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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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근/시(2018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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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는 도둑이다 외 4편
외투라도 걸쳐야 집을 나서는 당신처럼 나를 걸쳐야 미래로 떠나는 자전거, 등은 있지만 심장이 없다. 심장이 있는 물체가 탔을 때 자전거는 기억을 갖는다. 한 때 나를 땅바닥에 엎으며 균형을 바로잡는 법을 알려준 것은 자전거다. 흉터가 그의 놀이터다. 상처를 주며 나를 내동댕이쳤던 둥근 바퀴, 유년의 내 자존심을 엎었다. 자전거는 함께 뒹굴었을 때 넘어지는 기술을 몸에서 빼내갔다. 피 흘리는 나보다 피가 뭔지도 모르는 그의 안부가 더 궁금해 심장이 뛰었던 그날 이후 넘어지는 방법을 도둑맞았다. 자전거는 나의 넘어지는 기술을 훔쳐간 내 유년시절 최고의 도둑이었다.
물미도로에서
사랑은 푸른 벼랑 끝의 곡예운전이다. 유월 해변의 드라이브는 모르는 여인의 허리띠를 푸는 일, 남해는 가파른 리아스식 체위를 수시로 바꾸고, 물미도로는 비너스의 허리 어디쯤일까? 아홉 등 아홉 고개는 수만 가지의 봉긋한 비밀을 숨기고 있다. 잘록한 허리가 숨통을 죄어올 때마다 천 길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는 드라이브 코스, 여기서는 차도 사람도 숨을 고르고 가야 한다.
이 길 어느 숨겨진 모서리쯤에서 나는 나를 몰고 온 고삐를 슬쩍 풀어 놓았다.
고삐로부터 놓여난 한 마리 짐승이 숲을 흔들며 스며들었다.
순간 바다가 쏟아질듯 몸을 기우뚱거리고
은밀히 길든 바람의
축축한 교성이 뼈 속까지 뜯어 먹는 것 같다.
카메라 존의 시야 속으로 나긋나긋한 여인의 풀향기가
삼투압처럼 저를 빠져나와 내 몸에 흘러든다.
그 향기 빠져나갈 반 시간 동안
나를 내어주고 또 돌려받는다.
그날 밤 꿈속에서
기우뚱거리는 바다가 내내 나를 운전하고 있었다.
수선화 필 때
밥풀 같은 꽃을 보았네
대문 앞에 꽃샘추위보다 일찍 봄꽃을 심은 엄니
산허리 어디쯤에서 데려온 아이들일까
“인생의 봄도 빨리 와야 좋은 법이여”
엄니의 봄은 일찍 가버렸네
올해도 숟가락만 한 꽃 한 상
집 앞에 재빨리 차려 놓았네
모진 겨울 견디느라 뼈만 남은
자두나무 옆에서
나는 돌아가신 엄마 몰래 밥알 같은 추억을 꼭꼭 씹어보네
꽃 없는 한 계절이 생중계 되네
한나절 봄볕을 떠먹는
누룽지 같은 꽃을 보았는데
눈동자 맑은, 꽃 몇 송이 피었을 뿐인데
시골집 연가
참새 한 마리 앵두나무 그늘에서 졸고 있네
정오의 태양은 방패연처럼 높게 떠서 보초를 서고
참새의 눈은 연줄처럼 풀어지네
바람 몇 점 논바닥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네
나는 참새 몰래 사진을 찍네
시간은 오전에서 오후로 몸을 뒤척이는데
깊은 잠에 빠진 새 몰래
나는 세월의 얼레를 돌려보네
되감겨오는 것은 시간뿐인데
눈 감으면 꼬리연도 보이고 새총도 보이네
어린 시절이 옷을 벗고 있네
꽃피는 섬
강은 바다의 먹잇감이라지. 강의 끄트머리엔 언제나 바다의 입이 있다지. 그래서 강을 먹고 시퍼렇게 살아서 저렇게 출렁거리는 것이라지. 바다에 붙어사는 섬은 사람과 배를 삼켰다가 뱉어낸다지. 달콤한 먹잇감은 계절마다 꽃으로 차린 진수성찬, 동백꽃, 매화, 개나리, 벚꽃, 유채, 해바라기, 해당화, 코스모스, 해국, 용담, 입맛도 다양하지. 남해섬은 옛 이름이 화전花田이라지. 제 이름을 먹어치우고 비빔밥, 회덮밥, 멸치쌈밥, 꽃바람 난 아줌마와 버스까지 차떼기로 먹어치운다지. 먹잇감이 되고 싶어 사람들은 꽃피는 섬으로 가지.
