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리토피아 신인상

신인상
수상자
투고작

서아람(소설/2018 여름)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471회 작성일 19-02-19 17:49

본문

서아람0.jpg

낯선 신혼



1. 혼인신고
남자가 혼인 신고서를 작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일 분이었다. 남자는 혼인 신고가 대단하고 거창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구청에 비치된 양식대로 기재한 후 창구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제출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가족관계증명서와 인감도장만 있으면 둘 중 한 명만 방문해서 신고해도 된다고 했다. 인륜지대사라는 결혼을,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후다닥 해치워도 과연 괜찮은 걸까. 처지에 맞지 않는 고민을 하면서 혼인 신고서의 왼쪽 칸을 채워 나갔다. 끄트머리에 스프링이 달린 싸구려 볼펜은 꾹꾹 눌러쓸 때마다 엉덩이 끝에서 석탄처럼 뭉쳐진 검은 물똥을 쌌다. 몇 글자나 썼다고 앞으로 뱉는 것보다 뒤로 줄줄 배설하는 게 더 많았다. 딸깍딸깍, 볼펜심이 흔들리는 소리가 바짝 곤두선 신경을 긁었다. 남자는 신고서의 공백을 빽빽하게 메운 후 옆에 서 있는 여자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여자는 볼펜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긴장 탓이었을까, 남자가 입을 떼자 평소보다 가칠하고 성마른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흘러 나왔다. 뭐 해요, 안 쓰고.
여자는 떠듬떠듬 변명했다. 한자 이름을 쓸 줄 몰라요. 주민등록증 보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게 면박을 주자 여자는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아아,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더니 넓은 책상 위에 등허리를 수그리고 서서 한 글자, 한 글자를 심혈을 기울여 적어 나갔다. 보고 적기 편하도록 벽에 세워놓은 주민등록증이 남자의 시야에 들어왔다. 여자의 이름은 그 생김새만큼이나 별 볼 일 없었다. 여자가 살짝 모자라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게 박 부장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판정은 받지 않았지만 지적장애 3급 정도는 충분히 나올 거라고 했다. 변태에 실패한 번데기처럼 여자 주변에는 부유스름한 막 같은 것이 끼어 있었다. 음영과 채도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밋밋한 얼굴이었다. 칠 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느라 피로했던 조물주가 막판에 대충 끌로 긁어내 조각한 듯 부스스하고 불분명한 인상. 노트르담의 꼽추처럼 권태롭고 침울한 표정이 여자를 한층 남루해 보이게 했다. 목이 늘어난 푸른 면 원피스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는 구겼다 편 종이처럼 쪼글쪼글했다. 적지 않은 나이, 그리고 그동안 겪어온 풍파를 짐작케 하는 잔주름들이었다. 등록기준지가 뭐에요? 여자가 눈치를 보며 물었고, 남자는 성가셔 하면서 모르면 그냥 적지 말라고 했다. 그의 무신경한 시선이 여자의 옆얼굴을 타고 흘렀다. 반죽을 뭉쳐서 붙인 것처럼 뭉툭한 코, 둘레가 거무스름한 입술, 새치가 드문드문 섞여 삐져나온 머리꽁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잔뜩 움츠린 어깨, 땅딸막하고 살진 종아리까지. 동남아인과 위장결혼을 할 때는 그나마 사진이라도 여러 장 주고 그 중에서 고를 수 있게 해 준다던데.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그런 특혜조차 없었다. 남자의 눈길이 여자의 신발에 가서 멎었다. 사막을 홀로 헤매다 온 사람처럼, 때와 먼지가 더께 앉은 비닐 샌들의 뒤축이 벗겨져 있었다. 그것을 본 남자는 자신의 한 켤레뿐인 구두를 떠올렸다. 쿰쿰한 구린내가 올라오는 내피와, 벗겨지고 떨어져 나가 너덜거리는 살가죽을. 그 꼴이 보기 싫어 얼른 눈을 돌렸다.
여자는 십 분이나 걸려서 오른쪽 칸을 다 채웠다. 그녀가 손을 뗐을 때 종잇장은 눅눅한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남자는 증인 란에 자기 양친의 인적사항을 빠르게 적어 넣었다. 그들은 외아들의 결혼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졸지에 증인이 되어 버렸다. 박 부장은 자신을 증인으로 적으라고 했지만 그것만큼은 영 내키지 않았다. 남자는 무료한 표정의 직원이 지키고 있는 창구를 향해 걸어갔다. 여자는 두꺼비처럼 유순하고 둔해 보이는 눈을 끔벅이며 그의 뒤를 따라왔다. 혼인 신고하러 왔는데요. 남자는 불시에 굳어버린 혀를 달싹이며 모기처럼 앵앵대는 소리로 말했다. 행복에 겨워야 할 한마디를, 명령어가 입력된 기계처럼 무미건조하게 내뱉었다.

