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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서현/소설(2022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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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서현(소설부문)
허깨비
1.
객실 안에 들어서자 이상한 냄새가 난다. 문수는 안을 재빨리 훑어본다. 객실 안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침대 두 개와 컴퓨터 두 대가 놓인 특실은 기역자 모양으로 내부 공간이 넓고 아늑하다. 다른 객실과 마찬가지로 바닥에는 가운이 떨어져 있고 생수병과 음료수 캔, 맥주 캔이 구르고 있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어느 곳이든 퇴실한 객실 문을 열면 후끈한 열기가 덮치기 마련이다. 욕실의 수증기 때문이다. 그 후끈함에는 뭐든 맥을 못 추고 한 순간 감각이 마비된다.
화장실에 들어가 본다. 축축한 바닥에는 수건이 떨어져 있다. 세면대 위에는 칫솔과 면도기가 있고 욕조 안에는 비누와 목욕 타월이 있다. 물을 내리지 않았나 해서 변기를 본다. 그러나 변기 안은 맑은 물만 고여 있을 뿐이다. 문수는 청소를 하다가 문득 이불에 시선을 준다. 퇴실한 객실에 와 보면 이불은 침대 위에 제각각 놓여 있었다. 가지런히 개어져 있고 반듯하게 놓여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 흩어진 모습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거나 접혀져 있고 또 바닥에 떨어져 있기도 했다.
문수는 침대로 향한다. 이불은 침대 한가운데 놓여 있다. 여러 겹으로 접혀져 눈에 띄게 불룩하다. 마치 두툼한 보따리를 보는 듯하다. 침대 앞에 서서 이불을 들쳐본다. 그 순간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불 속에는 생각지도 못한 변이 들어 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나. 너무 어이없어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는다. 변은 양도 많아 역겹기가 그지없다. 비위가 상해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다. 객실을 그냥 뛰쳐나오고 싶지만 간신히 눌러 참는다. 고개를 외로 돌린 채 이불을 마댓자루에 담고 또 침대 시트도 벗겨 그 안에 넣는다.
비상계단으로 나와 문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객실 청소하며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그동안 물감을 들인 듯이 침대가 피로 물든 것도 보고 찌개 국물이 침대 위에 쏟아진 것도 또 누군가 밟고 다녀 이불과 시트 위에 신발 자국이 선명히 찍힌 것도 보았다. 쓰레기통에 오줌을 싸놓은 것도 보았는데 이번에는 그야말로 최악이다.
“그여잔 끝자리에 7자 붙은 호실에 꼭 방을 잡아요.”
객실 청소팀 영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몽골 여자인 영미 말에 의하면 그녀는 도로 건너 다른 모텔에서도 침대에 변을 보아 이미 룸메이드 사이에서 소문이 난 여자라고 한다. 영미는 여자가 약을 먹어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한국 사람들 이상한 사람 많아요.
계단 난간에 기대어 문수는 유리창으로 시선을 준다. 위쪽에 나 있는 유리창은 문을 앞뒤로 여닫게 되어 있다. 그곳에는 거미줄이 쳐 있고 벌레들이 그 속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유리는 얼룩이 져서 지저분하다. 그래도 유리창 밖의 하늘은 맑고 푸르다. 어디서 날아온 걸까. 잠자리 한 마리가 창가에 나는 것이 보인다. 잠자리는 막대 모양으로 몸이 작고 가늘다. 등에 두 쌍의 가벼운 날개가 있어 멋진 모습을 하고 있다.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지 녀석은 창가에만 맴돈다. 매끄러워 유리창에는 달라붙지 못하고, 옆으로 조금씩 조금씩 이동하더니 창턱에 앉을 듯하다가 다시 날갯짓한다.
*
문수가 여러 알바 중에서 모텔 알바를 택한 것은 일하면서 책도 보고 글도 쓸 수 있으리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거리에 술집처럼 넘쳐나는 것이 모텔이지만 먼발치에서 보았을 뿐 가까이 다가가서, 건물 안에까지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모텔하면 이미지가 안 좋고 환경도 좋지 않지만 그런 것을 불식시키 듯이 건물은 깨끗하고 시설 또한 잘 갇춰져 마치 새 빌딩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더구나 무인텔이라 사람들과 부딪칠 일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수가 모텔에서 하기로 한 것은 프런트 업무. 그러나 문수에게 주어진 일은 그것 말고 여러 가지였다. 사장은 문수에게 모텔 청소를 시켰다. 청소팀에서 누가 하루 쉰다거나 바쁜 주말에는 가서 거들도록 했고 또 평소에도 청소팀을 서브해 주어야 해서 시트나 이불, 목욕 용품, 휴지 등을 갖다주고 그리고 청소팀이 쓴 걸레 따위를 세탁기로 돌려야 했다.