심사평
서정의 본령本領에 충실한 역량과 자세 돋보여
왜, 시를 쓰는가? 세계의 이면을 계시啓示하기 위해서, 현실을 개조 변혁하기 위해서, 인생의 무상함을 가치로 전환하기 위해서. 물론 그렇기 위해 쓰이는 시들도 있다. 하지만 모든 시가 꼭 그래야 하거나 그런 하등의 목적에 종속되어 재단될 필요는 없다. 본질적인 이유도 없다. 개인이 필요로 하는 시는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고, 서정시의 본령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지극히 주관적이고 자기지향을 강한 특성으로 드러낸다. 시는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행할 수가 없다. 다만 우리를 위로하고, 감동하게 하고, 감흥에 젖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김현근 시인의 짧은 시행과 더불어 시상의 전개에 있어서도 탄탄한 기본 역량을 보여준다. 인과因果와 논리로 단단하게 결속해 시어와 시행 사이를 빈틈없이 메워 질식케 하는 대신, 적절한 틈과 사이를 남겨 우리의 눈과 호흡이 스스로 빠져들게 한다. 가령, “산허리 어디쯤에서 데려온 아이들일까/“인생의 봄도 빨리 와야 좋은 법이여”/엄니의 봄은 일찍 가버렸네/올해도 숟가락만 한 꽃 한 상/집 앞에 재빨리 차려 놓았네/모진 겨울 견디느라 뼈만 남은/자두나무 옆에서/나는 돌아가신 엄마 몰래 밥알 같은 추억을 꼭꼭 씹어보네”(「수선화 필 때」)와 같은 작품은 시적 서사의 전개보다 입 안에서 구르는 리듬감이 먼저 ‘봄’을 느끼게 해준다. 반면에 「시골집 연가」에서는 “참새 한 마리 앵두나무 그늘에서 졸고 있네/정오의 태양은 방패연처럼 높게 떠서 보초를 서고/참새의 눈은 연줄처럼 풀어지네/바람 몇 점 논바닥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네”처럼 우리의 시선이 시행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화자와 같은 감흥에 젖어들 수 있게 한다. 일단, 그렇게 믿으며 작은 ‘장場’을 연다. 더 큰 성취를 기원하며./백인덕(글) 장종권 남태식
당선소감
바다를 찾았다. 말을 건넸다. 이제 나도 시인이다. 계간 《리토피아》로부터 당선소식이 당도한 때는, 북에서 온 단풍이 남쪽 바닷가를 서성이며 누울 자리를 찾는 늦가을이었다.
10년 가까이 시를 습작해오는 동안 시상이 떠오르면 곧장 바다에 달려가곤 했다. 늘 빈손이었던 나는 이번에는 기쁜 소식을 싸들고 그를 찾았지만 흔한 파도 꽃다발 하나 받지 못했다. 오히려 바다는 물안개를 걷고 푸른 등을 더 길게 늘어뜨려서 반호의 수평선을 보여주었다. “내 등 너머를 봐. 보이지 않는 곳에 태평양이 있어, 바다라고 다 같은 바다가 아니야. 나는 작은 바다, 너는 피라미 시인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고는 밀물로 있다가 썰물로 돌아누웠다.
정신이 반짝, 들었습니다. 바다는 내게 진실을 알려주었습니다. 나는 피라미 시인이 맞습니다. 부족한 시를 선選하여 시인이란 명찰을 달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제가 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신 글벗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또한 깊고 넓은 사유의 바다에 닿는 그 날까지 사색의 노를 중단 없이 저어 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김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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