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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덕/시(2022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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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덕(시부문)
베란다 물청소 외 4편
베란다에 물을 뿌린다. 연일 40도를 육박하는 찜통더위다. 훅훅 찌는 베란다에 물을 뿌린다. 갑자기 개미들이 난리가 났다. 홍수에 떠내려가며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수몰지구 수해현장이다. 수천 개의 은하계 중, 창백한 푸른 별,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 인천 한 구석, 베란다 개미 한 마리, 동동거리며 자녀문제, 노후문제, 이런저런 생활사에 한시도 편치 않은 이 동동거림. 개미야 빨리 꽃나무 가지 위로 올라 서거라. 물줄기를 줄이며 수도꼭지를 잠근다.
엽란葉蘭
어머니가 주고 가신 엽란葉蘭
연초록 대궁이 쑥쑥 올라온다.
돌보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는 엽란이
고맙고도 미안하다.
꽃은 언제 피었다 지는지
홑잎으로 이파리만 무성한 생리가
딸 고만이 친정집
찬밥으로 컸을 어머니를 닮았다.
한 나절이 넘도록 엽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어머니를 생각한다.
홀로 자식들 뒷바라지에
돌확 같은 날들을
무두질했던 어머니
낡은 소맷부리며
철철이 빛바랜 입성들이
부옇게 나부낀다.
차마 자식들 고생될세라
말년에 입원조차 꺼리시던
가난한 내 어머니
올라오는 연초록이
어머니 속내처럼 포근하다.
“엽란 잘 크고 있냐.”
어디선가 그리운 음성이 들려오고
실바람 속 엽란葉蘭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사마귀
손가락에 사마귀가.생겼다.
씻을 때마다 거슬려
자꾸 손이 간다.
뜯어내면 자라고
또 뜯어내면.자라고.
불어나는 채무처럼
놔둘수록 번져서
뾰조록이 성가시다.
잡아 뜯고 뜯어내며
틈틈이 실랑이를 벌이다.
도포제를 사서 치덕대니
어느 샌가 사라졌다.
빚 청산한 듯
그간의 골칫거리
머리가 가쁜하다.
그러나 웬걸
어딘가 허전하니
기쁨도 줄고
소일거리도 사라져
아쉬운?
있어도 없어도
사마귀가 문제로다.
해독주스
현대인의 성인병에
해독주스가 좋다고
방송에서 떠들어댄다.
몸 속 독기를 뺀다는
디톡스 주스
양배추, 당근, 토마토, 브로콜리를 넣고
말캉말캉 흐늘거릴 때까지
푹푹 삶아 갈면 된단다.
잘 먹어도 부글부글
못 먹어도 부글부글
갈수록 끓는 속
좋아도 네,
싫어도 네
그동안 버텨온 것들이
언제부턴가 더부룩
신호를 보낸다.
돌보지 못하고 방전된 심신心身
끄윽 끅 명치끝에서
쉽사리 떠날 것 같지 않은 손님을
해독주스로 달래본다.
좀머 씨 이야기*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좀머 씨가 소리친다.
그는 맑은 날이나
흐린 날이나
빨간 털모자에 검은 외투를 걸치고
호두나무 지팡이를 내저으며
거리를 쏘다닌다.
그의 아내는 인형을 만든다.
뜬 눈으로 밤을 새는 인형
엄지손톱만한 우박이
소낙비처럼 퍼붓는 날
흠뻑 젖은 좀머 씨가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다.
지나가던 이웃이
창문을 열고 멈춰 서서
“세상에나! 이런 빗속을… 타시오!”
흘러내리는 빗줄기 속에
물기둥이 외친다.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물웅덩이를 첨벙대며
그가 그냥 걸어간다.
밤은 깊어가고
고단한 아내는
인형이 되어 꿈을 꾼다.
오랫동안 갇힌 인형이
그처럼 외친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 『좀머 씨 이야기』.