2. 맞선, 또는 피로연
박 부장은 구청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감시하고 있었다는 게 맞았다. 감색 여름양복으로 감싼 다부진 체격, 어디로 도망가더라도 잘 쫓아올 것 같은 튼튼한 하반신. 연신 다리를 떨며 담배를 뻑뻑 빨아대는 넓적한 얼굴 위로 가파른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남자는 박 부장이 호의를 선심을 베풀듯 내미는 담배 한 개비를 거절했다. 박 부장은 이제 와 새삼스럽게 같은 무리가 아닌 척 하려는 남자의 뻣뻣한 태도가 같잖은 모양이었다. 남자의 여윈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불경하게 친근한 말투로 이죽댔다. 내가 이번 주에 성혼시킨 커플만 벌써 세 쌍이야. 이 정도면 삼신할미 수준이지? 아주 재미난 농담거리를 찾은 사람처럼 피식대더니, 이내 목젖이 다 보이도록 박장대소했다. 삼신할미는 자식을 점지해주는 신이고, 부부의 인연을 이어주는 신은 월하노인이라고, 남자는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남자는 박 부장의 손목 위에 남은 작고 둥근 갈색 흉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수용소의 낙인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어린애가 장난치듯 찍어놓은 도장 자국 같기도 했다. 박 부장은 줄담배를 피우느라 꺼끌꺼끌해진 목소리로 계속 낄낄댔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지갑에서 지폐 두 장을 꺼내 남자의 손에 쥐어 주었다. 순서가 틀리긴 했지만, 둘이 안면 트면서 밥이라도 먹어야지. 잠깐, 그럼 이건 맞선인가, 아니면 피로연인가?
남자가 지폐를 받아들까 말까 고민한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밥’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위벽을 갈퀴로 긁는 허기증이 덮쳐왔다. 어제 점심부터 크림빵 하나밖에 먹은 게 없었다. 기갈에 허덕이며 축 늘어져 있던 오장육부가 갑작스러운 기대감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남자는 군말 없이 지폐를 받아 쥐고서 정오의 뙤약볕 속을 허청허청 걸어갔다. 여자는 소심한 다람쥐 같은 발걸음으로 그의 궤적을 좇아왔다. 빈틈없이 깔린 시가지의 아스팔트에서는 한여름의 태양이 달궈놓은 지열이 홧홧 솟아올랐다. 그들은 다닥다닥 이어 붙은 쌀국수 집, 파스타 집, 각종 상점과 카페를 지나 허름한 순댓국집으로 들어갔다. 환갑이 넘어 보이는 주인 노파는 뭘 먹을 것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펄펄 끓는 순댓국 뚝배기 두 개를 내동댕이치듯 두고 갔다. 곰팡이 슨 벽에서 올라오는 악취와, 비릿하고 시큼한 땀내와, 기름진 돼지 내장 냄새가 한데 뒤섞여 위장을 뒤틀 듯이 자극했다. 남자는 뚝배기에 들깨가루와 깍두기 국물을 붓고, 종지에 담긴 풋고추를 베어 물었다. 확 끼쳐오는 매콤한 풋내에 코끝이 아렸다. 여자는 기력 없는 촌닭처럼 고개를 숙인 채 숟가락질에 몰두했다. 자작한 국물에 만 밥알들을 살뜰하게 긁어 담고, 고무처럼 질긴 순대 껍질을 오물오물 씹는 게 숙제라도 하는 듯 열심이었다. 남자는 지저분한 물잔 위에 이지러지듯 찍힌 입술 자국을 보았다. 달그락대는 숟가락 소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그들을 압박하는 침묵의 벽을 의식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텅 빈 껍데기들이 마주앉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남자는 큼큼 헛기침을 하면서 겸연쩍게 물었다.
몇 살이에요? 여자는 서른둘이라고 말했다. 나보다 세 살 많네. 원래 무슨 일 했어요? 여자는 잠시 간격을 두고 대답했다. 다방 나갔어요, 부평에서. 여자의 무심한 대답은, 부평이라는 지명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한낮에도 어두침침하게 블라인드를 쳐 놓은 간판 없는 다방, 보온병에 담긴 믹스커피와 시간당 끊는 티켓, 옷값이며 화장품값 명목으로 두꺼워져 가는 선불 금 장부와 새끼 치듯 불어나는 이자, 위약금 같은 것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푸르죽죽 화장독이 오른 피부와 헐거워진 성기, 절망으로 점철된 고달픈 미래뿐이다. 하지만 여자의 얼굴에서 수치심이나 낙담 같은 진부한 감정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자는 수십 년을 티켓만 끊으며 살아온 사람처럼 닳아 보였고, 그 체념의 기운은 남자에게도 무척 익숙했다. 뭐하시는 분인데요. 어딘가 비어 있는 어투로 물어오는 여자에게 남자는 맥없이 대답했다. 대학원 다니다 그만뒀어요. 우와, 여자는 순진하게 감탄했다. 남자는 빻은 고춧가루처럼 얼굴을 붉혔다.

