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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명/시(2021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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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섬 섬, 그 섬들은
오늘같이 주룩주룩
비 내리고 대숲 바람 부는 날
울 아부지 집 뒤란에 숨겨둔
도가지 소주 한 바가지로
얼큰해지시면
줄줄이 줄줄이로 읇어 주던
사량도 수우도 두미도 남해
욕지도 금오도 백도 광도
선축도 초도 거문도
청산도 여서도 소안도 보길도
추자도 관매도 거차군도
가거도 만재도 상태도 하태도
흑산도 홍도 대둔도
그 먼 먼 섬들의 길에서
젊음의 외줄 낚시 드리우며
푹풍우 이겨내고 살아온 날들
휠체어 앉아서도 저 멀리 미조 바다
"갈 수 있다 아이가"
"백도에 지금쯤 뽈래기가 피었을낀데"
울 아부지 하늘나라에서도
머나먼 섬 섬 섬, 그 섬들을
다 외우시고 계실까.
심수도
삼천포 부두에서
물살 가르며 건너가는 뱃길엔
목섬, 학섬, 벙거지섬, 씨앗섬, 장구섬, 솔섬, 아두섬
외로이 품은 전설 속 이야기들
모두, 하나같이 깊고 깊어도
눈길만 주고받고 말 없는 미소만 가득
달리는 배 위에선 바람길로
멀어지는 육지보다, 섬
심수도 눈앞에 펼쳐 떠오르고
역사에 잊힌 목소리 진(陣) 끝엔
조선 수군의 흔적 이름으로만 남아
섬사람들 기억 속 묻힌 일들
매립된 포구엔 천연의 바위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아득한 꿈길
기록으로만 남겨진 심수도 수군주둔지
옛 조상들 팔도에서 모여
힘차게 노 저어가던 소맹선, 대맹선
엇어라 데리라
샛바람 불어와도 대구머리 앞
탕건바위 거친 물살 지나서갔어라
오늘, 하루는 고구마밭 사이 돋아나는
야들한 고사리 새순 꺾는 허리 굽은
내 어머니들의 주름진 얼굴 따라
거친 손길 멈출 수 없는
마음 깊은 물결의 한 울림.
달팽이 달린다
언제이런가 그게
등 뒤로 높게 솟아오른
얇디얇은
누런 패각의 골짜기 아래
무게의 중심을 놓아두고
웅크리듯 누워본다는 것이
모두 가지고 싶은
가로세로 위아래 막힌
새하얀 페인트 발린
황금빛 대문 사이로
반짝이는 불빛 그려지는
그런 아담한 꿈의 쉼터
한 땀방울 진액 아래
두 촉수 치켜세우고
기다려보는 달팽이 한 마리
느릿하게도 달린다.
달리는 일만 남았다.
하나의 집을 찾아서
바닷속 푸른 사슴뿔의 노래
너는
깊음의 샘 가운데서 태어나
푸른 바다를 하늘 삼고
거친 모래밭 광야
달려오는 파도의 몸짓에
흔들리듯 바로 서가며
살아옴의 한세상, 검은 물길엔
작은 그림자도 없는 희디흰
무채색 물결로 솟아나는
녹색 마디 마디로 맺힌 사연
어디에도 하소연하지 못 하는
뿌리박힌 절멸의 꿈
십삼 년* 가르침을 펼쳤어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마음속 맺힌 붉은 핏빛 하소연을
언제나 비켜만 갈 수 없는 일
이제 세상의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것이 바위에 새겨진
글의 빛나는 소리로 울릴 것이다
기다려라, 그때를
우리의 가슴에 우렁찬 함성
소리치며 다가올 푸른 사슴뿔
돋아나는 그 시간을.
용궁시장
어머니 갯바람에 익은
들큰한 신수도 시금치
한 아름 밀고 가는 곳.
오이소 사이소
앤간이 뒤직이고
많이 줄낍니다 고마 사가삐리소
섬초보다 더 고소한
귓가를 향긋하게 하는
내 어머니들 사투리 아롱거리는
신섬, 딱섬, 늑도, 마도, 초양도, 신수도
한가득 품고 온 가슴속 이야기
두런두런 풀어놓기 바쁜 곳
용왕님은 못 뵈어도
주름 자글자글한 얼굴들엔
지나온 세월 웃음, 꽃이 피고
오룡개 당산 건너, 건너 옆에 집에
아 그 대밭집, 손자 봤다카더라
그래예, 아이구마 잘됐심다,
시금치 사가이소
보이소, 이 뿌링개 뺄강거
바닷바람 묵어서 참 맛납미다.
