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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길(시/2020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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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154회 작성일 20-09-04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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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길0.jpg


이강길 작품

동심원

 

 

바람에 뒷통수를 슬쩍 내준 인경 소리 산모퉁이를 넘어갔다가 되돌아온다. 발걸음이 이미 풀려진 사내 산을 내려와 늦은 점심을 먹는다. 기억력에 좋다는 술잔을 들 때마다 손톱 속이 희멀건해지고 닳은 지문의 중심이 모호해진다.

 

오늘도 점심식사 후 약을 털어 넣는다. 여섯 알이 든 비닐 약봉지 귀퉁이가 찢겨져나간다. 성인철 씨는 요즘 비밀번호 여섯 자리의 덫에 자주 걸린다.(세상에 무슨 비밀번호는 그리 많은지) 얼마 전 인터넷뱅킹 암호도 끝내 넘질 못했다. 기억의 언저리에서 무수히 사라진 영어소문자, 숫자, 특수문자들…….

   

고라니 한 마리 덫에 걸려 허우적거린다. 그 곁에 달팽이 한 마리 산 중턱을 넘지 못하고 계속 기우뚱거리는 날, 인터넷포털사이트에서는 ‘KTX열차, 까치집으로 인한 정전으로 멈춰 서라는 뉴스가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른다.

 

 

 

 

월식

 

 

그러니까 바퀴벌레 한 마리가 갑자기 튀어 나오지 뭐야. 시크라멘 화분을 들고 욕실로 향하던 밤이었어. 저면관수 중인 물을 버리기 위해 화분을 들어올린 순간, 수직 상승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손목 위에서 쭈루루 미끌리더니 욕실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아니겠어. 나는 한밤중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잠시 주춤거리다 거의 반사적으로 발을 내뻗었지. 그리고 탭댄스선수처럼 발바닥을 이리저리 놀렸어. 이런 나를 비웃듯 반질반질한 즉석무대를 돌며 왈츠를 즐기는 무단침입자. 나는 머릿속이 점점 하얘졌고 급기야 샤워꼭지를 틀어 그를 지하감옥으로 보내고 말았지. 이를 지켜보던 붉은 꽃은 고개를 천천히 돌렸어.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어른거리는 그림자 하나를 오랫동안 바라봐야 했지. 그렇게 밤과 아침의 간극이 좁혀지고 있었어.

 

 

 

 

 

설날 아침

 

 

설날 아침에 홀로 산에 오른다.

밤늦게 귀향한 자식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온몸이 쑤시다는 아내 대신 까치가 따라나선다.

겨우내 얼었던 등산로가 조금씩 하혈을 시작하고,

자작나무 가지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데,

식구들 다 모인 까치집에서도 한 차례 소동이 인다.

 

 

 

 

 

봄볕 내리는 날

 

 

정읍시외버스터미널 매표창구에서 버스표를 끊어 나오는데,

먼지 쌓인 간판 약속다방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빠끔히 밀었으나

문은 안 열리고 빛바랜 추억만 열린다.

 

전주행 직행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는다.

낡은 운전석 바로 위에 매직으로 거칠게 쓴 글씨

껌 씹는 소리를 내지 마시오

그 뒤 몸빼 입은 아줌마가 껌을 쩍쩍 씹다가 코를 드르릉 곤다.

 

전주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린다.

주인이 꾸벅꾸벅 조는 김밥집에 들러

김밥 한 줄 먹고 나오다가 가게 앞을 지나는데

만화 세 시간 보는데 2,000

안내문에 끌려 들어가 볼까 하다가 그냥 돌아선다.

 

 

 

 

 

어떤 피의자

 

 

일주일 내내 술 마시는 사람이 소환당한다. 그는 침까지 튀겨가며 억울함을 주장한다. 그럴수록 조사관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그를 포박해 목구멍에 하얀 액체를 강제로 밀어 넣는다. 피의자는 목이 부풀어 오른 후 속을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한다.

 

흰색 가운을 입은 조사관이 피의자를 탁자 위에 누인다. 잔뜩 웅크리게 한 후 입에 반창고를 붙이고 호스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혀를 낼름거리며 기어가는 뱀 한 마리가 비집고 들어갈 때마다 몸이 뒤틀린다. 비명이 왈칵 쏟아진다 욱~~~

 

잠시 후 조사관이 내뱉는 말은 혐의사실이 경미해 이번엔 풀어주겠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든 재소환할 수 있으며 거소도 제한됩니다’. 밖으로 나온 혼미한 상태의 피의자가 휴대전화를 꺼내든다. ‘변호사님, 글쎄 바보들이지 뭡니까, 내가 진범인 줄 정말 모르나 봐요, 그냥 풀어주지 뭐에요

 

 

 

 

 