 3. 청첩장
요즘의 유령회사 사무실에는 실제로 유령이 살기도 한다. 공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급습을 감행하는 은행 직원들이 있는 탓이다. 박 부장은 제법 구색 갖춘 사무실을 차려놓았다. 책상은 한 개뿐인데 전화기는 다섯 대나 설치되어 있었다. 박 부장은 빙글빙글 회전하는 사무용 의자에 등을 파묻고 앉아 수화기를 든 채 열성적으로 떠들었다. 연거푸 허공을 가르는 과장된 손짓이 쉴 새 없이 귀청을 때리는 전화벨과 어우러져 산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발치에는 휴지통에 골인하지 못하고 추락한 파지 뭉치들이 말라붙은 커피 얼룩을 묻힌 채 굴러다녔다. 그가 목 관절을 힘주어 꺾을 때마다 우두둑 하고 호두 껍데기 부수는 소리가 났다. 자, 여기 재직증명서. 박 부장은 처음 들어보는 회사의 인장이 찍힌 서류를 건네주었다. 남자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억세게 짓눌렀다. 한 장의 문서가 일으킨 미세한 파장이 수십 개의 바늘이 되어 혈관 속을 헤집었다. 의식의 바닥에 가라앉은 불편한 기억들, 언제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결코 거론되지 않는 거대한 흰 코끼리의 존재를 일깨웠다. 그의 인생에서 지난 십 년은 어딘가에 소속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유복하지 못한 형편에 사립대학에 진학하려고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교수까지는 바라지도 않았고, 시간강사 자리라도 얻어 걸리기 바라면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동안 대출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상태에서 암 투병을 하는 모친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추가 대출을 알아보아야 했다. 제1, 2금융권에서는 상습 연체자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박 부장이었다. 그는 은하계 내의 행성들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혜성의 핵이었다. 교수에게 뒷돈을 주지 않으면 논문심사 통과는 영영 요원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을 때, 남자의 빚은 억 단위로 자라나 있었다. 빚은 살아 있는 생물, 넝쿨손처럼 집요하게 뒤엉켜 증식하는 암세포였다.
이건 예식장 계약서랑 청첩장이고. 박 부장은 매끄럽게 코팅된 종이들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여태까지 사무실에 뿌리내린 식물처럼 수동적인 자세를 견지하던 여자가 냉큼 손을 뻗은 것은. 여자는 묘하게 생기 도는 얼굴로 박 부장의 위조 작품들을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계약서에 표시된 생화 옵션이니, 원판 스냅이니 하는 결혼식 용어를 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금박 테두리가 둘러진 청첩장을 자못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억제하지 못한 기쁨의 표정이 담청색 블라우스 위로 나팔꽃처럼 피어오르자, 순간적으로 제 나이대로 보였다. 난 청첩장에 장미꽃 장식이 들어가는 게 예쁘던데. 한참이나 핀트가 어긋난 말은 어디에도 흡수되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떠돌았다. 남자는 그 안에 담긴 허황한 감상주의에 어이가 없었다. 여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따귀를 후려쳤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 뜬금없지 않았을 것이다. 박 부장은 경멸하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장미꽃이든 배추꽃이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다 가짠데. 하여간 주제파악 못 하기는. 여자는 도로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청첩장을 움켜쥐었다. 구원을 요청하는 시선으로 남자 쪽을 바라보기에, 남자는 말없이 외면하면서 이마 선을 벅벅 긁었다. 따뜻하기보다는 미지근하고, 소태처럼 씁쓰름한 연민이 가슴 언저리를 잠식했다. 투박하게 생긴 저 여자는 평생 남자로부터 장미꽃을 선물 받아 본 일이 없을 게 분명했다. 여자의 뺨에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진 홍조는 이른 갱년기 증상은 아닐까.
박 부장은 거북한 정적을 깨고 다른 대출 꿈나무들을 맞으러 갔다. 신용불량 기록을 세탁하고 성실한 근로자로 탈바꿈하러 온 노숙자들. 보이지 않는 짐을 짊어지고 굽이굽이 고개를 넘느라 목화 솜털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그러면서도 ‘대출’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형형한 광채로 눈을 번득이고 만다. 판화로 찍어낸 듯 동일하게 경직된 그 얼굴들 속에 백발이 은성한 노인도 있었다. 해골처럼 움푹 팬 눈자위, 볼품없이 튀어나온 광대뼈, 투명 테이프로 둘둘 감은 안경다리가 남자의 부친을 닮았다. 남자는 문득 삼십년 후의 자신도 노인과 같을지 궁금해졌다.
 