“정말이에요?”
문수가 자신을 고시생으로 소개하며, 일하는 중에 공부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곳에 들어왔다고 하자 몽골 여자들로 구성된 객실 청소팀은 다들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깔깔대며 웃었다.
“여기가 그렇게 한가해 보였나요?”
미자라는 이름을 가진 몽골 여자애가 웃음을 거두지 못하며 물었다.
“우리랑 일이 달라 그럴지도 몰라.”
영미가 무안해하는 문수를 대변해 주듯이 말했다.
“다르긴, 일이 뻔한데…….”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들어온 첫날 그것은 확인이 되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문수는 모텔 로비와 프런트실 그리고 주차장 청소는 기본으로 해야 했다. 카펫이 깔린 메인 계단과 비상계단을 청소해야 하고 각 층의 난간과 유리창을 닦고 또 로비에 있는 각종 기기와 물건도 닦아야 했다. 그런 다음 로비에 있는 냉장 쇼케이스에 든 음료와 생수를 채우고 팝콘이나 컵라면 등도 떨어지지 않게 해야 했다. 문수는 프런트를 볼 때도 다른 일을 했다. 비품을 만들고 수건과 타월을 갰다. 그뿐이 아니다. 객실 층 린넨실마다 물량을 체크하고 객실에 있는 공기 청정기 먼지막을 씻어야 하며 또 퇴근하기 전에는 객실에서 나온 쓰레기를 분류해 밖에 내놓아야 한다.
문수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 문학회 동아리원들과 지도 교수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도둑과 고양이’란 작품으로, 비록 신춘문예는 아니지만 그래도 희곡계에서는 권위 있는 매체로 알려진 곳에 입선함으로서 얼떨결에 희곡 작가가 되었다. 대학 초부터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습작을 해 왔지만, 다른 동아리원과 달리 문학에 대한 열정이라든지 치열성 같은 것은 많이 부족했다. 동아리원들 대부분이 국어국문학과나 미디어창작학과에 적을 둔데 반해 문수는 상경계열 학과에 적을 두고, 거기다가 다른 장르의 글은 멀리한 채 희곡만을 고집했다. 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성극을 했는데 맡은 역이 로마 대장역으로, 그때부터 문수는 연극과 희곡에 관심을 가졌고 희곡이 비록 비인기 장르지만 문수한테는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데뷔를 목표로 하거나 장차 글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신춘문예에 작품을 응모해 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치기와 분위기 때문이지, 어떤 내밀한 욕망인 것은 아니었다.
졸업한 뒤 작품을 공모전에 낸 것도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때는 남아 있던 열정마저도 없어 문학과 멀어진 상태였다. 문수는 어느 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한 블로그에서 우연히 희곡 공모전을 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희곡 공모전 상금을 본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당선자에게 주어지는 상금이 신춘문예보다 더 높고, 그것은 생활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던 문수에게 유혹으로 다가왔다. 문수는 졸업한 뒤 부모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 공기업 시험 준비를 했고, 그러나 대학 다닐 때 보다 지출이 더 커 아르바이트를 해야 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공모 기간이 얼마 안 남아 문수는 그전에 써 놓았던, 스스로도 괜찮게 여긴 작품을 손보아 보냈고, 그것은 문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상금 이외의 덤으로 얻게 된 희곡 작가란 타이틀은 문수에게 문학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갖게 해주었으며 가라앉았던 열정과 꿈을 샘솟게 하여, 결국 자신과 문학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오래 더 고민한 끝에, 이런 생각을 처음으로 알린 것은 강희였다. 강희는 학교 동아리 연합회에서 같은 동아리 회장으로 알게 된 타 학과 여자아이로, 여러 번 위기가 있었지만 잘 극복하고 졸업한 후에는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매사 적극적이고 성취욕이 강한 강희는 졸업하자 자신이 원하던 팬시 디자이너가 되었다.
“미쳤어, 오빠?”
강희는 실로 어이없어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짐작하고 있었지만 문수는 당황했다.
“공부 잘 하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조금만 더 하면 공기업 시험에 붙을 텐데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문수는 졸업 전부터 취업 준비를 했고, 졸업하고 나서는 학원과 고시텔을 오가며 공기업 취업 준비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취미로 하는 거야 상관없지만 글 쓰는 걸 업으로 삼겠다니, 어디 그게 될 법한 얘기야.”
“이게 내 길인 것 같아. 지금 못하면 나중에 많이 후회할 거란 생각이 들어.”
“상금 한 번 탔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꿈에서 얼른 깨. 앞으로 계속 응모해 상금 탈 거야? 상금 타서 살아갈 거냐구?”
“상금이 아니더라도 돈 벌 수 있어.”