용궁시장 질척한 바닥엔
섬에서 뭍으로
뭍에서 섬으로 이어 녹아가는 세월,
모두 태어난 곳 풀어 이고들 간다.
심사평
애향의 열정과 토착어의 탐색과 활용에 대한 기대감
한 현상으로서 장년 이상의 세대에게서 글쓰기, 특히 시에 대한 열정이 경향 각지를 막론하고 분출하고 또 성황을 이루는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지 현상의 문제점이나 여파에 대해서가 아니다. 대체로 한 세대 전쯤에는 이른바 ‘문사철文史哲’에 대한 지향이 강했다. 이순耳順이 지나면서 후 세대에게 ‘지혜’를 들려주어야 한다는 전통에 입각한 사유인데 이를 위해 먼저 글쓰기, 특히 시 짓기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 이후는 소위 ‘기록記錄’으로써 시작詩作의 가능성과 효과에 대한 광범위한 인식 전환이 있었다. 어떤 구체적인 목표와 더불어 순간의 정서적 추이推移까지 담아낼 수 있는 시의 양식적 특징이 수많은 개인 기록자, 또는 시인 지망생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김학명 시인은 남다른 ‘애향심’을 보여주었다. 투고된 작품 대다수가 시인의 고향의 어제와 오늘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비전을 결합하여 존재의 근거로서의 ‘고향’과 실존을 투사할 장場으로써 미래의 낙원, 혹은 자연적인 공동체를 겨냥하는 열정을 보여준다. 「심수도」는 그 대표작으로 행정명인 ‘신수도’로 바뀌기 이전의 섬을 노래한다. “삼천포 부두에서/물살 가르며 건너가는 뱃길엔/목섬, 학섬, 벙거지섬, 씨앗섬, 장구섬, 솔섬, 아두섬/외로이 품은 전설 속 이야기들/모두, 하나같이 깊고 깊어도/눈길만 주고받고 말 없는 미소만 가득”한 것은 심수도나 신수도 매 한 가지다. 즉 섬은 이름이 아니라 거기 터 잡은 사람들에 의해 전통이 유지되고 형질이 변하는 것일 뿐이다. 시인의 또 다른 시도는 지역의 토착어를 생생한 실감으로 집어, 집중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자신의 시작 방향과 목적의 당위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사실 표준어 교육과 미디어의 위세에 의해 지방 토착어가 다 사라져가는 마당에 이러한 방향은 시도 자체로 큰 의의가 있다.
한 가지 사족처럼 지적하고 싶은 점은 개인의 열정이 보편성을 갖기 위해서는 시적 완성도가 더 높아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토착어의 활용은 ‘구어(입말)’에서 끝나지 않고 ‘문어(시어)’로 부단히 질적 변화를 꾀해야만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김학명 시인의 미래에 대한 조언이고 지금 보여준 시 의식과 시작 방향에 큰 기대를 걸며 앞날에 박수를 보낸다./장종권 남태식 백인덕
소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니도 꽃을 좋아하나.
내도 꽃 좋아한다 아이가.”
꿈이었지만 선명했습니다.
꽃이 좋다는 아버지를 위해 신수도 올레길 따라 꽃을 심었습니다.
어느새 뻬떼기 뒹굴던 섬에 꽃이 피었고,
제 마음은 시로 가득해졌습니다.
서정시 쓰기 참 힘든 시대입니다만
아버지의 한마디 덕에 지금도 시를 씁니다.
섬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평생 바닷물길 가르며 고기잡느라
왕가산 따라 핀 진달래는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살아생전 하시지 못한 꽃 이야기. 꿈속에나마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인의 길은 쓸쓸하다지만 함께해준 가족들이 있었기에
지난 여정에 따뜻한 날이 더 많았습니다.
등단의 기쁨을 온가족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아가 등단의 기회를 주신 리토피아 관계자 여러분께도 깊은 감사함을 전합니다./김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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