4. 신혼집 마련
은행의 상담 창구는 두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 없는 구조였다. 여자는 배경처럼 남자의 뒤에 서 있었다. 은행원은 그들이 제출한 서류를 휙휙 빠르게 넘기면서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추고 그 양미간에 팽팽한 세로 주름이 그어지는 순간이 오면, 남자는 급소를 찔린 사람처럼 움찔거렸다. 태연한 척 하는 데 소질이 없는 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여서, 잘 익은 토마토처럼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라 괜히 제자리걸음을 치며 서성거렸다. 식 올리기 전에 혼인신고부터 하셨네요? 특별한 일은 아니었고, 은행원도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은행원은 경쾌한 속도로 대출계약서를 출력하고, 서명이 필요한 부분에 형광펜으로 동그라미를 치고, ‘근로복지공단 전세자금대출’ 브로슈어를 꺼내 펼쳤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일련의 동작에도 셔츠 소매의 주름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게 신기했다. 남자는 은행원의 손가락이 짚어주는 대로 자기 이름을 반복해 적었다. 이제 실사에 통과하고 최종 승인이 나면 2억 원의 대출금이 남자의 계좌로 송금될 것이다. 그 절반을 박 부장과 임대인이 나눠 갖고, 남은 절반은 남자와 여자의 기존 채무 변제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박 부장은 그 외에도 현금으로 넉넉한 수고비를 챙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토록 쉬운 일이었다니. 다시 한 번 흙탕물 같은 허망함이 남자의 메마른 입속으로 배어들었다. ‘신용등급이 낮아 저금리 대출이 불가능합니다.’, ‘기존 사금융 대출이 많으셔서 대출정책 지원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심의위원회에서 불승인되었습니다.’ 오직 주파수 한 개에만 맞춰진 라디오처럼 비슷한 멘트를 쏟아내던 수화기 건너의 녹음된 목소리며 문자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오래오래 예쁘게 사세요. 은행원은 가살스럽게 혀를 놀렸다. 그것은 어쩐지 신랄한 빈정거림으로 들려, 한참을 고막에 화살처럼 박힌 채 빠지지 않았다.
예그리나 아파트 202동 1210호. 비밀번호는 3333. 박 부장은 전화로 그렇게 알려주었다. 다음 날 남자와 여자는 신혼집에 입주했다. 실사가 끝날 때까지 둘이서 그 집에 살아야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박 부장과 논의가 끝난 부분이었다. 남자는 ‘예그리나’라는 생소한 단어의 의미가 궁금해 혼자서 휴대폰으로 검색해 보았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 어느 선착장에도 닻을 내리지 못한 채, 비루한 일상의 표면을 개구리밥처럼 부유하며 사는 이들에게 이보다 어울리지 않는 말이 있을까. 그들을 성냥갑을 쌓아 놓은 것처럼 세대별로 층층이 늘어선 새 아파트 단지를 걸어갔다.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삼삼오오 벤치에 모여앉아 수다를 떠는 젊은 주부들의 새된 목소리가 캐스터네츠처럼 발랄하게 울렸다. 남자가 살던 고시촌의 쪽방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종류의 소리들이었다. 두툼한 월급봉투와 포근한 요람, 유기농 재료로 만든 샌드위치와 아름답게 단장한 머리카락이 내는 소리들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윤기 나게 청소된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십이 층까지 올라갔다. 키패드를 누르고 열린 문 사이로 삼켜지듯 들어갔다. 현관문이 닫히고 잠금 장치가 자동으로 걸렸다. 사람의 존재를 감지한 현관 백열등이 말갛게 불을 밝혔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안온한 온기가 스멀스멀 몰려나왔다. 집 안을 맴돌던 페인트 냄새가 폐부로 침투했다. 숨이 턱 막히면서도 묘한 중독성이 있어 자꾸 들이마시게 되는 냄새였다. 여자는 천을 겹겹이 덧대어 꿰맨 옷가방을 들고 주춤대며 서 있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향해 지시하듯 말했다. 짐은 붙박이장 안에 넣어 놔요. 은행 직원이 와서 보면 안 되니까. 남자는 벽에 달린 스위치를 찾아 거실 조명을 켰다. 가물거리는 빛줄기 사이로 밀가루 같은 먼지 입자들이 군무를 추듯 떠다녔다. 큰 방과 작은 방 사이에 난 복도를 걸어가면 좌우로 주방과 욕실이 나오는 구조였다. 생활의 채취는 배어 있지 않았다. 빌트 인으로 설치된 가구와 집기들은 높낮이가 없는 노래처럼 단조롭고 삭막했다. 유랑자인 그들이 고단한 몸을 쉴 곳, 다정하고 즐거운 그들의 신혼집이었다.

