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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혜/시(2022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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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립선언 외 4편
살아온 날만큼 패인 곳 많은
곰보바닥 위로 시간이 지나는 소리 요란하다
공손히 허리 숙여 두 다리 끌고 가는
저 세월의 무게
거죽만 남아 배배 꼬인 다리
두 손으로 다독여 들어 올려가며
길을 재촉하는
울 엄니
머리를 하늘에 두어야 사람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는데 그래야 인격을 측량할 수 있다는데
나이가 죄가 되지 않으려 허물어져가는
기억 붙잡으며 허공을 디디는 다리에 힘을 주어보지만
광속으로 움직여온 오른발과 왼발의 근력
어디에 다 쏟아버리고
참참참 참나무야
참나무의 계보를 펼쳐볼까요
상수리 떡갈 신갈 굴참 갈참 졸참...
참의 세상은 나눔이 익숙한 넉넉한 골목 가지고 있나요
평화가 넘치는 둥근 세계 만들어가나요
들판을 내려다보며 도토리 수를 조절해가는 밑그림을 그리는군요
반질반질한 도토리에 모자를 준비하는 예의를 갖추는군요
긴 뿔 달린 사슴벌레 사각거리는 소리 들리나요
결을 내어준 둥지마다 사부작거리는 소리 들리나요
표고가 둥치타고 자박자박 올라가는 소리 들리나요
발 디딜 곳 찾아 집을 지어요
뿌리내려 일어서면 1목1주택의 당당한 입주를 만족하게 되겠죠
평생의 터전에서 부모형제와 한 마을 이루면 숙성의 농도 한층 깊어지겠죠
반짝이는 향기 먼 곳까지 걸어 둘 수 있겠죠
나무초리마다 숲의 윤곽 세밀하게 계산하여 하늘을 조각하니 어울림의 모양 한층 돋보이는군요
참을 한 겹 더 입어보기로 해요
곧은 결 따라 푸른 불꽃 일어서네요
올곧은 호흡으로 정련하는 힘 높아지네요
온유한 열기로 순환의 맥 짚어내네요
황갈색 세상은 참 넓은 세계를 일궈가는군요
탈피
나무 둥치에 붙어 머리를 하늘로 향한 투명한 허물
거미줄처럼 새겨져 나오는 갈증의 흔적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밤새 뒤척인 모래 언덕같이 부스스한 소리 끌어안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손수 새 옷을 지으시던 아버지
새벽마다 책상 앞에 앉아 잠자리 날개 같은 실 뽑아
미달된 질량 채우시려 손끝에 매달린 지문 날마다 새로 짜셨지
칸 공책에 반듯한 글씨 힘주어 쓰는 법을 가르쳐주시던 아버지
호령하던 세월 카랑카랑하던 목소리 허물 속에 채워 넣으시고
낯선 홍수에 떠밀려 독수리 타법으로 똑, 똑, 똑, 길을 더듬으셨지
연습총량의 법칙을 지키느라 바짝 마른 오늘을
내일의 불쏘시개로 차곡차곡 쌓아두고
한 세상 허물을 훌훌 벗으신
아버지
또르르르 탁 또르르르 탁
자판 위를 걸을 때마다
아직도
새 옷 지으시는 소리 들려오지
따개비
성안에 들어박혀
날마다 그림자 갈아입는 달의 이름 뒤적이며
나를 다 읽었다는 듯 흘러나오는
달빛 몇 줌 채취해 광달거리에 걸어두고
그분과 나 사이의 중력에 대해 묵상한다
바위섬 꼭대기에 작은 성 지어놓고
변덕스런 천기를 온몸으로 견딘 탓인가
이제 해명에도 흔들림 없이 조석표 읽는 법을 터득해
난바다로부터 바람에 매달려 맨발로 달려오는
하얀 포말 톺아보며 파도를 밟고 오신
그분의 자명종 위로 기다림의 그림자 뉘인다
천년 같은 하루를 견디는 일은 섬지기의 숙명인지라
밤낮없이 바다의 표정을 읽으며
밀물과 썰물의 어디쯤에 있는 질긴
갈퀴의 방향을 알아채는 눈치를 기르고
다시 오시겠다 약속하신
그분의 알람에 귀를 단련시킨다
달의 영허에 밀려온 편지를 건져
심해를 여행하는 이들을 읽고
세상을 여행하는 이들을 읽으며
고착생활에 지친 나는
슈퍼문이 떠올라 해수면을 더 높이 당겨주길 노래하며
궤적사진 속 큰 별에 그리움을 기댄다
때론, 불가촉천민처럼 무른 삶으로 분류되어도
몸 낮춰 바위에 꼭 붙어있어야만 은혜의 바다에 잠길 수 있음을 알기에
기다림에 차오르는 눈물 삼켜 파도를 부리며
부려附麗한 오늘을 버텨낸다
청년실업
아파트 한 동 트럭에 실려 간다 공동주택 규범에 갇혀 양력의 날개 꺾고 공기주머니 달고 짧은 호흡 하다 층층이 올라타고 떠나는 여행 모퉁이마다 닭의 볏 화사하게 피어난다
오붓한 꿈 위해 날마다 주어진 레일 위를 쉬임없이 달렸으나 거미줄에 매달린 듯 차려지는 가벼운 밥상 볏은 데코처럼 늘 화사하게 얹어진다
밤낮없이 스며드는 환한 빛에 새벽은 문턱을 깎아버려 아침을 불러오지 못하고 영문을 모르는 채 말똥거리는 눈 수천 년 전 멧닭 되어 자유로이 날던 때를 꿈꾸고 있을까