“어떻게? 소설도 안 읽는데 누가 희곡 따윌 읽어.”
“연극으로 공연되면 사람들이 볼 거야.”
“누가 연극을 봐, 영화를 보지!”
2.
프런트에는 방이 두 개 딸려 있다. 하나는 방이 크고 하나는 작다. 화장대와 이불장이 있는 큰 방은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옆에 작은 방은 여러 물건을 보관하는 물품 보관소로 쓰인다. 문수는 작은 방에 들어간다. 한쪽에는 이불과 베개가 쌓여 있고 다른 한쪽에는 수납장이 있어 거기에 가운과 타월, 수건 그리고 투숙객들이 놓고 간 물건들이 놓여 있다.
바닥에는 객실에서 가져온 비품이 쌓여 있다. 그것들은 물기가 묻어 있거나 겉에 얼룩이 져 있다. 문수는 앉아서 비품을 정리한다. 비닐팩에서 비품을 꺼내 칫솔은 칫솔대로, 비누는 비누대로, 면도기는 면도기대로 분류해 놓는다. 물론 비닐팩은 안이 텅 빈 것도 있고 처음 그대로 인 것도 있다. 그리고 한두 개씩 빠진 것이 있고 또 여러 개가 빠져 홀쭉해진 것이 있다. 비닐팩에 비품이 비어 있는 것은 투숙객이 비품을 가져갔거나 청소팀이 버려서일 것이다. 문수는 객실 정비하며 비품이 쏟아진 것은 주워 담았지만, 청소가 밀릴 때는 쓰레기 비닐봉투에 그냥 내버렸다.
비품을 정리하는 동안 객실관리시스템에서는 음성 멘트가 계속 나오고 있다. “201호 문이 열렸습니다. 201호 청소키 넣었습니다.” “609호 투숙키 빠졌습니다. 609호 문이 닫혔습니다.”
이번에는 분류된 비품을 비닐팩에 넣는다. 기본적인 비품인 칫솔과 비누와 면도기를 먼저 넣고 그리고 샴푸와 린스, 클렌징 폼, 바디 스펀지, 화장솜, 면봉 등을 넣는다. 마지막에는 콘돔을 넣는데 문수는 그것이 이물질처럼 느껴져 비닐팩에 넣고 얼른 지퍼를 채운다. 문수는 손동작을 빠르게 한다. 마치 바닥에 깔린 화투패를 집듯이. 그렇게 해도 양이 많아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프런트에는 사장이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데가 있는 사장 친구와 함께. 프런트는 셋이서 본다. 오전에는 문수가 보고 오후부터는 사장이, 그리고 야간에는 사장 친구가 본다. 만약 사장이 일이 있어 못 올 경우 문수가 하루 종일 프런트를 보거나 아니면 사장 친구가 일찍 와서 일을 대신 한다. 그러나 사장 친구는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오후 일찍 나올 때가 있고 와서는 프런트에서 사장과 노닥대고, 같이 뭔가를 먹고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둘이서 술판을 벌인다. 그들은 고향 친구로 한 회사에 같이 다닌 적이 있고 또 한때는 동업도 했다.
사장 친구는 키가 크고 미남인데 반해 사장은 키가 작고 얼굴이 넓적하다. 그리고 사장 친구는 언변이 뛰어난 데 반해 사장은 말이 약각 어눌한 편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치게 물질적이고 계산적이다. 문수는 처음에 사장이 나이가 있는 분인 줄 알았다. 모텔 사장이라면 적어도 중년은 되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사장은 삼십대 초반 밖에 되지 않았다. 무슨 능력이 있기에 저 나이에 모텔을 운영할까. 건물이 전세라도 대단한데 그는 자신을 건물주라고 소개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또 하나의 모텔을 갖고 있었다. 길 건너에 있는데 이곳 모텔과 구조와 형태가 같았다. 말하자면 쌍둥이 건물로, 그곳은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었다. 그는 소위 말하는 금수저 출신인가. 그러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막대한 부를 지닌 그가 부러웠다.
문수는 자신의 집안을 생각해 보았다. 문수 아버지는 사업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예 있는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문수는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거나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직업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에게 남부럽지 않은 그저 보통의 직업이었으면 했다. 회사원이라면 작은 회사라도 괜찮고 또 라면이나 떡볶이를 파는 분식집 사장도 좋았다. 문수는 학교에서 아버지의 직업을 적어 오라는 것과 주위 사람들이 아버지의 직업을 묻는 것이 제일 싫었다. 그래서 누가 물으면 전기 기술자라든가 군인, 세무사 등으로 말했다.