 5. 동거
여자는 입주 청소를 하자고 고집을 부렸다. 신축 아파트를 청소도 하지 않고 들어가 살면 눈이 따가워지고 아토피도 생긴다는 것이었다. 등록기준지가 뭔지도 모르는 여자가 새집증후군에 대해서는 알았다. 달리 할 일도 없기에, 남자는 여자가 시키는 대로 물걸레로 창틀과 유리창을 문질러 닦았다. 여자는 부지런히 바닥을 쓸고 닦고, 수세미에 베이킹 소다를 묻혀 부엌과 욕실에 묻은 물때를 제거했다. 커튼을 걷어 비눗물을 푼 대야에 담그고 야무지게 짜서 베란다 빨랫줄에 널어놓았다. 여자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곳곳에서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났다. 통나무처럼 무기력해 보이던 여자의 어디에서 그런 활기와 의욕이 솟아나는지 남자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여자는 단 한 번도 집이라고 부를 만한 장소를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남자가 보기에는 이 곳도 그들의 집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 그것도 사기를 칠 목적으로. 공원의 평화로운 풍경도, 유백색 벽지를 수놓은 잔잔한 나뭇잎 무늬도, 그 어느 것도 그들 소유가 아니었다. 그 생각은 남자의 뇌리에 바위처럼 단단히 박혀 있었다. 남자가 집 안에서 경계를 늦추고 편안해지려고 할 때마다, 모서리처럼 날카롭게 돌출해 나왔다.
남자는 매일 아침 양복 차림으로 재직증명서에 적힌 주소를 찾아갔다. 책상과 의자, 전화기가 놓인 다섯 평 남짓의 휑한 공간에는, 그와 같이 좌표를 상실한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하릴 없이 시간을 때웠다. 그들은 서로 아는 척을 하는 법이 없었고,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으며, 점심시간이 되면 뿔뿔이 흩어졌다가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여들었다. 남자는 마치 시계바늘을 내재한 사람처럼 규칙적인 리듬으로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여자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시내버스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 켜켜이 쌓인 어둠 위로 도시의 네온사인이 색색의 보석처럼 현란하게 돋아나는 모습을 보았다. 그 사이를 흘러 회귀하는 연어처럼 각자의 집을 찾아 돌아가는 사람들. 차창에 음각陰刻처럼 새겨진 그 얼굴들을 살폈다. 그러다 언뜻, 거무스름한 쇳물 같은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끝에 홀로 선 등대처럼 총총하게 불을 밝히고 있을 자신들의 집을 떠올리고는 했던 것이다. 적어도 그 곳에는 타인의 체온과 온기가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미니 청소기를 돌리는 소리,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극적으로 질러대는 고함 소리가 으레 튀어나왔다. 여자가 하루도 빠짐없이 챙겨보는 일일 드라마 때문이었다. 여자는 모든 물건을 천 원 균일 가에 파는 상점을 드나들며 생필품과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사들였다. 토끼굴처럼 썰렁하던 장방형의 공간은 이제 신혼부부의 살림집답게 단출하고 아기자기해 보였다. 남자가 단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매번 그를 위한 밥상을 차려 놓았다. 여자의 빈약한 부엌에는 밥솥도 도마도 없었고, 특출한 솜씨도 없었다. 그래도 따끈하게 데운 즉석 밥에 곁들인 고소한 멸치볶음, 짭짜름한 콩자반이며, 자작하게 국물을 낸 김치찌개 같은 것들이 제법 먹을 만 했다. 적어도 남자의 식단 대부분을 구성해온 유통기한 지난 편의점 도시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남자는 맛있다, 맛없다 군소리 하지 않고 묵묵히 그릇을 비웠다. 자신이 먹은 그릇은 스스로 설거지를 했다. 
여자는 팔꿈치를 방바닥에 대고 머리를 괴고 누워 드라마에 열중했다. 제 집 안방에 있는 것처럼 무방비한 자세였다. 기나긴 시간을 때우는 방법은 텔레비전 아니면 형식적인 대화뿐이었다. 여자는 낮에 있었던 소소하고 보잘것없는 일들을 얘기하기를 좋아했다. 경비와 인사를 했다든가, 길고양이를 만났다든가 하는 것들. 그 어눌하고 느릿한 음성을 들고 있으면 남자는 나사가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여자가 뿜어내는 안일한 공기가 그의 일상 속에도 스며들어 포자胞子처럼 번식하고 있었다. 이따금 발작처럼 고개를 들던 분노와 회의는 차츰 묽게 희석되어 갔다. 여자가 만드는 음식들처럼 간이 세지 않은, 맛의 구획을 뚜렷하게 나눌 수 없는 감정의 물결들. 어쩌면 그것은 그가 감히 희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안락함인지도 몰랐다.

