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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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안상/시(2023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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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베
로마 구릉지대 모퉁이
산 칼리스토, 도미틸라 그리고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 지하에 카타콤베가 있다
네로 황제 탄압으로 그리스도인들
도망치다 겨우 찾아낸
콜로세움 원형 경기장
사자밥 될 뻔한 이들이
피난처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아낸
먼저 간 주검이 묻힌 곳이
피난처요 안식처였다
송장 썩는 냄새 코가 문드러졌다
무서운 주검을 둘러친
두려운 마음 숨어 지낼 이만한 곳 없었다
세상 가장 안심했을 곳
쫓기던 사람들이 죽어 울타리가 된 곳
죽음에 빚진 삶이 있던
카타콤베
억배기 할머니
아홉 살 무렵, 더풀더풀 머리카락은 종다리 집짓기 좋게 왜 그리 잘 자라던지
사십 넘어 본 나와 동생, 아버지는 넝매 해남 아재한테 머리 깎고 오라셨다 오 리나 떨어진 큰집 동네로
동생과 머리 깎으러 가곤 했다 기찻길 지나 논두렁 따라
빡빡, 이빨 빠진 바리깡은 찔끔 눈물 먼저 뽑았다 해남 아재는 헌 가죽 띠에 면도날 쓱쓱, 시늉으로 면도한 뒤 구둣솔로 대갈통 문질렀다
접지리 저희 왔어요, 큰집 할머니께 꾸뻑 절을 하면, 억배기 꼬부랑 우리 할머니는 누구? 누구라고? 접지리 안생이 성생이 왔어요,
할머니는 이유도 모르는 우리를 선걸음에 내쫓았다 접지리 놈들 어서 가그라 어서 가!
얽은 자국마다 복이 듬뿍이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구멍에 억대기만 가득 찼다 생각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뉘엿뉘엿 석양길에 터덜터덜
할머니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제일 서럽게 우신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이명
모깃불에 쑥 한 줌 올려놓고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졸음이 뭇별처럼 쏟아지는데
도란도란 식구들 이야기꽃 끝이 없었다
별 총총 사방 어둑한 밤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뚜라미 울음소리
내 마음 쫑긋, 그곳으로 내달리곤 했다
벚꽃 흐드러지게 핀 아직은 사월 초순,
돌아갈 수 없는 그 꽃시절이
귓가를 서성인다
피어오르던 모깃불 연기처럼
그리운 이 모두 어디론가 가고 없는 지금
먼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이명인 듯 파고든다
대나무숲
옛집 뒤꼍에
누가 더 큰지 내기라도 하는 듯
쭉쭉 솟아오르던 대나무
어쩌다 홀로 그 숲에 찾아들면
금세 호랑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왠지
바윗덩이 같은 두려움에
숨이 콱 멎을 것 같았다
철없던 시절이었다
어느 해 백중 무렵 한낮이었던가,
숨어든 대나무숲이
왜 그리도 조용하던지
이웃집 똥개라도 컹컹댔으면
안심할 성만 싶었다
떠나신 지 삼십 년,
어머니 회초리에 자주 숨어들었었다
세상 지청구 듣고 찾아든 오늘
그날처럼 외딴 섬이다
그 시절 희미해져서일까,
대나무 숲 일렁이는데
내 귀엔 바람 소리 들리지 않는다
놀란 멧비둘기 한 마리 푸드덕
날아간다
금성 선풍기
장성 대창동 자취방이었다
더위에 뻘뻘 내가 안쓰러웠나, 그녀
금성 선풍기를 사 들고 왔다
부채도 변변치 않던 시절
작두 샘물 등목이 상책이었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
선풍기를 들고 오다니
더위와 짜증 순간 날아가 버렸다
바람조차 향기롭다는
카랜다 속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
신혼여행 온 것 같았다
서늘한 에어컨 아래 앉아
사십여 년 전 생각,
초롱초롱 샛별 눈동자의 그녀가 들고 왔던
우주
심사평
삶의 인문학적 성찰
계간 《리토피아》 2023년 가을호 시부분 시인상으로 고안상 시인을 당선시킨다. 「키타콤베」 외 4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고안상 시인은 깊은 연륜을 통해 얻은 삶의 깨달음을 시작품 전반에 견지하고 있다. 아울러 오랜 습작 기간을 거친 듯 지나온 삶의 세목들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때로는 길고 유장한 호흡으로 또 때로는 짧으나 인상 깊은 어조로 능숙하게 삶의 단면을 제시하고 있다. 시인은 어려운 시어나 알쏭달쏭한 관념어로 독자들을 현혹하거나 가르치려고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분자분 보여주는 그의 목소리가 결코 느슨하지도 않다. 특히 로마 구릉지대에 있는 지하무덤에서 네로 황제의 탄압으로 숨어든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부지하던 사실을 다룬 「키타콤베」에서는 죽음에 기대어 살아가는, 죽음에 빚지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 삶에 대한 성찰을 시적 언어로 다루어내는 솜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시문학은 결국 상상력을 통해 인문학적 사유를 펼쳐내는 것이리라. 형식과 장르를 불문하고 문학이란 모순 투성이인 인간 삶의 형상화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고안상 시인은 연륜을 바탕으로 삶의 이면을 통찰하는 문학적 성찰을 잘 보여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축하와 더불어 더 큰 정진을 당부한다./백인덕, 남태식, 안성덕
당선소감
조부님께서 많은 한시漢詩를 남기셨다. 나도 언젠가는 시를 쓰리라 마음먹었다. 정년퇴임한 뒤 먼저 수필문학교실에 발을 내디뎠다. 부족한 글이지만 수필집도 두 권이나 냈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미루어 두었던 시詩공부를 시작했다. ‘시를 쓰려면 먼저 많은 시를 읽고 이해하는 게 중요하고, 10년 정도는 매달려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조급한 마음에 문예교실도 부지런히 다니며 읽기와 쓰기 지도부터 받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를 쓰고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동안 몇 분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으며 열심히 습작했다. 부끄럽지만 몇 편의 시를 내놓았다. 뜻밖에 신인상을 받게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물론 좋은 작품이라 여겨 주시는 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 하라는 격려일 것이다. 겸허한 마음으로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도록 노력할 것이다. 오늘이 있기까지 성심을 다해 안내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계간 리토피아에도 고마운 마음을 표한다./고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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