문수 아버지 직업은 우편집배원이었다. 몸을 쓰는 일이 주 업무여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오토바이를 탔다.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9시까지 하루 14시간 기본 근무를 했다. 아버지가 하루에 배달하는 양은 이천 통이 넘는데 해질녘까지 배송을 마치려면 숨쉴 틈이 없다. 배달 업무에 표준 시간을 정해 놓아 우편은 한 통당 2.1초 안에 우편함에 넣어야 하고 등기는 28초 안에 처리해야 한다. 평상시는 그래도 할만하다. 팀원의 부재라든가 명절 때는 배송량이 폭주해 새벽에 출근해야 한다. 그리고 각종 고지서와 서류 문서 등이 몰리는 기간에도 일찍 나가 자정 무렵에 귀가한다. 아버지는 늘 사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업무 특성상 오토바이를 이용해 사고를 당할 수밖에 없는데 눈이 쌓여도 아무 지시가 없었다. 바닥이 미끄러워 팔이 부러진 적이 있고 다리에 깁스를 한 적도 있었다. 우편배달 일을 오래한 아버지는 현재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다.
문수 어머니도 일을 했다. 고깃집에서 주방 설거지를 했다. 그곳은 무한리필 고깃집이라 사람도 많고 그릇도 많았다. 특히 바쁜 시간에 주방에는 설거지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릇이 한가득인 쟁반이 물밀 듯이 들어오고, 박박 닦아야 할 불판이 주방 대야에 겹겹이 쌓였다. 설거지하는 사람이 혼자라서 밀려드는 설거지거리들을 감당하기에 벅차다. 그릇의 회전율이 높아야 하므로 손놀림이 빨라야 하고, 몸도 빨리빨리 움직여야 한다. 고깃집은 주방 환기가 잘 안돼 항상 연기가 자욱하다. 눈이 맵고 거기다가 주방 세제가 튀겨 옷은 엉망이 된다. 빈 그릇과 불판과 몇 시간 씨름하고 나면 허리가 아프고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된다. 고무장갑 안에 습기 차 손이 땡탱 붓기도 한다. 오전 늦게 출근했지만 어머니도 귀가 시간이 거의 자정에 가까웠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사장과 사장 친구는 포도를 먹고 있다.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힌 포도가 쟁반에 두 송이 놓여 있고, 둘이서 한 송이씩 나눠 먹고 있다. 사장이 집에서 가져왔든가 아니면 모텔 건너편 마트에서 사가지고 왔을 것이다. 검은 포도송이는 참외 보다 배가 더 부르고 굵은 포도알이 옥수수알처럼 총총 박혀 있다. 사장과 사장 친구는 벽에 걸린 TV로 영화를 보며 그리고 이야기를 나눠 가며 포도를 먹고 있다. 고개를 위로 든 채 더듬이처럼 손을 움직여 포도를 따 입속에 넣는다. 문수는 우물우물 십는 것을 보며 침이 입에 고인다. 그러나 그들은 문수를 그림자 취급한다. 사장은 문수에게 냉장 쇼케이스에 든 음료와 생수도 못 먹게 했다. 그것은 고객용이라고 했다. 손님에게 서비스로 제공되는 팝콘이나 토스트 같은 것도 같은 이유로 못 먹게 했다. 그러나 사장은 자기 마음대로 갖다 먹었고 식사 외에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다. 객실이 많이 찼을 때 혹은 사장 친구와 같이 있을 때 치킨이며 피자며 족발, 보쌈, 해물찜 등을 시켜 먹었다. 그러나 그때도 사장은 문수를 부르지 않았다.
그동안 쌓인 것이 많았는지 영미도 사장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영미는 일의 강도나 노동량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닌데도 받는 급여가 다른 곳에 비해 낮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장이 외식 한 번 시켜 준 일이 없고 명절에 보너스도 챙겨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도로 건너 건물에 대해 말했다. 영미는 그 쌍둥이 건물이 매매가 되었다고 했다. 그곳에서 일하지 않아 신경 쓸 것은 없지만 그래도 사장 소유의 건물이고, 경쟁 상대의 모텔이어서 문수는 관심이 갔다. 어떻게 그것을 알았냐고 하니 그곳에 일하는 친구가 있다고 했다.
“건물을 왜 판 거지?”
“나야 잘 모르죠. 사정이 안 좋아 그럴 수도 있고.”
“사장은 부자잖아?”
“건물 가지고 있다고 다 부잔가요.”
“건물 가지고 있으면 부자지 않아?”
“융자 받아 짓고 담보로 대출 받으면 꽝이죠.”
“사장 건물이 그렇다는 거야?”
“난 잘 몰라요. 어디까지나 그럴 수 있다는 거지. 근데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 다 잘린대요.”
“왜?”
“모텔 주인이 바뀌니까.”
3.
