 생명의 활기가 때로 번잡함으로 느껴지면 이렇게 미술관으로 찾아오세요. 우리의 정적인 생명도 많은 말을 해 주지요…….'
그리고 뜰의 의자에 앉아 '노래하는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노래하리라.
'행복하세요? 언제나 노래하세요. 사랑을, 우정을, 아름다운 인생을. 나는 영원히 노래합니다. 노래를 잊지 말고 살아가세요. 노래를 잊으시면 다시 나를 찾아오세요. 당신이 잃어버린 노래를 들려 드리지요…….'
'노래하는 사람'은 그렇게 지금도 노래하고 있다.
흰쥐의 기억
―사육의 경험. 엽기(獵奇) ―
라테(ratte) :
축양종(畜養種)으로 흰쥐라고도 한다. 의학 ·생물학 ·심리학 실험동물로 널리 쓰이고 있는데, 식품첨가물의 독성 시험, 아황산가스 ·매연과 같은 공해의 조사연구에도 이용되고 있다. 크기나 형태는 집쥐와 흡사하다. 대개는 온몸이 백색이며 눈은 진홍색이다. 번식 습성은 집쥐와 같으며, 사육할 때에는 시판하고 있는 고형사료·채소·당근 등의 먹이와 물을 충분히 주고 사육상자는 항상 깨끗이 청소하여야 한다. 생후 약 80일이면 번식이 가능하고 임신기간은 21~23일이며, 한배에 6~14마리를 낳는다.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이 이야기는 비교적으로 야만적(?)이고, 자연적 환경 속에 자라난 우리 세대에게는 있을 법한 이야기나, 요즘의 아이들에게는 소위 '엽기'나 '괴기로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다. 아마 요즘 아이들은 생활환경에서 엽기성의 경험을 하기 힘드니, 여기저기서 엽기가 유행어가 되어버릴 정도로 '엽기'를 갈망하는 것 같다. 우리 세대의 기억에 '엽기'라는 단어가 생소한 것은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엽기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도 정상적이고, 평온한 환경, 그리고 자연성과 유리된 아파트의 숲 속에서는 자연히 기이함을 찾게[獵奇] 된다.
하루 종일 마우스를 오른손으로 덮어 쥐고 손가락으로 그 놈의 귀를 깔딱거리며 있다 보니, 문득 오늘은 어릴 적에 흰쥐(ratte)를 키우던 기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때 하교시에는 교문 앞에서 양쪽 벽을 따라 장사치들이 늘어서서 이것저것 아이들이 좋아하는 물건을 판다. 따스한 볕이 내리쬐는 봄철에는 병아리와 흰쥐 (우리는 '백쥐'라고 불렀다)를 갖다 놓고 판다. 어느 날 나는 흰 쥐새끼 두 마리를 샀다. 집에 뒹굴고 있는 동그랗고 조그만 어항에 모래를 깔고 돌도 두 개 집어넣어 그럴듯한 집을 마련해 주고 뒤뜰의 창고 안에 놓고 길렀다. 처음에는 먹이도 잘 주고 먹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며 기르는 재미가 있었는데 , 아이는 뭐든지 금세 질려버리기 마련이라 어느덧 노는 데 정신이 팔려 먹이 주는 것도 간간이 잊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어항을 쳐다보니, 한 마리가 없어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한 말 같다. 나무 판자를 뚜껑으로 덮어놓아 도망도 못 가게 하였는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고양이도 키우지 않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쪽 구석에 이상한 물체가 보인다. 바로 그 것은……, 몸통의 밑 부분과 뒷다리만 남은 쥐의 시체였다. 먹이가 오랫동안 제공되지 않자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쥐들 중의 한놈이 동료를 먹어버린 것이다. 죽은 놈은 엉덩이를 붙이고 앞발을 든 상태, 즉 바닥에 앉아 있는 상태로 머리 쪽부터 서서히 먹혀간 것 같다. 위쪽 단면으로 붉은 색의 내장이 보인다. 하얗던 몸은 피로 더럽혀져 있다. 살아있는 놈은 태연히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배가 불룩하게 더 살이 찐 듯하다. 그 놈의 입은 피로 얼룩져 있고, 그 놈의 진홍색 눈은 살인을 막 저지른 자의 눈처럼 유달리 더 벌겋게 보인다.
