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 신인상
- 수상자
- 투고작
남태식-제10호 '이 시인을 다시 본다'
페이지 정보

본문

남태식-제10호 ' 이 시인을 다시 본다' 시인
1960년 서울생
울진에서 성장
2000년 <세기문학> 신인상
2003년 리토피아 '이 시인을 다시 본다'로 재조명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당선작품>
안개가 나를 밀어올린다 외 5편
저 때때로 추락하는 나를 밀어올리는 건 땅이 아니다 산이 하늘이 아니다 날개 없는 안개를 강이 가볍게 밀어올리듯 안개가 또 나를 밀어올린다 한 언덕을 넘어서면 다시 한 언덕 그 숨찬 언덕을 넘어서는 건 너와 나를 매몰차게 가르는 저 곧은 선의 힘이 아니다 잠 속에서 허둥대며 절뚝일 때마다 왁자하게 몰려오는 저 잿빛 바다다 저 잠의 숲이다
빵과 개미와 나
끈으로 꼭꼭 묶어 비닐봉지 안에
숨 못 쉬도록 가두어놓거나
써늘한 냉장고에 숨겨두던 빵을
먹던 대로 식탁 위에 두고 나갔더니
개미가 와서 하루종일 그 빵을 먹네
저녁에 돌아와 빵을 먹는 개미가 놀라지 않도록
가만가만 과도로 빵을 자르니
이렇게도 미세한 칼의 떨림도
개미에게 닿는가 바삐바삐 자리를 뜨네
개미들 자리 다 뜨길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내가 그 빵을 먹네
맛있네 나는 빵을 개미에게 빼앗긴 게 아니네
나 또한 개미의 빵을 빼앗지 않았네
내가 먹던 빵을 개미가 먹듯이
개미가 먹던 빵을 내가 먹었네
영덕에 복사꽃이 한창이다
봄바람 봄비 봄햇살의 유세에
꽃들이 화들짝
산지사방 한데로 나들이 나앉았다
졸음에 빠진 내 눈이 깜짝 틘다
틔는 눈에 와그르르 꽃이 핀다
가슴이 공처럼 꽃밭으로 튀어
운전대가 자꾸만 헛돈다
그만 운전대를 놓아버릴까
그 서녘바다 동녘바다로
그 서녘바다 동녘바다로 오네 음습한 어둠의 잠 가슴에 감추고
도둑고양이마냥 게걸스레 침
흘리며 돈다발 다발 바람에 뿌리며 바람
뒤에 숨어
안개
속에 숨어 눈알 빛내며 슬금슬금 오네 길 없는 산에 길을 내며 무인단속기를 피해 갓길로 길바닥에 배 바짝 붙이고 슬몃슬몃 기어서 오네 펄럭이는
붉은 검은 깃발들
펄떡이는
푸른 하얀 가슴들
음침한 눈웃음으로 실실
온갖 탁상공론과 개똥철학으로 설을 풀며
오네 이간질하며
오네 절뚝이며
오네 스미네
슬금
지나치네 적시네
드디어 그 서녘바다 동녘바다를 덮치네 그날부터
해는
동시에 뜨고지네 동시에 뜨고지고 동시에 뜨고지고 동시에
뜨지를 않네
동시에
지지를 않네 마침내
그 바다에
가뭇없이 해 사라지네 해 사라져 허공 중에 빛도 소리도 없는 한밤만 차며 흐르네 잠이
꿈이 사라지네
뜬구름 위에서
보셔요 저기 뜬구름 위에서 시들이 두팔 벌려 옆으로 나란히를 하고 있어요 보셔요 저기 뜬구름 위에서 시들이 음악에 맞춰 다 함께 국민체조를 하고 있어요 팔도 함께 다리도 함께 눈도 함께 구호도 함께
똑같이 똑같이 똑같이
보셔요 유행이라고는 감기밖에 탈 줄 모르는 나도 저기 뜬구름을 타고 옆으로
나란히 나란히 나란히
어머나 어쩌나 어느새
거수기여 영원하라
손을 들었다 누가 손을 들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손을 드는 것에
아주 익숙해진 나는 자진해서
손을 들었다 우리의 영원한 우방
미국은 구세주다 성조기여 영원하라
너무나 당당하게 현업실까지 들어와
서명용지를 내미는 당당한 그 사람
앞에서 미순이 효선이 추모 촛불
시위 반대 서명에 당연히 손을 들었다
도장의 이름도 선명하게 손을
