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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순/시(2023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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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의 눈 외 4편
임성순
궁궐에는 해치가 버티고 앉아 있다.
궁궐 밖에도 있는데 보는 방향이 다르다.
세워놓은 사람의 의지일까.
눈은 마음도 있고 공부도 하고 나이도 먹을까.
느낌이 없으니 그냥 지나치고 황반이 빠지니 나이는 먹지.
어릴 적에 어른들의 시각에 대해 회의를 느꼈지.
옳지 않은 것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쳐버리지.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보지 않으려고 하지.
눈은 비겁하지, 착한 사마리아인이 낫지.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이 바람직하지.
멀뚱멀뚱 뜨고 있다고 눈이라 할까.
맥 빠진 채 보기는 하는지 행동은 마음에도 없는지.
몸에 붙어있을 필요성이 있을지.
그렇다고 빼놓고 다닐 수도 없으니.
힘없어 서러워하는 눈에게 견뎌달라고 응원을 해주자.
흉보던 눈들도 힘 빠져서 하품만 한다.
손가락의 소중함
한 손을 펴본다.
무심히 바라본다.
세다가 울컥한다.
손가락은 다섯 개다.
세다가 중간에 멈춘다.
더 셀 기분이 아니다.
어릴 적 부모님 손가락발가락 다 빌렸지만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어 세다말다 했다.
이제는 숫자를 알아도 셀 수가 없다.
숫자도 이젠 그만 세는 걸 포기하란다.
전철 안에서 보는 손가락 너무 고맙다.
아버지는 팔칠, 어머니는 일백사,
다정히 다섯끗이신데 나는 망통이다.
장래 나의 숫자는 팔이다.
방하착防下着
새해 들어서도 흔들흔들 위세가 당당하다.
그냥 있으면 심심해서일 테니 그럴 수 있지.
티비가 신나서 꼭두새벽에 잠을 깨운다.
오늘은 강화도에서 지진이 발생했단다.
화들짝 깨어나니 봉두난발 꼴이 우습다.
인간들의 춤사위가 멋지게 보였나 보다.
잠꾸러기 지진도 잠을 깨서 흔들어댄다.
굿거리장단을 추려나 보다, 덩더쿵이다.
입 있어 입이 아니요 막 벌리면 걸레란다.
모임도 입이 많으니 발이 집에서 쉬란다.
쉼의 미학을 입도 몸도 땅덩어리도 모른다.
흔들거림은 땅심일까요 사람의 마음일까요.
둘 다 아니지, 콜라텍의 신나는 음악일 뿐이지.
하늘
비싼 색조화장품 많다고 자랑한다.
밝은 색조의 화장품을 좋아한단다.
그런데 왜 오늘은 회색 일색일까.
친구들이 많이 만나러 찾아온단다.
소통의 대가라서 그렇다고 말은 잘한다.
만나러 온 친구에 따라 화장색이 바뀐다.
밤부터 미세먼지와 눈비를 보낼 거란다.
스스로 알아서 대비하라고 생색을 낸다.
찾아온 친구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다.
말도 해보지 못하고 성질만 부리려 한다.
참는데 대가라더니 왜 변덕을 부리려 할까.
애꿎은 인간들에게만 발톱선물을 해댄다.
관장하려고 하는지 몸태질이 심하다.
조조가 극장에
개봉관 준개봉관을 제외한 거의 모든 극장에 동시상영 조조할인이라는 프랭카드가 걸려 있었지. 삼국지를 즐겨 읽던 어린 시절에 조조는 왜 극장에서 할인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했었지.
꿈 많고 호기심이 많았던 어린 시절 조조할인으로 동시상영 두 편을 보고 또 볼 수 있다는 것은 횡재도 그런 횡재가 없었지. 때론 동네 형들을 따라 몰래 극장에 숨어 들어가기도 했고, 낯 모르는 어른들에게 같이 손잡고 들어가 달라고 애원도 했었지.
새벽 공동수돗가에 모여 졸린 눈 비벼대며 어제 본 영화얘기를 했지. 그 당시 서부영화가 많이 나와서 서부왕자 케리쿠퍼, 바드랑카스타, 하고 노래도 부르곤 했지, 영웅이지, 나도 그런 사람 되고 싶었지.
그렇게 조조가 새벽부터 어린아이들을 꾀던 꿈같던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늙고 꼬부라진 몸과 마음만 남아있지만 재미난 기억이지. 어라, 유비와 제갈량은 어디로 가고, 관운장은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있나 보다.
