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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성/수필(2022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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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품
나목과 희망
한겨울 추위 속에 헐벗은 겨울나무
새봄이 찾아오니 꽃피고 우거지네
시련을 참고 견디면 호시절이 오누나
인간의 삶은 번민과 시련과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들을 견디고 삶을 이어가려면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에 짓눌려 비참해지거나 삶을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생존을 위해 희망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을지라도 다 나름대로 더 나은 삶에의 희망을 간직하고 있기에 그 어려움을 견디며 살아간다.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먼저 죽은 사람들은 음식이나 의약품이 부족해서보다는 삶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려서라고 한다.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오늘의 어려움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의 항아리’ 이야기는 이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거인 프로메테우스는 흙으로 남자 인간을 만들고, 천상의 불을 훔쳐다 주었다. 그 불로 인간은 무기, 농기구, 주화 등을 만들고 주거지를 덥히는 등으로 삶을 크게 개선했다. 이에 제우스는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와 그 불을 받은 인간을 벌하려고 최초의 여자인 판도라를 만들어 온갖 재앙이 담긴 항아리와 함께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에게 주었다. 어느 날 판도라는 항아리의 내용물이 궁금하여 보려고 그 뚜껑을 열자 몸과 마음의 온갖 재앙들이 튀어나왔다. 이에 놀란 판도라가 뚜껑을 닫자 맨 밑바닥의 희망은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인간은 재앙에 시달리면서도 희망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간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을 때 현실의 어려움을 더 잘 견딜 수 있다. 혹독한 겨울의 추위를 참고 견디어내는 것도 그것을 참고 견디면 따뜻한 봄이 온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찬바람 눈보라도 / 새봄의 희망이 있기에 / 기쁨으로 / 인내할 수 있으리.”[윤용기, 〈겨울나무〉 중에서]. 만일 그 희망이 없다면 겨울의 혹한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경험상 추운 겨울 뒤에는 반드시 따뜻한 봄이 온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겨울이 아무리 춥고 고통스러워도 절망하지 않고 새봄에의 희망을 가지고 지루하고 힘든 겨울의 추위를 잘 참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겨울은 추위라는 시련이 있지만 시련이 있는 곳엔 희망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겨울은 시련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희망의 계절이기도 하다.
유럽이 원산지인 ‘설강화(雪降花, snowdrop)’라는 수선화과의 야생화는 늦겨울 눈 속에서도 하얀 꽃을 피우는데 ‘희망’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그 꽃말의 유래는 이렇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때가 눈이 오는 추운 겨울이었다. 언제나 봄이던 에덴에서 난데없이 겨울인 곳에 내쫓긴 아담과 이브는 추위에 떨며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때 홀연히 나타난 천사가 그곳에도 눈 내리는 추운 겨울 다음에는 꽃 피는 따뜻한 봄이 온다며 그 증거로 막 땅에 떨어지려는 눈송이 몇 개를 하얀 설강화로 바꾸어 보여주었다. 그 덕택에 아담과 이브는 겨울을 참고 견디어 봄을 맞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설강화는 겨울의 추위에 지쳐 갈 때 따뜻한 봄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설강화보다 더 강력한, 겨울 다음에는 봄이 온다는, 희망의 상징이 있다. 바로 겨울을 대비하여 잎들을 전부 떨궈버려 헐벗게 된 나목(裸木)이다. 활엽수는 늦가을과 초겨울에 모든 잎을 떨군 채 앙상한 나목으로 겨울 동안 온갖 풍상을 견디면서 새봄을 기다린다. 그러다 봄이 오면 나목은 다시 잎도 내고 꽃도 피울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나목은 새로이 무성한 나무로 변신할 수 있는 봄이 온다는 것을 알기에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새봄이 온다는 것을 알고 나목은 헐벗은 채로 추운 겨울을 견뎌내고 따뜻한 봄에 화려하게 소생하기에 사람들은 나목에서 희망을 보고 그래서 나목은 희망의 상징 또는 은유가 된다.
희망의 은유로서 나목의 모습은 소설가 박완서의 데뷔작 《나목》(1970)에 잘 묘사되어 있다. 박수근 화백을 소재로 한 이 소설은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서 1952년에 걸치는 추운 겨울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 소설에서 여주인공은 박 화백의 작업 공간과 같은 곳에서 근무한다. 그 덕에 그녀는 박 화백의 그림 〈나무와 여인〉을 보게 되고 거기에 그려진 나무가 “꽃도 잎도 열매도 없는 참담한 모습의 고목” 즉 말라죽은 나무로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시대의 아픔을 견디고 난 10년 뒤, 박 화백의 전시회에 가서 완성된 같은 그림에서 그 나무를 다시 보고서 그 나무가 말라죽은 고목이 아니라 봄을 기다리며 의연히 겨울을 견디는 나목임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추운 겨울에 이어 반드시 따뜻한 봄이 온다는 믿음, 그것은 곧 희망이다. 활엽수는 겨울의 추위에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잎을 다 떨구고 나목으로 겨울의 추위를 견디며 봄에 대비해 조용히 잎눈과 꽃눈을 분화시킨다. 그랬다가 봄이 오면 꽃을 피우고 잎을 키워 우거지게 된다. 사람들은 그런 나무의 모습에서 나무가 겨울이라는 시련기를 견디어내고 봄이라는 호시절을 맞을 수 있게 되는 것은 봄에 대한 희망을 간직한 때문이라고 유추하게 된다. 《나목》의 여주인공이 박 화백의 그림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은 나목이 주는 새봄에의 희망이라는 메시지였다. 이 메시지가 전쟁의 상흔을 딛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애쓰던 1970년대 당시의 독자들에게 공감을 일으키고 감동을 주었다.
