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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현/시(2021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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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언제 와
전화할 때마다 여보, 라고 부르는 순이 할머니.
여보 언제 와, 를 연발하는 날에는 바람이 울렁인다.
바람 소리가 여보, 를 따라 하며 나긋해진다.
바람소리도 꽃이 되어 여보, 여보, 한다.
하숙생에게 따뜻한 고봉밥을 주시던 순이 할머니.
넘어져 진통제 맞은 날, 잊은 남편 전화번호를 찾았다.
할머니 전화에 옛 하숙생은 나긋한 남편이 된다.
할머니가 여보, 꽃을 피우면 하숙생은 네, 나비가 된다.
기일
살살이꽃 휘파람 불면 안덕골에 저녁볕이 발걸음 멈췄지.
감나무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장독 그림자가 고갤 내밀고.
우암산 볼 붉어지면 구름에다 얼굴을 파묻곤 했단 말이야.
그날 시월 첫날밤 누이가 신방 차린 문지방이 야속하다고.
옆집 상수형 별빛을 끌어안고서 가슴을 흠뻑 적셔놓았어.
가을밤 주름진 달무리, 문틈으로 아버지 이야기 들려주네.
와락, 능소화
여름비 기척도 없이 꽃잎에 몰려들자 입술이 바르르,
젖은 잎 늘어트리며 담장을 타고가던 손들이 화들짝,
급기야 후두둑 소리에 놀라 숨어들어온 꿀벌이 와락,
장대비가 두드릴 때마다 능소화 꽃송이 안에서 앵앵,
고래소리
아버지 어린 시절 사셨다는 소백산맥 끝자락 청해리.
까마득한 할매봉우리 아래 금빛 평야가 너울거릴 때,
할아버지 민물 새우잡이도 잊고 강물 따라 떠나셨다.
강변에 피자집 생기고 푸른다방 딸이 제빵소 차린 날,
숭어가 할아버지 갈대배잎 하나 물고 청해리를 찾아왔다.
아버지 강둑에 서시면 먼 바다에서 고래소리 들린단다.
어머니 굽은 손가락
어머니 굽은 열 손가락이 거친 숨을 쉽니다.
사람 없는 언덕길을 땀 뻘뻘 흘리며 갑니다.
별빛이 쏟아지자 검버섯 손등에 꽃이 핍니다.
굽어 터진 호미손에 별천지꽃이 눈을 뜹니다.
어머니 땀방울이 별꽃에 소금물을 뿌립니다.
별꽃이든 고사리꽃이든 어머니 손은 꽃입니다.
심사평
시의 ‘멋’과 ‘가치’에 대한 확장적 인식 엿보여
길고 굵직한 작품, 훅은 현학적이거나 비의적秘義的인 어휘가 다수 포함된 작품들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시는 생의 깊은 원리를 탐색하는 날카로운 도구이기도 하지만, 생활의 곳곳에서 치고 들어오는 숱한 적의敵意를 무력화하는 헛헛한 가락이 되기도 한다. 우리 고전에 ‘공무도하가’만 있는 게 아니고 ‘처용가’가 높은 가치로 인정받는 게 바로 그런 이유다.
송창현 시인은 가장 원형에 가까운 대상을 시적 계기로 해서 보편적인 정서를 그려낸다. 「고래소리」의 ‘아버지-할아버지’를 통해서 ‘청해리’라는 지명과 그리움을 풀어내고, 「어머니 굽은 손가락」을 통해서 ‘어머니’와 ‘모성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표현한다. 이뿐만 아니라, 「기일」에서는 시적 화자와 ‘누이’, ‘상수형’, ‘아버지’ 등이 등장하는 일화를 통해 유년의 한때와 그 시점의 일종의 설렘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인의 가장 큰 장점은 이 익숙한 대상들을 통해 정감을 풀어내는 방식에 있다. 어떤 해학의 맹아萌芽가 보이는데, 「여보, 언제 와」라는 작품에 시인의 솜씨가 집약되어 있다. ‘치매’라는 무거운 병증을 ‘꽃과 나비’라는 호응 관계로 치환하는 솜씨는 시인이 지향해야 할 바를 암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기법을 더 폭넓고 세련되게 다듬어 시의 ‘멋’을 추구하는 나름의 방향을 정립해가길 바라마지 않는다./장종권 남태식 백인덕(글)
정신이 쉬지 않으면 몸은 절로 활기 차
다가온 봄기운이 개나리 진달래 만발한 꽃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가 겨우내 잠자던 개구리를 깨웁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을 때 영어책을 소리 내어 읽는 노인을 만났습니다. 연세가 어찌 되시는데 그리 정정하시게 영어책을 읽으시냐 여쭈어봤습니다. 88세시라는 노인께서 친절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정신이 쉬지 않으면 몸은 절로 활기차게 됩니다. 배우고 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시와 더불어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재미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생각할 때마다 밤을 낮처럼 보냅니다.
소중한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시야를 트이게 해 주신 백인덕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일일이 열거하지 못하지만 지금까지 오도록 정진하게 해 주신 선배님들과 소중한 분들께 감사드립니다./송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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