술집 내부는 피규어나 소품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입구에는 대기 좌석들이 놓여 있고 테이블마다 칸막이로 공간이 나뉘어져 있다. 강희는 토마토 생맥주를 마시곤 오징어를 마요네즈에 찍어 먹는다. 문수도 시나몬가루가 뿌려진 콜드브루 커피 생맥주를 마신다. 맥주와 커피가 잘 어우러져 은은한 커피향이 난다.
“오빠한테 다시 부탁할께.”
좀 차가운 눈빛으로 강희가 문수를 쳐다본다.
“예전으로 다시 돌아와 줘.”
“무슨 말이야?”
“그전처럼 공기업 시험 준비를 해. 글 쓰겠다는 생각은 말구…….”
“그건 내가 얘기했잖니.”
“그 생각 버려!”
“나도 어렵게 내린 결정이야.”
그것은 맞는 말이다. 문수로서는 자신의 삶과 인생 그 밖의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내린 결정이다.
“오빠, 요즘은 돈 없으면 못 사는 세상이야. 글 써서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거야.”
“글 쓴다고 다 가난하게 살진 않아. 나도 가난하게 살고 싶은 맘도 없고…….”
“오빠가 웹툰 작가야? 그게 아니잖아.”
“그건 니가 이쪽 계통 일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야.”
“잘은 모르지. 그치만 희곡 작가가 돈 못 번다는 건 알아.”
강희의 목소리는 힘이 있고 확신에 차 있다.
“제발 현실을 직시해! 이건 사는 것과 직결된 문제야. 나도 오빠 생각대로 해보라구 하고 싶어. 근데 뻔한데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어. 그런 건 가난하게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나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이나 할 일이야. 아니, 할 짓이야. 오빠는 내가 보기에 거기에 해당 안 돼. 물려받을 재산 같은 것도 없잖아?”
문학 행위를 무시하고 또 없는 집안을 비웃는 것 같아 문수는 기분이 몹시 상한다. 마음 같아서는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다.
“나, 정말 오빠 많이 사랑해.”
강희는 갑자기 부드러운 눈길로 문수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말 하는 거야. 우리 약속했잖아, 오빠 취업하면 바로 결혼하기로. 근데 이게 깨지게 생겼으니 내가 이럴 수밖에…….”
문수는 잔을 들어 빠르게 비운다. 강희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난 오빠랑 빨리 결혼하고 싶어. 그러니 한번 다시 생각해 줘.”
문수는 숨을 깊이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난 오직 오빠뿐이야.”
4.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간다. 각 층마다 린넨실이 있지만 건물 중간에 위치해 5층은 물품의 총 집결지로, 아침에 세탁 공장 직원이 침대 시트와 이불피를 그곳에 놓고, 문수가 세탁한 걸레와 프런트에서 내주는 물품도 5층으로 올린다. 그런 까닭에 객실 정비는 5층부터 시작된다. 5층에서 1층까지 객실 정비하고, 다시 6층에서 위로 올라가게 짜여 있다.
대형 쓰레기 비닐 봉투 두 개를 들고서 객실 안에 들어서면 쓰레기와 투숙객이 쓴 물품부터 걷어낸다. 욕실에서 휴지통을 비우고 여기저기 널려 있는 수건과 비누, 면도기, 타월, 가운 등을 줍는다. 물론 다시 사용해야 할 수건과 타월, 가운 등은 문 밖에 내어놓는다.
이번에는 객실 안의 쓰레기통을 비운다. 그리고 어지럽게 널린 쓰레기를 줍는다. 재활용이 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 담는다. 술이라든가 음료가 남아 있다면 세면대에 부어 안에 내용물이 없도록 한다. 욕실 청소와 이불피, 침대 시트를 새 것으로 교체하는 것도 힘들지만 객실 정비 업무에 어려운 것은 투숙객이 남기고 간 음식물 처리였다. 객실에서 음식을 해먹는 것은 금지지만 사와서 먹거나 배달해 시켜 먹는 것은 상관없었다. 식사인 경우는 먹은 것을 밖에 내놓고 또 배달 직원이 와서 가져가지만, 다른 음식물은 객실 안에 남게 되었다.