떨지도 않고 가슴에 생채기 하나
내지도 않고 얼굴에 함박웃음까지
지으며 도장을 찍었다 그리하여 나는
국익을 위하여 개인의 사상을 제대로
국익을 위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제대로
처분한 친미사대주의자가 되었다
얼마나 현명한가 미순아 효선아
이라크를 침략한 미국 앞에서 이제
동맹의 의리를 지키도록 한 나의
선택은 얼마나 탁월한가 덕택에
쏟아질 전리품의 실리를 보라 손을
떨지도 가슴에 생채기 하나 내지도
않고 자진해서 익숙한 너무나 익숙한
손을 들었다 도장을 찍었다
…………………… ◆ ……………………
■ 나의 시 쓰기
귀걸이를 하고 싶다. 젊은 아이들마냥 머리에 노랗거나 붉거나 흰 물을 들이고 싶다. 배꼽을 드러낸 소매 없는 셔츠를 입고 씽씽 세상을 달리고 싶다. 꺼칠한 피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하는 기초화장에 색조화장까지 화사하게 하고 거리를 활보하고 싶다.
40이면 불혹의 나이라고 했던가. 나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온갖 유혹을 스스로에게 한다. 어쩌겠는가, 나이에 걸맞지 않아도 젊음의 자유분방한 모습들이 너무나너무나 아름다워 보이니.
그러나 어머나, 또 어쩌나. 내가 나 스스로에게 하는 유혹은 늘 유혹으로 끝난다. 나는 세상의 관습과 대부분의 내 나이를 가진 사람들의 상식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그저 꿈만 꾸면서 도대체 그 꿈을 향해 다가가지 못하는, 내가 현재 가졌다고 하는 온갖 것들 중 한 가지도 버리지 못하는 소시민일 뿐이다.
하여 내 시는 어정쩡하다. 어정쩡한 내 시를 보라고 보라고 세상을 향해 던지는 나는 또 뻔뻔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머나, 또 어쩌나. 나는 도대체 시 쓰기를 멈출 수가 없다.
■ 추천의 말
진폭의 크기와 유연성
― 남태식 시
시상을 피워 올리는 것은 선이 분명한 사상이나 명료한 이론 같은 것이 아니다. 강이 안개를 밀어올리듯 우리의 생명의 강이 밀어올리는 꿈 같은 것, 안개 같은 것이다. [안개가 나를 밀어올린다] [뜬구름 위에서] 등의 작품에는 분명치 않지만 우리를 뜨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이런 것 때문에 시의 진폭이 크면서도 유연하다. 꿈과 현실 같은 양끝을 잇는 다리가 논리가 아니라 자기 속에 배양된 어떤 리듬 같은 것 같다. 현실 갈등을 아리게 그리고 있는 [그 저녁바다 동녘바다로] 같은 작품과 복사꽃 만발한 꽃밭에 취해 '운전대가 헛돌'만큼 나를 무아(無我)케 하는 [영덕에 복사꽃이 한창이다]라든가, '내가 먹던 빵을 개미가 먹듯/개미가 먹던 빵을 내가 먹는' [빵과 개미와 나] 같은 작품은 내용과 톤이 정반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안개 같은 무정형의 어떤 리듬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시의 진폭의 크기, 유연성은 시를 강하게 부드럽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동호 시인>
- 이전글박정규-제11호 신인상(시) 03.07.25
- 다음글서동인-제8호 신인상(시) 03.07.2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