6. 데이트, 혹은 정사
여자는 화석처럼 제자리에 고인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흉하고 추레한 행색은 산뜻하고 우아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보였다.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여자의 어깨 위로 일몰의 불그스름한 햇발이 감실감실 비껴 떨어졌다. 온종일 벽을 쳐다보느라 피곤해진 남자가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비비면서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걸어왔다. 여자는 은근히 조바심을 내면서 점점 다가오는 남자의 발자국을, 길쭉해지는 그림자를 관찰했다. 여자를 인식한 남자는 목석 인형처럼 우뚝 발길을 멈췄다.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황망한 표정이었다. 퇴근길에 마중을 나오다니, 너무 예사롭고 평범해서 그들에게는 오히려 어색했다. 여자 쪽에서도 지나치게 무람없는 행동이 아닌지 걱정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남자를 보고도 차마 반가운 내색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풀이 죽어 있는 넙적한 얼굴을 보자, 남자의 가슴 밑바닥에서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민망한 표정으로 돌아서려는 여자의 뒤통수에 대고, 그는 밖에서 저녁을 먹자고 말했다.
그들은 조촐한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갔다. 때때로 남자는 사위어가는 석양을 반사하며 스러졌다가 다시 드러나기를 반복하는 여자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러면 여자는 남자의 시선이 창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를 숙여 버렸다. 한 점 화장기도 없는, 그래서 나잇살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얼굴을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칼국수를 먹고, 목욕탕에 들렀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포장마차에서 충동적으로 소주도 한 잔 기울였다. 비샌 자국이 있는 지붕에 전깃줄로 연결해 놓은 알전구가 흐릿한 장막을 드리웠다. 여자가 입은 헐렁한 남색 티셔츠와 무릎이 닳아 실 보푸라기가 빠져나온 청바지가 엷게 착색되어 보였다. 남자는 마취제 같은 취기를 갈망하며 목구멍 찔끔찔끔 소주를 부어 넣었다. 차갑고 싸한 알코올이 늑골에 쌓인 해묵은 회한까지 씻어내는 듯 했다. 여자는 목을 꿀렁이며 남자가 따라주는 술을 맛있게도 마셨다. 화류계에 몸담은 경험이 있어서인지 남자보다 주량도 훨씬 셌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가득한 홍합탕을 휘젓던 남자가 말했다. 대출 승인이 나면, 그때는 고기 한 번 구워 먹읍시다. 여자는 별안간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었다. 왜요? 시무룩한 반응에 남자가 의아해하자, 여자는 슬며시 속내를 발설했다. 저는 대출금 빨리 안 나와도 괜찮아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남자의 말문이 막혔다. 범람하는 잿빛 강물처럼 출렁대는 목소리가 뭉근하고 창연蒼然하게 귓가에 고여 들었다. 남자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왜 항상 파란 계열의 옷만 입어요? 어릴 때 엄마가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 사주를 봤는데, 팔자에 불 화火자가 여섯 개나 있다고 그랬대요. 화기를 누르려면 물가에 살거나, 그게 안 되면 옷이라도 파랗게 입히라고 했대요. 그래서 효과가 있었어요? 여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짚으로 꼰 인형마냥 푸슬푸슬 웃었다. 저렇게 노숙하게 웃을 수 있을 때까지 용암 같은 쇳물을 삼키면서 얼마나 많은 담금질을 했을까. 삶이라는 것은 어차피 꿈이 무너지는 지루한 과정에 불과하지 않던가. 
그날 밤 남자는 여자의 방에서 잤다. 그 와중에 어떠한 욕망도, 미혹도, 흥분도 없었다. 어쩌면 그것조차 전입신고와 같이 일종의 요식행위였던 것은 아닐까. 인류가 기원할 때부터 남녀는 짝을 이루어 살았고 그 배경에는 언제나 섹스가 있었다. 남자는 어설픈 뜨내기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여자를 향해 뻗어나가는 손이 자신의 나머지 육신과는 다른 요소로 구성된 독립적인 개체인 듯 했다. 나무토막을 끌어안은 것처럼 뼈가 맞닿는 자리마다 이질감이 느껴졌다. 여자의 몸을 애타게 만질수록 마음은 저만치 떨어져 나갔다. 버짐이 노독처럼 돋아난 살이 뒤엉키며 녹아들었다. 몸태질을 하듯 토막 난 몸짓을 하던 남자는 여자의 안에 자신을 삭여 넣으며 허물처럼 가라앉았다. 여자는 애벌레처럼 몸을 말고 엎드린 채 바닥으로 매몰되었다. 관능보다는 여운이 남는, 한숨에 가까운 처연한 신음소리가 그들의 덥고 비좁은 방을 채웠다.
 
