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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하/시(2018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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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천교의 달 외 4편
물가에 무수한 물푸레나무 위로 달빛이 내려와 꽃을 피웠네.
여름을 녹였던 별들은 유유한 흐름 속에 휘감기며 걸어가고.
휘파람 부는 백천교 말라가는 풀들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면,
유년의 콧물이 묻어있는 방천둑에 달그림자 흔들리며 걸어오네.
둑가에 걸터앉은 돌 틈으로 반딧불이 반짝이다가 사라지면,
다리 밑 도란도란 이끼 낀 돌들은 아이들 웃음소리 기다리고.
도시에서 달려온 피곤한 달빛이 백천교 밑에서 막춤을 추네.
술 마시고 백천교 건너다 동네총각 달빛 속으로 뛰어들었네.
오래된 집
뜨락에 텃밭 하나 두었더니 감자꽃이 한 고랑 피었다.
텃밭 너머 닭장 수탉들이 울더니 해가 먼저 일어난다.
장미는 담장 휘어 감으며 새로운 불씨를 살리고 있다.
뻗어가는 가시발톱 치켜세우며 사립문을 지키고 있고,
고추가 말라가는 하늘엔 잠자리들이 포물선을 그린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은 남자는 낮술을 마셔 코가 빨갛다.
해가 산그늘의 먹이가 되면 그 자리엔 달이 뜰 것이다.
댓돌에는 낡은 고무신 두어 켤레가 누워 있을 것이다.
한밤 꿈속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는 내가 있을 것이다.
새벽길
미처 혈관이 터지지 않은 햇살이 느린 걸음으로 떠난다.
어두운 늪 속에서 이슬은 둑을 허물고 풀 등에 앉아있다.
꽃을 피우기 위한 안간힘이 영롱한 빛으로 잎에 묻는다.
어둠이 훔쳐간 날개들을 강인한 풀숲에 숨겨두는 것이다.
어둠을 뚫고 내려온 물방울과 동행한 나비가 춤을 춘다.
강아지풀 길다란 꽃에 걸터앉아 빛나는 노래가 영롱하다.
기억의 한 페이지를 물고 밤길 더듬는 심장이 두근거린다.
새로운 시작에 이끌려 진동하는 풀들이 파르르 떨고 있다.
남장사의 아침
맑은 물에 씻어 걸어둔 구름 아래 빛바랜 그림이 걸려있다. 아침을 깨우는 풍경소리가 이슬을 물고 꽃잎을 유혹한다. 먼 길 마중 갔던 하얀 꽃들이 부처님 모시고 때맞추어 함께 왔다. 밤새 나를 기다린 불두화는 법당을 지키는 수문장이다. 절 마당을 가득 채운 연등이 근심을 털어내며 흔들린다. 깃발 흔들며 하늘 향해 사모곡을 부른다. 산만한 길 돌아나온 꿀벌들이 산사의 쉼터에서 불심을 불러 모은다. 달려온 바람의 꼬리는 우주 안에 기대어 묵은 날들을 풀어놓는다. 절간을 지키던 강아지가 꼬리 흔들며 툇마루에 걸터앉은 햇살을 희롱하고, 마당을 채우는 보살들의 기도소리가 종소리에 끌려 산사의 침묵 속으로 숨는다. 소리 없이 열리는 불두화의 아침은 오월의 빛 천지이다.
봄비
하늘 끝에 매달린 구름이 가지를 펼치며 기지개를 편다.
구름을 뚫은 비가 심심한 풀잎들의 가슴으로 파고든다.
빗방울 리듬이 솔잎을 타고 춤을 추며 송홧가루를 턴다.
양철지붕 빗소리가 한 편의 영화음악처럼 지나간다.
비와 손잡고 찾아온 새 한 마리가 젖은 날개를 털고 있다.
풀잎들이 빈집에 낸 창문을 두드리며 푸른 볼을 내민다.
양철지붕 아래 오케스트라 들으며 매달려 있는 물받이,
제 몸 패이는 줄도 모르고 댓돌 같은 사람도 앉아 있다.