남은 음식물 중에 처치 곤란한 것은 국물이 든 음식물. 그중에서도 고기가 든 음식물. 원칙적으로 국물은 주방 개수대에 버리고 건더기는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넣어야 했다. 그러나 그럴 상황이 못 돼 변기 속에 버렸다. 그럴 경우 손에 기름이 묻고 또 옷에도 기름이 묻었다. 문수는 어느 때부터인가 투숙객들의 성향을 분석해 보곤 했다. 그것은 객실에 들어서는 순간 이루어지는데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투숙색이 양반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리고 매너 없는 사람으로. 객실 안에 음식이나 쓰레기가 없고 또 쓰레기통에 쓰레기조차 별로 없다면 문수는 그 투숙객을 양반인 사람으로 규정한다. 그런 투숙객은 누군지 궁금하고 또 존경스런 마음까지 든다. 양반이 아닌 사람은 객실 안에 쓰레기가 많은 경우로, 다 치울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또 쓰레기통에 넣지는 못하더라도 한쪽에 놓으면 되는데 먹은 것을 그대로 두고 간 것으로 이런 사람을 결코 양반이라 할 수 없다. 룸메이드로서 이 부류의 인간은 그다지 달갑지 않다. 그러나 가장 문제 되는 것은 매너 없는 사람으로 그것은 여러 경우를 들 수 있다. 국물을 남겨 놓은 것도 모자라 거기에 담뱃재를 떨어트려 놓은 경우, 음식을 남겨 놓고 술잔도 비우지 않은 일, 재떨이에 침을 뱉고 술과 물을 부어 놓은 짓, 침대를 제멋대로 이동시키고 이불도 바닥에 떨어트려 놓은 일 그리고 객실에 비치된 물건을 아무 데나 놓는 행위. 이런 객실에 들어서면 문수는 얼굴이 찡그려지고 손동작이 거칠어졌다.
객실 정리와 함께 비품과 편의용품을 정리 정돈하고 문수는 객실을 나온다. 복도에 내놓은 침대 시트와 이불피, 베갯잇, 수건, 가운 등을 마댓자루에 담아 그것을 메인 계단 있는 곳에 놓는다. 그리고 타월은 세탁해 종이로 띠를 둘러야 하므로 청소 카트에 싣는다.
“누가 화장품을 가져갔어요.”
울상이 된 얼굴로 영미가 복도로 나온다.
“화장품을?”
“어제 새 걸로 놨는데 가져갔어요.”
객실에는 투숙객을 위해 화장품을 비치해 놓는다. 남자용과 여자용 두 가지가 있고 스킨과 로션을 쌍으로 해서 놓는다.
“누가 그걸 가져가지…….”
문수 역시 객실 정비하며 화장품이 분실된 것을 여러 번 목도했다. 투숙객들은 화장품뿐 아니라 가운과 수건도 가져가고 롤빗과 리모컨도 훔쳐 갔다. 그리고 심지어 욕실의 샤워기 헤드까지 빼 갔다. 문수는 화장품을 가져오기 위해 일층으로 내려간다. 프런트에 들어서니 사장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 문수를 보자 사장은 슬그머니 일어나 옆에 큰 방으로 들어간다. 물품이 있는 방에서 화장품 세트를 챙겨 나오는데 큰 방에서 사장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 예” “아, 예” “네에, 죄송합니다” 누구와 통화하는지 사장 목소리는 한껏 위축되어 있다.
문수는 호기심에 문 앞에 다가가 안에 귀를 기울인다. “며칠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번에는 틀림없습니다” “한 번만 믿어 주십시오” 사장은 무언가 부탁하고, 매달리며 사정사정한다. 문수는 사장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라 의아하게 여긴다. 직원들을 제외하곤 사장은 손님들에게 친절했다.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고 얼굴에는 미소가 넘쳤다. 그러나 그들에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거나 턱없이 자신을 낮추며 굽신거리지는 않았다. 거기에는 가진 자의 우월 의식과 장삿속 계산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문수는 비상계단으로 나온다. 계단은 보이지 않게 먼지가 묻고 모래알 같은 담뱃재가 떨어져 있다. 문수는 카펫이 깔린 계단에 앉는다. 그리고 유리창으로 시선을 준다. 유리창은 여전히 얼룩지고 햇빛으로 하얗게 빛난다. 거미줄은 어느 새 넝쿨처럼 뻗어 있고, 그만큼의 벌레가 갇혀 그 속에 매달려 있다.
문수는 여기저기 본다. 저번에 본 잠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비상계단에 갇히면 미로와 같은데 마침내 탈출을 한 것인가.
5.
아침에 출근한 문수는 왠지 평소와 다름을 느낀다. 뭐라 말할 수 없어도 주자창이고 로비고 텅 빈 느낌이다.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도 없고, 다만 로비를 빠져나가는 두 남녀 뒷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프런트에는 야간 근무자도 없다. 사장 친구와 교대해야 하는데 어디를 갔나 보이지 않는다. 아침에 출근하면 사장 친구는 항상 소파에 누워 잠자고 있었다. 밤 세 시 넘으면 사람이 뜸하므로 그는 소파에 누웠다. 그러나 숙면을 이룬다고 해도 중간에 깨기 마련이었다. 무인 시스템으로 모텔이 운영돼도 사람들이 프런트의 작은 창을 두드렸다. 무인기 사용법을 모른다든가 결제하기 전에 버튼을 잘못 누른 경우 또 모텔 숙박 사이트 회원인 손님일 때 프런트를 찾았다.