7. 이혼
실사가 무사히 끝나고 사흘 만에 대출 승인이 떨어졌다. 공실이 아닌 척 하고 있었지만 공실이었던 사무실도 문을 닫았다. 그 날 오후, 남자와 여자는 이삿짐을 꾸려 놓은 채 박 부장이 돈을 들고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삿짐이라고 해봤자 처음 입주할 때 들고 온 각자의 가방과, 그 동안 여자가 사들인 쇼핑백 두 개 분량의 잡동사니들이 전부였다. 여자는 알맹이를 토해낸 석화石花처럼 중심점을 잃고 느즈러져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처음 본 날 그랬던 것처럼. 이제 어디로 가요? 여자는 복화술을 하는 사람처럼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웅얼거렸다. 아무 데나요. 남자는 깊은 물속에 잠겨 있는 사람처럼 먹먹하게 대답했다. 그간 이 집에서 여자와 살았던 시간들은, 아스라한 새벽이 오면 사라지는 한낱 무위한 꿈이었나 싶었다. 각막을 한 꺼풀 깎아낸 것처럼 갑자기 주변 사물들의 윤곽이 한층 선명해졌다. 반들반들한 에나멜 탁자에 손을 얹고 모서리까지 한 번 쓸어내듯 어루만졌다. 그 서늘한 감촉 안에 그들의 불시착을 실증하는 흔적도 있을까. 사람의 발자국을 영구히 보존하는 달 표면의 회색 분화구처럼.
반나절이 지나도 박 부장이 나타나지 않자, 두 사람 사이에선 어긋나기만을 바라는 불길한 직감이 은밀히 오갔다. 오랫동안 억지로 세우고 있던 남자의 척추는 간혹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삑삑, 현관 밖에서 키패드가 눌리더니 걸쇠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남자와 여자는 동시에 화들짝 놀라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제비집처럼 보풀보풀한 파마머리를 하고, 검버섯 핀 두꺼운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건 노파가 난데없이 들이닥쳤다. 누구세요? 남자는 금방이라도 불안감으로 붕괴하려는 내면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태연하게 물었다. 누구긴 누구야, 이 집 주인이지. 니들도 박 씨랑 한 패지? 박 씨 어디 갔어? 노파는 살기등등했다. 박 부장과 함께 이 건을 비롯해 다섯 건이나 되는 전세자금 대출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박 부장이 송금된 대출금 전액을 빼돌려 도망갔다고 했다. 억 대의 채무를 대신 감당하든가, 그게 아니면 다 같이 철창신세를 져야 할 거라고 꽥꽥 갈라지는 파열음을 질러댔다. 소화할 시간도 없이 쏟아지는 말들 때문에 남자는 현기증이 났다. 아귀가 억센 손에 목이 붙잡혀 질식할 때까지 졸리는 기분이었다. 볼이 푸들거리고 핏줄이 울긋불긋 불거지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 필요 없으니까 방부터 빼! 노파는 올망졸망 늘어선 여자의 가방과 쇼핑백을 화풀이하듯 걷어찼다. 연남색 도트무늬 스카프며, 박하색 매니큐어, 여행용 손톱 깎기 같은 것들이 비죽이 열린 지퍼 사이로 꾸물꾸물 비어져 나왔다. 여자는 엉금엉금 기어 다니면서 물건을 주웠다.
노파는 한참 동안 패악을 부렸다. 그러더니 어쨌든 당신들 계좌로 돈이 들어왔다가 나갔으니 알아서 메워 놓으라는 일방적인 통고를 남긴 채 사라졌다. 우리한테 그런 돈이 어디 있어요. 악다문 잇새 사이로 튀어나온 남자의 항변은 쾅 닫힌 현관문에 부딪혀 공허한 메아리로 사라졌다. 남자는 양 손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아랫배에서부터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았다. 죽음과도 같은 적요를 뚫고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만 울려 퍼졌다. 여자는 그것이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 마냥 헤진 옷가방을 와락 끌어안았다. 저기요. 찜통에 갇힌 집짐승처럼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남자에게 그녀가 말을 걸었다. 어떻게든 해 봐요. 남자의 입술이 비틀리면서 안면 윤곽이 그로테스크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왜요. 아둔한 송아지 같은 두 눈이 남자의 어깨에 애원하듯 매달렸다. 남편이잖아요. 고집과 집착으로 물들어 당장이라도 물기가 돋아날 것 같은 파리한 낯빛이 남자에게는 참혹하고 섬뜩하기만 했다. 뭐라는 거야, 이 정신 나간 년이. 남자는 발작적인 분노에 치를 떨면서 봇물 같은 말들로 여자를 공격했다. 이게 무슨 애새끼들 장난인 줄 아나. 그렇게 등신같이 넋 놓고 있으니까 사기나 당하지.
여자는 연체동물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는 남자의 입술을 아연한 눈길로 쳐다보다가, 끝내는 소리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작살에 걸린 생선처럼 양 팔을 파닥거리면서, 온몸이 물로 된 사람처럼 눈물과 콧물을 사방에 비산해 가면서 여자는 울었다. 여자의 몸이 아닌 어딘가 다른 차원에서 수원水原을 끌어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남자의 벌린 입으로도 침인지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끈끈하고 짭짤한 것이 넘어왔다. 심장 언저리를 통과하지 못하고 응어리진 무언가가 핏물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모든 게 값싼 허상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등을, 때로는 이마를 맞대고 산 적이 있다는 것조차. 그들은 태고 적부터 한 뼘의 공간에서 발만 붙이고 살아가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였다. 둘이 있을 때조차 하나가 아닌 적이 없었다. 남자는 발치로 데굴데굴 굴러온 여자의 박하색 매니큐어를 멀리 걷어차 버렸다. 그리고 그녀를 남겨둔 채 빈 집을 떠났다. 문이 닫히고, 남자의 등짝을 때리던 여자의 시퍼런 울음도 닫혔다.