열정페이로 굴레를 끊어내려 홰를 치지만 무거운 삶의 더께를 걷어내지 못하고 투잡 쓰리잡의 난간에 매달려 오늘을 깁는 별들 깜박깜박 길을 잃는다
심사평
섬세한 시어가 내포한 시적 의지의 근력 돋보여
인생에서 얻게 되는 ‘지혜’가 굳이 거창한 표현이나 어려운 개념에 의지해 드러날 필요는 없다. 다시 말해, 무겁고 딱딱하고 밀도 높은 결의 어휘들로 ‘강철’을 그리거나 가볍고 부드럽고 풀어지는 질감의 언어로 ‘바람’을 포획하는 것이 무슨 새로운 의미를 형성할 것인가. 어쩌면 시작詩作은 부단히 사물과 현상의 이면裏面을 반복해서 뒤집는 행위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한 반복을 통해 가장 일반적이면서 보편적인 의미를 형성하기도 한다.
김응혜 시인은 우선 시어를 섬세하게 선택하고 이를 잘 구성하여 개성적인 표현을 빚을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다. “수직인생을 베끼며 완강히 버텨온 덕에/걸음보조기 하나 얻어 한 몸이 되고서야/비로소/직립을 선언하는 허연 머리/하늘 향해 나폴거”(「직립 선언」)리는 노모의 형상을 지나친 감정 개입 없이, 나아가 군더더기 표현 없이 시각적 이미지로 선명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글의 형태를 바꿔(물론 강조의 표시일 것이다) 노모의 변한 모습을 “머리를 하늘에 두어야 사람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라는 명제에 비춰, 근력의 상실을 ‘직립 선언’이라는 일대의 사건으로 바꿔버린다. 시인의 능력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는 점이다.
시인은 개인사라는 미시적 관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나 현상에도 나름의 사유와 이를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증명한다. 가령, 「청년실업」처럼 ‘열정페이’와 같은 사회문제를 직접 다룬 작품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살 집을 스스로 정해볼까요/이사를 마다하고 한 집만 움켜쥐고 있으면/생각은 더 깊이 자라거든요/깊이 내리는 뿌리의 반짝이는 힘이 보이나요”(「참, 참, 참나무야」)처럼 ‘참의 계보’라는 추상 관념을 활용한 작품에서도 시인의 문제의식이 잘 드러난다.
김응혜 시인은 시적 인식만큼 시어의 선택에서도 세심한 면을 드러낸다. 가령, 「탈피」의 “또르르르 탁 또르르르 탁/자판 위를 걸을 때마다/아직도/새 옷 지으시는 소리 들려오지” 같은 부분은 단순히 의성어를 통해 어떤 동작을 표현했다는 수준에서 벗어나 ‘아버지’와 ‘새 옷’이라는 기억의 내용과 화학적으로 결합해 시인 자신의 시 쓰기의 의미를 확대하는 질적인 변화까지도 내포한다. 시인이 계속해서 감동적인 ‘새 옷’을 계속 짓길 바라마지 않는다./장종권, 남태식
소감
아버지께선 좋은 책을 전집으로 사서 부지런히 나르시고 매년 성탄절엔 두꺼운 일기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런 정성이 늦은 나이에도 시 쓰기를 시작한 저에게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인생의 전환점을 찍으며 이전과는 좀 다른 색의 옷이 입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가지 못한 다른 길에 대한 기대가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실 구석에 나만의 책상을 놓고 무작정 오래앉아 버텨보기로 했습니다
가는 길에 대한 의문이 일어나며 지쳐가고 있을 때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고 길을 열어주신 장종권대표님과 리토피아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처음 마음으로 길을 다지며 성실히 걸어가겠습니다
늦게 뗀 시걸음을 격려의 눈길로 지켜준 옆지기와 아이들게도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합니다
늘 그리운 아버지, 긍정의 아이콘이신 시어머니께도 감사드리며
이 모든걸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김응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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