심사평
일상의 민낯을 문제 삼는 ‘문제 시인’의 출현을 기대하며
현대인의 가장 큰 적은 ‘일상’이다. 우리는 모두 현대인이기에 이 말은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일상성日常性’이라는 의미가 된다. 사실, 하루 내내 노심초사하는 이유는 지구온난화라는 기후위기 때문도 아니고, 날로 대립이 격화하는 국제정세 때문도 아니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국가채무 때문도 아니고, 계층, 지역, 세대 간 봉합하기 어려울 정도로 벌어진 격차 때문도 아니다. 일상을 견디는 개인으로서 우리는 그 일상의 무게와 동시에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때문에 좌절한다. 하루를 무사히 지나왔는데, ‘참 잘 살았다’라고 스스로 다독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함명덕 시인은 유쾌하게 이 일상의 ‘민낯’을 드러내는 수법을 보여준다. 시인은 「베란다 물청소」에서 “훅훅 찌는 베란다에 물을 뿌린다. 갑자기 개미들이 난리가 났다. 홍수에 떠내려가며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수몰지구 수해현장이다. 수천 개의 은하계 중, 창백한 푸른 별,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 인천 한 구석, 베란다 개미 한 마리, 동동거리며 자녀문제, 노후문제, 이런저런 생활사에 한시도 편치 않은 이 동동거림.”을 본다. 찜통더위 탓에 무심코 뿌린 물이 개미 한 마리에게는 존망이 걸린 천재지변이 된다. 여기서 시인은 ‘동동거림’이라는 시어를 적용해 어쨌든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더 큰 차원에는 무관심하면서 자기 앞가림에 집중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일종의 페이소스로 보여준다. 「사마귀」와 「해독주스」도 같은 계열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시인은 「좀머씨 이야기」에서 소재의 일상성을 벗어나 보편적 성찰이라는 측면에까지 다가선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절규는 좀머 씨나 좀머 씨 아내의 외침이 아니라 곧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의 소리가 된다.
시가 생활 현장의 생생한 기록일 수 있다는 점에서 정서적 감응이 아니라 위트와 페이소스, 혹은 현실을 해학적으로 보여주는 방법도 꼭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함명덕 시인이 더 유쾌하고 생생한 언어로 일상의 민낯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데 집중하기를 기대해 본다./장종권, 남태식.
수상소감
삼십여 년을 국어교사로 재직하면서 문학을 가르치고 감상해왔다. 하지만 가르치는 것과 쓰는 것은 달라서 그동안 끄적여 놓은 단문이나 시들을 누구에게 보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퇴직을 하고 집안을 정리하면서 많은 책과 자료들을 버렸다.
그러나 유독 섬에서 보낸 삼년 동안의 일기와 시들은 나의 분신인양 정이 갔다. 심해의 해저에 갇혀 동동거리던 순간들이 떠올라 차마 애틋해서 쉽게 털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추천을 받게 되고 출판까지 하게 되었다.
퇴직과 코로나 블루가 공교롭게 겹치면서 사색과 침묵의 시간이 길어졌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고 여행을 다녔더라면 시를 쓰는 일이 더 지체되었으리라. 다가가면 자꾸만 달아나던 시와의 교제, 시작詩作활동을 이젠 물러서지 않고 맞닥뜨리리라. 어린왕자가 장미꽃을 돌보며 길들이듯 나만의 시선과 감성으로 시를 가꾸며 사귀고 길들이리라.
자그맣고 조용한 아이처럼 이월은 소리 없이 흐른다. 벌써 입춘이 지나고 꽃향기 그윽한 삼월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봄이 오고 있다. 이전에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새로운 봄이 도래하고 있다. 올해는 또 어떤 꽃들이 피고 질는지 한껏 기대된다. 많이 설렌다.
부족한 시들을 추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신 편집위원 선생님과 리토피아에 깊이 감사드린다./황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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