그 장면을 바라본 나는 할 말을 잊었다. 배가 고프다고 동료를 잡아먹으리라고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살아 있는 쥐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방식으로 죽일 것인가? 친구를 불러 그 장면을 보여주고 상담을 하였다. 그 살인자(정확히는 殺鼠者)를 응징하기 위해 선택된 방법은 독약을 먹이는 것이었다. 꿩 잡을 때 쓰던 독약, '싸이나' 를 먹이에 섞어 넣어주었다. 다음 날 그 쥐의 시체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이후 흰쥐를 기르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쥐를 보기만 해도 그 기억이 떠오른다.
쥐들에게 있어서, 나는 먹이를 주는 ― 상황을 조성하는 ― 神과도 같은 존재였다. 신은 그들을 돌보지 않아, 살생의 죄를 저지르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그 시체를 먹게 만들었으니, 그 죄는 더욱 크다. 쥐들의 신, 나에게 죄가 있다면 인간의 신에게도 죄가 있을 것이다. 생물이 죄를 저지르게 만든 신에게 죄가 있다. 살생조장 죄이다. 전쟁 ― 먹이 쟁취와 같다 ― 과 같은 극한상황을 만들어 인간이 인간을 먹도록 만든 신에게 죄가 있다.
일본작가 오오오카 쇼헤이는 그의 [野火(들불)]이라는 작품에서 인육식(人肉食)의 장면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인육식을 하는 동료를 죽이고, 정신병에 걸려버린다. 그렇다면 내가, 살해자 흰쥐를 죽인 것이, 죄에 대한 응징이 된 것인가? 아니, 결과적으로 나 또한 살해의 죄를 거듭한 것이 아닌가? 먹이사슬은 죄의 사슬, 죄는 끝없이 전이(轉移)된다.
그래서 나는 살해자이기도 하며, 그 이전에 그 상황을 만든 신이다.
살기 위해 먹는다는 것은 동물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다. 인간도 과연 극한상황에서 동물과 다를 수가 있을까? 동물에게, 인간에게 죄는 없다. 죄는 상황에 있다. 상황은 누가 만드는가. 신이 만든다. 나는 분명 내가 사육한 흰쥐 두 마리에 대해서 '죄'가 있다. 신으로서 그리고 살해자로서의 이중의 죄이다. 그 중 살해자, 독살자로서의 죄는 신에게 원인을 넘겨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 있다 해도, 나는 즉 신이므로 신으로서의 '전체적 상황 조성죄'는 면할 수 없다. 신은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신(상황)이 모든 죄를 짓게 만들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일 것이다.
이 '엽기적' 이야기는 어린 나에게 있어서는 '극한상황'이란 것과, '죄'의 경험이었다. 어린 시절의 어떤 경험은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겪는 많은 직간접의 경험을 통해서 다시 재생되고, 반추되며 그 사람 나름의 인간과 삶에 대한 생각과 시각을 형성하게 한다.
일곱 살의 내 딸 지원이가 최근에 친척으로부터 '노브롭스키'라는 서양 쥐 두 마리를 선물 받아 방안에서 기르고 있다. 요즘은 기르는 용기나, 먹이, 그리고 바닥에 까는 재료 등이 다 제공된다. 운동도 하라고 쳇바퀴도 들어있고, 잘 때 들어가라고 원통도 하나 놓여있다. 편한 사육, 유복한 피(被)사육이다. 그리고 요즈음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취미까지도 잘 돌보아주고 있어, 나와 같은 기억을 가질 우려(?)는 없다. 아무래도 과거에 비해 죄악을 저지를 위험은 적어진 듯하다. 죄의 경험을 하기 힘든 환경에서 자라는 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과거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른이 갖기 쉬운 편협한 세대이기주의일 것이다. 지원이는 나와는 다른 환경에서 그 나름의 방식과 색깔을 가진 '죄'라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라날 것이다.
나는 지원이가 혹시나 먹이 주는 것을 잊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수시로 노브롭스키를 보러간다. 먹이도 넘치도록 많이 주고, 바닥에 깔린 톱밥도 수시로 갈아준다. 유년시절의 내가, 다시 흰쥐들을 열심히 정성스럽게 키우고 있는 것이다.