길 떠난 기억이 모퉁이 돌아 봄비 속에서 보쌈을 당한다.
심사평
탁월한 이미지 형성과 내용의 조화가 돋보여
아무리 환경이 변하고 시어의 운용 범위나 시어의 확장(무의식이나 과학기술의 변화 양상을 수용한)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현대 서정시의 기반은 탁월한 리듬과 명징明澄한 이미지라는 것은 쉽게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이미지를 조성하는 능력과 리듬의식이 뛰어나다면 신인으로서 그는 매우 준비가 잘 된 채, 지나치게 내용(의미)에만 집착하는 경우에 비해 훨씬 유리한 출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심사하게 된 박달하 시인은 심사 대상 작품 모두에서 한결 같은 뛰어난 이미지 형성에 성공하고 있다. 가령, “뻗어가는 가시발톱 치켜세우며 사립문을 지키고 있고,/고추가 말라가는 하늘엔 잠자리들이 포물선을 그린다./대청마루에 걸터앉은 남자는 낮술을 마셔 코가 빨갛다.”(「오래된 집」)처럼 만추晩秋를 ‘붉다’는 색채의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한 것도 그렇고, “양철지붕 빗소리가 한 편의 영화처럼 지나간다. 비와 손잡고 찾아온 새 한 마리가 온몸 적신 날개를 털고 있다. 풀잎들이 빈집에 낸 창문을 두드리며 푸른 볼을 내민다.”(「봄비」)에서 드러나듯 시각과 청각을 결합한 이른바 공감각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시인은 이런 선연한 이미지들에 덧대 기억의 한 자락을 풀어낸다. 가령, 「새벽길」의 2연, “강아지풀 길다란 꽃에 걸터앉아 빛나는 노래가 영롱하다./기억의 한 페이지를 물고 밤길 더듬는 심장이 두근거린다./새로운 시작에 이끌려 진동하는 풀들이 파르르 떨고 있다.”와 같은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같은 구조가 반복된다. 사실 우리 문학의 전통에서 ‘선경후정先景後情’이라는 수법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의 지나친 반복은 기계적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자극해 개별 작품의 이미지들을 진부한 것으로 판단케 할 소지가 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시에서 ‘의미’는 단순히 소재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각의 층위(sense)와 구문적 층위(meaning)를 지나 맥락에 위치함으로써(contextual) ‘의미(message)’가 된다. 박달하 시인은 감각과 구문에서 잘 준비된 역량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다만, ‘달’, ‘집’, ‘길’, ‘비’, ‘아침’ 등을 지나치게 소박하게 자기 심사心事를 장식하는 소재로 격하한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숙성 기간을 제대로 소화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또 한명의 개성적 시인의 탄생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백인덕(글) 장종권 남태식
당선소감
젖 달라고 보채는 어린 잎들을 살피는 나무에 눈꽃이 피어 따듯하다. 겨울을 맞이하는 나무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바람을 마주하며 벌판에 서 있다. 맨살 드러내고 당당히 서 있으니 오히려 속이 여문 속내다. 긴 세월 마음 한 구석에 자라는 갈증을 채워준 것은 길가에 혼자 핀 들꽃이었고, 나무 향기 끌어안고 곁에 온 바람이었고, 혼자 걸어보는 오솔길에 깃 세우고 서있는 풀잎이었다. 자연은 언제나 온통 시 밭이 되었다. 나를 따듯한 온기로 감싸주었고, 나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해준 자연의 세계를 시를 통해 도란도란 이야기 하고 싶었다. 창문을 똑똑 두드리며 마음의 불 지피고 싶었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심장의 불꽃이 하늘을 날고 있다. 계절이 배턴을 쥐고 이어달리기 하듯 나도 이어달리기 하며 이 부끄럽지만 소중한 결과물을 탄생시켰다. 이끌어주시고, 용기 주시고, 기름 발라주시고, 내 속의 미세한 소리를 울림으로 만들어 주신 선생님과 주변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박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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