심사평
해학諧謔과 성찰省察 사이의 언어
시는 일상의 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너무 쉽고 간단한 이 정의는 사실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일상어가 시의 뿌리가 된다는 생각은 순전히 사적的인 것이다. 불과 두 세기 전만 해도 시처럼 예술에 사용할 수 있는 어휘와 기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사용하는 어휘들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최소한, 오늘의 시는 이 구분이라는 전통을 전복顚覆하려는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형성된 것이다. 또한, 일상日常은 현대사회라는 체계가 만든 인간 ‘상像’의 하나일 뿐 결코 자연이나 진화의 결과가 아니다. 일상은 현대인만이 고민하는 지극히 현대적인 행동과 사유의 밑바탕일 뿐이라는 뜻이다.
임성순 시인은 일상적 어휘, 시적으로 가공되기 이전의 언어, 즉 소쉬르의 구분에 따르면 ‘파롤parole’의 어휘들을 능숙하게 구사하여 시의 다른 장르적 특성인 리듬과 의미 형성을 조화롭게 수행하고 있다. “아버지는 팔칠, 어머니는 일백사,/다정히 다섯 끗이신데 나는 망통이다./장래 나의 숫자는 팔이다.”(「손가락의 소중함」)처럼 일상의 행위를 표현하는 부분만 아니라 “눈은 마음도 있고 공부도 하고 나이도 먹을까./느낌이 없으니 그냥 지나치고 황반이 빠지니 나이는 먹지.”(「해치의 눈」) 같은 사유의 내용을 드러내는 부분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은 자신의 행위와 생각의 내용을 모두 일상적 어휘를 사용해서 ‘의미화’할 수 있는 방식을 이미 구축했다고 보인다.
시인이 시작詩作에서 일상적 어휘를 다루는 태도에서 ‘해학’의 분위기가 드러난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해학은 “세상사나 인간의 결함에 대한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말이나 행동”을 일컫는다. 이 정의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익살과 우스꽝스러운’이 아니라 ‘결함’이다. 흔히 해학을 ‘풍자諷刺’와 비교하는데, 풍자가 대상을 비난하면서 공격하는 양태를 보인다면, 해학은 대상에 대한 동정과 공감을 유발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 ‘동정과 공감’은 ‘결함’에 대한 날카로운 비난이 아니라 ‘나도 다르지 않다’라는 고백에서 비롯한다. 가령 강화에서 발생한 지진을 모티프로 한 「방하착放下着」에서 엿보이는 “인간들의 춤사위가 멋지게 보였나 보다./잠꾸러기 지진도 잠을 깨서 흔들어댄다./굿거리장단을 추려나 보다,”라는 표현은 현대인의 경박성과 뜻밖의 곳에서의 지진을 연결하는 묘미를 보여주지만, “입 있어 입이 아니요 막 벌리면 걸레란다./모임도 입이 많으니 발이 집에서 쉬란다.”처럼 ‘~란다’라는 어미가 드러내듯 부정확한 사유에 의한 풍자가 단순한 푸념이나 비난으로 떨어질 위험도 같이 드러난다.
임성순 시인은 ‘하늘’과 ‘손가락’ 같은 직접 지시 대상과 ‘해치’, ‘방하착’처럼 어휘의 이면裏面이 중요한 대상, 특히 영화관의 ‘조조할인’을 삼국지의 간웅奸雄 조조로 치환하는 데서 잘 드러나듯 대상을 통한 자유롭고 활달한 상상력의 폭을 보여준다. 이제 남은 문제는 시인의 해학성이 보편적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 어떻게 ‘성찰의 깊이’를 확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진부陳腐한 표현이 또 있을까. 시작은 시작일 뿐이다. 아니라면, 시작은 이미 종말의 시작일 뿐이다./백인덕 남태식장종권
수상소감
너무 이른 때라는 말이 있다. 너무 늦은 때라는 말도 있다. 너무란 단어는 너무 철이 없다. 지금 내겐 너무 이른 때나 늦은 때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다. 나 자신을 찾아가는 길에는 험한 길도 순탄한 길도 있을 거다. 가다 지친들 무엇이 대수일까. 생각보다는 행동으로 앞을 바라보며 내 삶을 내가 찾아가는 중이다./임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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