<수상자 소감>
持病과의 치열한 싸움을 시작하며
持病, 그것은 지병입니다. 비슷한 말로 숙환(宿患)이라고도 하던가요.
평생 뿌리칠 수 없는, 나의 죽음과 운명을 함께하는, 그것은 지병이라는 것입니다. 가슴속에서 휑하니 불어오는 외롭고 싸늘한 바람으로, 또 때로는 배 밑에서부터 쓰리게 할퀴고 올라오는 뜨거운 갈망으로, 그것은 나를 수시로 괴롭혀 왔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지난 세월, 내가 이 병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듯합니다.
병이 나았다고 생각된 군대에서도, 고가초소에서 비무장지대의 비 오는 들판을 바라볼 때, 그것은, 잊었던 아픔을 상기시키며 들판의 안개 속에서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80년대의 허름한 술집, 드럼통 안의 연탄 불꽃 속에서 타올랐었고, 90년대의 어느 날 밤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텅 빈 시내버스 안에서, 내 옆에 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술 먹고 비틀비틀 돌아가는 길에 울컥 구토와 함께 눈물 속에 섞여 밖으로 흘러나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오늘 그것은 갑자기 내게 손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나와 치열하게 한번 싸워보자고 말합니다. 맨 얼굴로 서로 쳐다보고 밤새워 이야기해 보자고 합니다. 그래! 부딪혀보자, 싸워보자. 또 때로는 한번 붙들고 마음껏 울어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삶의 진실한 가치를 진지하게 탐색
수필이야말로 누구나 부담 없이 쓰고 읽을 수 있는 문학 장르다. 특정한 전문 문학 수업이나 문학 교양이 없더라도 수필을 향유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우리들에게 열려진 문학 장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필은 아무나 쓰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수필이 개방되고 열린 문학 장르이기에 다른 문학 장르보다 한층 깊고 넓은 그 어떤 문학다움을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과 현실에 대한 '현미경적 시선'과 '망원경 시선'의 절묘한 교직을 바탕으로 한, 성찰적 태도의 진정성에 있다. 또한 삶은 다양한 사건들과의 부딪침이다. 그 부딪침 속에 인간적 고뇌와 갈등, 감격과 희망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건들은 아주 특별한 경험에 의해 촉발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익숙하고 평범한 일상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수필은 이처럼 자신을 사로잡는 독특한 사건을 어떠한 형식적 제약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기술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매력적인 장르이다.
이번 리토피아 신인상에 당선된 김영식의 수필은 무엇보다 개인의 독특한 경험을 흥미롭게 전개시키면서도 삶의 진실한 가치들을 진지하게 탐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무심코 스쳐가는 일상 속에서 마주친 사건을 가볍게 넘겨보지 않고, 그것이 지닌 삶의 의미를 차분히 관조할 줄 아는 시선을 갖고 있는 것이다. 「노래하는 사람」은 미술관에 설치된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조각품을 통해 인간과 예술작품이 서로 교감함으로써 얻게되는 미적 쾌감을 실감 있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특히 그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움직이게 하는 살아있는 예술 작품이야말로 메마른 현대인의 감성을 원초적이며 순수하게 회복시켜 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예술 작품에 대한 단순한 감상의 차원을 넘어 삶을 역동적이며 생명력 있게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을 준다. 「흰쥐의 기억」은 유년시절 자신이 키우던 흰쥐들 간의 끔찍한 살생 과정과 자신 또한 흰쥐의 죽음에 가담하게 된 기이한 경험을 소개하면서, 우리 시대의 학살, 범죄, 전쟁을 초래하게 되는 인간의 극단적 잔인성의 문제를 거론한다. 이 작품 또한 소재 발상의 신선함과 흥미로운 내용 전개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의 글은 전체적인 주제를 보다 유기적이며 밀도 있게 조직화하지 못한다는 점과, 글쓴이의 과도한 주제를 드러내는 데 작위적인 면이 보일 수 있는 부분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수필이란 무형식의 자유로운 글이지만 무엇보다 경제적 문장과 집약화 된 내용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며, 성찰적 태도와 철학적 사유는 어디까지나 우리 주변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견될 때 문학적 감동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당선자의 건필을 기원하며, 예각적이면서도 웅숭 깊은 수필을 쓰는 데 더욱 정진하기를 당부한다. 심사 : 리토피아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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