문수는 다시 1층 로비로 나온다. 로비에는 냉장 쇼케이스가 있고 커피 머신기와 전자레인지, 토스터기, 팝콘 제조기 그리고 무인기가 있다. 자동 객실판매기인 무인기에는 A4 용지에 직접 쓴 안내문이 나붙어 있다. 만실이라 객실이 없음을 알리는 익숙한 메시지다.
열 시가 되면 수건과 타월, 가운 등을 가져가기 위해 청소팀이 오는데 오지 않는다. 문수는 CCTV를 본다. 객실 복도에 청소팀이 눈에 띄지 않는다. 복도에 내놓은 물품도 아직 없다. 얼마 있자 영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영미는 문수가 모를 것 같아 전화했다면서 이야기를 전했다. 사장이 이곳 건물도 팔았다는 것이고, 따라서 모텔도 사장이 이제 운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들도 어젯밤 알게 된 것이라며 영미는 분통을 터뜨렸다.
냉장 쇼케이스에서 생수를 꺼내 입대고 벌컥벌컥 마신다. 정신이 좀 들면서 뭔가에 홀렸다는 느낌이 든다. 문수는 마음을 다잡는다. 사장에게 직접 연락을 받은 것이 아니니,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일을 계속 하자. 그러면 사장이 모텔에 나타나리라. 프런트에서 객실관리시스템 창을 본다. 화면에 숙박과 대실, 청소 표시가 카드 모양으로 나타나 있다. 밤에 손님이 몰렸는지 녹색 카드 모양이 많다. 투숙객이 머물고 있음을 말해 주는 빨간 카드 모양도 여러 개고, 대실을 나타내는 노란 카드 모양도 눈에 띈다. 투숙객이 모두 카드 모양으로 표시돼 문수는 이곳을 찾는 이들이 허깨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위에 벽에는 CCTV 화면이 걸려 있다. 모니터 하나에 여러 곳을 담고 또 모니터가 여기저기 있어 복잡해 보인다. 프런트를 비롯해 건물 출입구, 주차장, 로비, 엘리베이터, 각 층 복도 등 객실을 제외한 모든 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다. 모텔에 CCTV만 있는 것이 아니다. 1층 로비 프런트에는 사람이 있다. 말이 무인텔이지 사람이 상주하는 곳으로, 이를 모르고 2인 기준의 값만 지불한 뒤 나중에 사람이 더 들어가고 또 미성년자가 들어오기도 한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린다. 사장한테서 온 전화다. 이미 들은 대로 사장은 모텔 건물을 매도했다고 한다. 새로운 사업 때문에 갖고 있는 건물을 다 처분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장은 생각해 주듯이 말한다. 새 사업을 시작하면 와서 일을 해달라고, 급여는 지금보다 더 많이 주겠다고. 문수는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그동안 일한 임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그건 말이야, 내가 현재 자금 사정이……. 갑자기 전화가 뚝 끊긴다. 얼른 전화해 보지만 신호만 가고 받지를 않는다.
그 순간 문수는 다시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눈을 크게 뜨고 CCTV를 본다. 로비에 있는 CCTV 속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이십대 젊은 남녀로, 그들은 환하게 웃고 있다. 문수는 좀더 바짝 CCTV를 들여다본다. 눈을 의심했으나 화면 속의 여자는 틀림없는 강희다. 강희는 문수와 만날 때 입던 레드 톤 블라우스에 블랙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다. 강희 옆에 있는 남자는 민호다. 민호는 대학 후배지만 가끔 문수와 강희 그리고 민호 셋이 같이 어울리곤 했다. 밥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마시고 또 노래도 같이 불렀다. 민호는 호남형에 사교성도 좋아 주위에 친구가 많았다. 게다가 학점이 우수한 편이어서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녔다. 문수는 넋이 빠진 채 CCTV를 주시한다. 객실 키를 받아 쥔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간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들은 손잡고 그 안에 탑승한다.
문수는 프런트를 나와 로비를 뛰어간다. 엘리베이터 문 위 숫자가 3을 가리키고 있다. 문수는 다급하게 버튼을 누른다. 엘리베이터는 4층에서 멈췄으나 다시 위로 올라간다. 문수는 옆에 비상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급한 마음에 두 계단씩 뛰어오른다. 숨이 턱턱 막힌다.
4층에 올라서자 아무도 없다. 복도는 텅 빈 가운데 뒤틀린 욕망만이 꿈틀댈 뿐이다. 문수는 휘청이는 몸을 벽에 가까스로 기댄다. 정말 허깨비를 본 느낌이다.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를. 문수는 비로소 무인텔을 성큼 걸어 나온다.