수상소감


2002년 가을로 기억됩니다. 개성공단 사업착수를 위한 준비단계로써 남북 당국자가 관련 법규 및 투자환경 확보를 위해 머리를 맞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마흔 고개에 막 들어선 저는 묘향산 입구 계곡에서 주변 관광호텔에서 출장 나온 김순이 씨 손을 잡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남남북녀가 서로 수줍게 바라보며 동요 '반달'을 불렀던 것입니다. 개성공단을 위한 첫걸음을 뗄 때의 한 장면입니다.
이번 리토피아 신인상 당선은 다소 멋쩍고 수줍은 일로 다가옵니다. 다니던 회사에서 정년을 앞둔 나이에, 작년에 첫 시집까지 낸 상황에서 조금은 쑥스럽습니다.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신인다운 면모를 찾아보기 힘든 저 자신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직도 설익은 제 작품들이 그간 리토피아가 쌓아놓은 찬란한 금자탑에 누가 될까 봐 걱정도 됩니다
그럼에도 부족한 사람을 리토피아 동산에 있게 해주신 심사위원님, 그리고 장종권 주간님을 비롯한 리토피아 측에 머리 숙여 감사 드립니다.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겠습니다. 기대에 부응하는 시심을 길어올리겠습니다. 여러 리토피아 문우님들께 많이 배우고, 교류하며 더 먼곳에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밤 제 창가에 국화 한 송이가 수줍게 솟아오를 듯합니다. 밤 늦게까지 뒤란이 소란스러울 듯합니다./이강길



심사평

시심詩心에 맡겨 무한 상상想像의 ‘돛’을 펼치길


기록記錄의 한 양식으로서 ‘시’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비록 대상을 완벽하게 포착할 수는 있을지라도 구체적인 세부까지를 담아내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역逆으로 세부를 치밀하게 드러내기 위해 대상 전체를 사상捨相할 수 있는 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어느 방향이든 이런 정의가 성립하는 기초는 이른바 ‘언어의 경제성’에 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경제성이란 ‘최소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창출하는 태도에 붙는 수식이다. 따라서 짧게 쓴다는 것은 내용의 빈약이나 사용 어휘의 제한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쓰인 어휘들이 고도의 상징성을 내포한다는 것과 그 어휘들마저 축약되어 행과 연이 함축적 의미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이강길 시인은 제목에서부터 개별 작품의 주제를 함축하는 어휘로 고도의 상징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시에 대한 안목과 애정의 깊이를 반증反證한다. 이번에 접한 작품들 가운데 「동심원」, 「월식」, 「설날 아침에」처럼 그 자체로 이미 우리 시사詩史에서 풍부한 활용의 예를 가진 것들뿐만 아니라 「봄볕 내리는 날」, 「어떤 피의자」 등도 ‘봄날’과 ‘피의자’가 오직 시인만의 정서와 그 표현으로 형상화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나름의 시적 가치를 형성한다.
구체적으로 그 양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심원’은 드러난 시각적 형상만 보자면 지속적으로 퍼져나가는 역동성을 포착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같은 표면 위에서 반복되는 행위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상과 같은 ‘덫’의 의미를 함축하기도 한다. 이강길 시인은 후자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채택하여 ‘사내(성인철)’의 일상과 바람이 늘 제자리걸음이 되고 마는 실상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1연에서 사내는 발걸음이 이미 풀린 상태로 “산을 내려와 늦은 점심을 먹는다. 기억력에 좋다는 술잔을 들”지만 그때마다 오히려 각인되는 것은 희멀건 해진 ‘손톱 속’과 중심이 모호해진 ‘지문’뿐이다. 즉 산행이나 반주(술잔)가 다 무효임이 드러나고, 2연에서 사내는 보다 현실적으로 ‘여섯 알’들이 약봉지를 뜯지만, 실상은 “요즘 비밀번호 여섯 자리의 덫에 자주 걸”리고 만다. 이 작품이 여기서 멈추고 말았다면, 기억력이 쇠퇴하는 현대인의 전형적인 한 모습을 충실하게 그려내는 데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3연에서 시인은 덫에 걸린 ‘고라니’와 기어이 산 중턱을 넘지 못하는 ‘달팽이’, 게다가 ‘까치집’에 멈춰 선 ‘KTX’를 등장시켜 한 사내의 기록을 그 자신의 문제에서 세계와의 관련으로까지 자연스럽게 확장한다.
이런 확장이 기록으로서의 시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나아가 나름의 시적 가치를 형성한다. 시인은 주변을 관찰하는 특유의 눈을 더욱 날카롭고 넓게 다듬어 거기에 무한 상상의 ‘돛’을 세우길 바란다. 돛은 멀리서 나를 알아보게 하는 표지이며 동시에 내가 먼 곳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창窓이기도 하다./장종권 백인덕 남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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