심사평

이 시대의 어둠을 잘 그려낸 수작햔



출품한 두 편의 단편은 복잡한 현대사회의 이면을 날카롭게 비판한 작품이다.
「낯선 신혼」에서 두 남녀는 혼인을 매개로 범죄를 모의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물질문명의 폐해가 극단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인생을 새로 시작해야할 혼인, 신성해야할 결혼이 경제 범죄의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인간의 지능을 대신하여 인공지능 시대의 양면을 보는 듯하여 씁쓸하다.
「낯선 신혼」은 문장을 다뤄본 솜씨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문체가 간결하고 깔끔하다. 혼인신고에서 이혼에 이르기까지 7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내용은 가볍고 빠른 이 시대의 면면을 숨가쁘게 표현한 측면이 보이나 시간적 순서로 이루어진 7개의 챕터 제목이 굳이 필요할까, 생략해도 충분히 긴장되고 탄탄한 구조가 되지 않을까.
간간이 뛰어난 묘사가 눈에 띈다. “때와 먼지가 더께 앉은 비닐 샌들의 뒤축”에서 “사막을 홀로 헤매다 온 사람처럼”이나 “빚은 살아 있는 생물, 넝쿨손처럼 집요하게 뒤엉켜 증식하는 암세포였”다고 하는 장면이나 “여자의 뺨에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진 홍조는 이른 갱년기 증상은 아닐까” 라는 표현은 글을 쓰면서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대목이다. 
두 남녀가 짧은 기간 입주한 아파트 이름인 ‘예그리나’.
작가는 ‘예그리나’ 뜻이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 라고 밝히고 있다. 서로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잠시 뜻을 같이한 남녀가 거주하는 아파트 이름의 뜻과 가짜로 맺어진 이들의 관계는 어울릴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대조를 이룬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느 선착장에도 닻을 내리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인생을 사는 다방에서 일한 전력의 여자는 짧은 순간이나마 안락하고 쾌적한 아파트에서 꿈을 꾼다. 허황한 꿈은 금세 사라져버리고 마는 신기루와 같다.
“남자가 단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매번 그를 위한 밥상을 차려 놓았”고, “여자는 팔꿈치를 방바닥에 대고 머리를 괴고 누워 드라마에 열중했”으며, “제 집 안방에 있는 것처럼 무방비한 자세였”다고 하는 여유와 느긋함의 태도는 다음 순간에 올 파국을 예시하는 듯하여 아슬아슬한 긴장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것은 그가 감히 희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안락함인지도 몰랐”다는 표현에서 절박한 생존의 밑바닥에서 꿈을 꾸는 등장인물을 통해 이 시대의 어두움을 잘 그려내고 있다.
「심판」은 성형으로 잘 만들어진 얼굴과 몸을 가진 영화배우를 통해 인간이 아닌 상품을 제조해내는 연예계의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인기도 아주 작은 실수로 단박 무너질 수 있음을, 그 인기는 모래위에 세워진 집이거나 거품과 같은 것임을 보여준다. 영웅이 필요한 시대, 영웅이 부재한 시대에 대중은 인기 연예인을 통해 그 갈망을 풀어내고 대리만족을 필요로 한다.
인기 연예인은 현대판 영웅으로 부각된다. 하지만 사소한 실수나 단점을 대중은 용서하지 못한다. 영웅의 약점을 덮어주기는커녕 실수를 만회할 기회조차 인색한 시대에 마녀사냥은 한 인간을 무참하게 끌어내린다. sns에서의 댓글부대나 대중의 공격성향은 현실에 실재하며 작가는 등장인물을 통해 이 시대의 짚어내고 있다. 마녀가 화형대에서 한줌의 재로 사라질 때까지 대중은 고통과 쾌락이라는 오락에 중독되어 열광한다.
두 편의 작품 중 「낯선 신혼」을 당선작으로 올린다. 앞으로 좋은 작품을 쓸 역량이 충분하다고 믿는다./고명철 유시연(글)  



당선소감

소설의 세계는 언젠가는 돌아가야할 고향햔



제가 ‘리토피아 청소년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던 때로부터 무려 1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문필가의 꿈을 접어두었지만, 소설의 세계는 저에게 있어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돌아가야 할 고향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 첫 걸음을 《리토피아》에서 시작하게 될 수 있게 된 것은 무척이나 특별한 선물입니다. 흔히 ‘법률가’라고 하면 감성이 메마르고 딱딱하기만 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지만, 사실은 매일 매일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대해 공부하게 되는 직업인만큼 보다 재미있고 생생한 글을 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본업에도 충실하면서, 16년 전 문학소녀가 품었던 그 초심을 잊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욕심 많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언제나 격려하고 응원해 주는 부모님과 남편,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민현이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서아람





[이 게시물은 리토피아님에 의해 2024-04-25 16:32:35 신인상수상자에서 이동 됨]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