심사평
‘난쏘공’은 끝나지 않았다
문학은 시대를 반영하는 예술이자 예언서이다. 70년대 사회상을 대변했던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난쟁이 일가를 대표하는 소외 계층을 통해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한 작품이다.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을 배경으로 1인칭 시점의 화자를 내세워 도시 빈민의 궁핍한 삶과 좌절된 꿈을 그린 ‘난쏘공’을 현재 이 시점에서 다시 만난 것은 방서현이 쓴 「허깨비」를 통해서이다.
‘허깨비’의 배경은 모텔이다. 대학에서 상경계열을 전공하고 공기업 시험을 준비하다가 글을 쓰는 일로 전업한 청년 문수는 여자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인생의 길로 선택하고 모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욕망의 분출구인 모텔에서 문수가 틈틈이 글을 쓰며 일을 하기에는 업무가 과중하다. 손님들에게는 친절하지만 직원들에게는 냉정한 사장은 객실 냉장고의 음료를 일체 못먹게 하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 때나 음료를 마시거나 서비스로 준비해놓은 간식을 갖다먹는다. 문수가 하는 일은 사장과 사장 친구와 프런트를 교대로 지키는 일이지만 객실 청소나 주차장 관리 비품 챙기기 등 모텔 시스템이 가동되기 위한 일들을 한다. 온갖 군상이 머물다간 객실의 스산한 풍경, 비상계단에 갇힌 잠자리와 거미줄에 걸린 벌레에 이르기까지 문수의 삶은 비루함의 연속이다.
길 건너편에 모텔을 하나 더 갖고 있는 사장을 부러워하는 문수는 빛이 보이지 않는 길을 가는 ‘불우한 이웃’이다. 사장의 건너편 모텔이 팔렸다는 소식과 함께 문수가 근무하는 모텔이 팔리면서 그나마 근근이 살아가던 문수 앞에 장벽이 가로놓인다. 프런트에서 시시티비를 통해 여자친구가 후배랑 손을 잡고 객실 엘리베이터를 타는 장면을 보며 계단으로 뛰어올라가지만 4층 복도는 텅 비어 있고 아무것도 없다. 허깨비를 본 것 같은 장면에 문수는 모텔을 뛰쳐나온다. 모텔 건물 두 개를 보유하고 있던 사장이 자금난에 건물을 팔아치운다거나 여자 친구의 배신, 월급도 받지 못하고 일자리를 잃어버린 문수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맞닥뜨리며 암울한 현실을 맞는다.
선진국에 접어들었다고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어려운 이웃들이 많다. 펜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삶은 더 팍팍하고 힘겹다. 반세기 전에 ‘난쏘공’이 어두운 현실을 드러냈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난쟁이 가족의 힘듦은 진행 중이라는 점에서 착잡하다.
방서현의 문장은 명료하고 깔끔하다. 습작을 많이 한 흔적이 엿보인다. ‘모텔’ 이라는 공간을 소재로 하여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사회상을 반영한 것은 작가로서의 저력이 튼튼해 보여 기대가 된다. 다만 이불피라는 단어는 한자어를 차용하여 생경하고 불편하다. 이불홑청으로 바꾸었으면 한다./유시연(글, 장종권
당선소감
깊은 토굴에서 면벽수행 하듯 사색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는 아주 오래된 것 같다. 저 빛나던 시기부터 상상의 나래를 펴며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읽은 책도 없이 하다못해 일기 같은 걸 꾸준히 쓴 일도 없이 쓰기 시작했다. 무엇하나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그때 무엇이 나로 하여금 글을, 짧은 글도 아닌 긴 글을 쓰게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면 그때의 글쓰기는 그저 맹목적이었던 것 같다. 문학에 대한 어떤 의식이나 철학 없이 그저 뽑히기만을 기다리는 장난감처럼. 그러한 상황은 꽤 오래 지속된 것 같다. 빛나던 시기가 지난 뒤에도 계속됐으니까. 그러다가 난 어느 날, 내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걷지만,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는 나의 곤궁한 모습을.
그것은 내게 하나의 강이었다. 광야로, 드넓은 은빛 광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할 늪과 같은 강. 그 강은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깊었으며 폭도 아주 넓었다. 강물은 검은빛을 띠고 주위엔 사람도 배도 없었다. 난 어떡해서든지 강을 건너야 했다. 헤엄을 치던가 배를 만들던가 아니면 예수처럼 기적을 일으켜 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가야 했다. 난 홀로 사색했다. 세상을 멀찍이 벗어나 침묵하며 명상했다. 마치 깊은 토굴에서 면벽 수행을 하듯이. 그 과정에서 외로움과 삶의 무상함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방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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