나목은 잎을 모두 떨구고 헐벗은 모습으로 겨울을 나지만 봄이 되면 아름다운 꽃과 푸른 잎을 피워내어 겨울의 앙상한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무성한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 “내 마음 언덕에 / 봄풀이 솟아나고 / 4월 바람은 꽃구름을 / 벽에 걸린 거울 앞까지 / 곱게 밀어 올렸다. // 봄을 기다리던 / 겨울나무는 /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황금찬, 〈봄 밤〉 중에서]. 이처럼 겨울의 나목은 헐벗은 채로 추위를 견디는 초라한 모습이지만 봄이 되면 꽃이 만발하고 녹음이 우거져 헐벗었던 옛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게 화려한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그 가능성은 곧 희망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나목은 인간에게 강력한 희망의 은유로 작용하는 것이다. 나목은 헐벗은 채로 추위를 견디며 봄을 믿고 그에 대비하였기에 겨울에는 앙상하던 것이 봄에는 예쁜 꽃과 무성한 잎으로 뒤덮이는 놀라운 변신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변신하게 될 나목을 보면서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시련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희망을 확인하고 강화하며, 위안을 받고, 생의 의지를 다진다.
심사평
「까치밥, 조선의 마음」, 과 「나목과 희망」 두 편의 수필을 읽고 19세기의 지성 헨리 데이빗 소로우를 떠올리게 된다. 소로우는 19세기 미국의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굳이 노자의 무위자연을 말하지 않더라도 소로우의 사상은 전 세계 지성을 향해 자연과 삶에 대해 진정성 있는 글을 남긴다.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길지 않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는 이 시대 최고의 스테디셀러 『월든』을 통해 분명히 현대인의 성찰을 요구한다. 19세기에 쓰여졌고 20세기를 지나 21세기에 이르러 더욱 빛을 내는 소로우의 ‘월든’은 빛나는 문장과 심오하고 독창적인 사상으로 오늘날에도 뒤지지 않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 시대에 이미 미래를 예견한 탁월한 그의 정신세계는 물질문명의 폐해를 예견하고 인간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소로우의 글 전편에 자연의 변화에 민감한 시선과 계절이 바뀌는 월든 호수의 주변묘사가 눈부시게 뛰어나다.
이효성은 <까치밥>을 통해 자본주의 시대 황폐해진 현대인의 마음을, <나목>을 통해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그리움과 희망을 보여준다. 겨울이 지나 따뜻한 봄이 온다는 희망이 있기에, 시련을 딛고 일어서면 좋은 날이 오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인간은 어려움 속에서도 <판도라의 항아리>안에 남은 마지막 희망을 기다리는 것이다.
두 편의 작품은 간결하고 명징한 문체, 적절한 비유와 상징으로 필자의 생각을 잘 전달하고 있다. ‘까치밥, 조선의 마음’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자연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새 한 마리, 작은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그 마음이 있기에 우리 민족성 안에 흐르는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제대로 드러나게 표현했다.
추운 겨울 헐벗은 나무를 보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봄이 되면 화려한 색깔로 다시 살아나는 자연의 순환은 단순한 우주의 법칙 같지만 인간에게 철학적 사고와 희망을 갖게 한다. 특히 ‘나목’은 철학적 사유로 삶의 지평을 여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의미가 있다.
이 두 작품을 보면서 이효성 작가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된다./유시연, 김영식
소감
이효성 수필부문 신인상당선 소감
‘수필(essay)’하면 필자는 먼저 이 장르의 창시자들이라 할 수 있는 미셀 드 몽테뉴와 프란시스 베이컨의 에세이들을 떠올리고 지금도 그들의 에세이들을 수필의 전범으로 생각한다. 특히 베이컨의 간결하고 경구적이고 교훈적인 스타일은 필자의 글쓰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젊은 시절 그런 성격의 글로 한 번은 모 일간지에 신춘문예 수필 부문이 있어 응모했다가 “사변적”이라는 이유로 당첨작과의 경쟁에서 밀린 일이 있다. 그 후로 수필 공모에 응모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랬다가 교직에서 은퇴도 했거니와 공직에서도 물러나게 되어 글 쓰는 일에 좀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런 차에 《리토피아》의 수필 신인 모집 공고를 보고 응모하게 되었다.
모든 문학 장르가 그렇듯, 에세이라는 장르도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특정한 모습으로만 규정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모습의 수필도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수필이 어느 한 모습으로만 규정되는 것은 꼭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그런 점에서 주류의 규정과는 좀 다른 성격의 수필인 필자의 응모작을 당선작으로 선정해주신데 대해 특히 더 감사드린다. 필자의 수필이 한국 수필의 다양성에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면 큰 영광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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