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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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임/시(2023년 겨울 아라쇼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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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내장호수에 섬 하나
꼭 닮았다며
남편이 내 이름 붙여 주었다
소나무 사십여 그루
까치 세 마리
물 버들 대여섯 그루
물오리 십여 마리
금계국 오십여 포기
질경이 백여 포기
개미는 수만 마리?
수필집 ‘나를 닮은 섬’으로
창임 섬 소문났건만
작가는 다 가난한 줄 아시나,
알부자인 내게 시장님은
세금을 안 매긴다
까치처럼 물오리처럼 나도
남편 가슴에 무료로
세 들어 산다
낮잠
어린 시절 우리 집엔
우물이 없었다
두 집 건너 이웃에서 길어다 먹었다
한낮이면
우물 속 개구리 두 마리
울타리 가에 앵두나무 한 그루
스멀스멀 밀려오는 낮잠에
크게 입 벌리고 하품을 해댔다
마당 가 쇠비름처럼 늘어졌다
울타리 쪽으로 엉금엉금
숨어들던 사마귀 한 마리가
세상의 적막을 지켰었다
상추쌈에 꾸벅 든 낮잠 속
먼 우물이 깊다
두 마리 개구리와 빨간 앵두 간 곳 없고
하품 늘어진다
동백
낯선 해남 땅에 발령 받고
큰아들 데리고 갔다
불 잘 드는 방 구해 주신 박 장로님
어디 부족한 곳 없냐며 꼼꼼 살펴 주셨다
삼 년을 내 집인 듯 보냈다
정읍으로 이사 올 적 정표라며
동백 화분을 주셨다
어쩌다 안부 전화에
동백은 잘 있느냐 하셨다
그 마음 생각하며 정성 다했더니
꽃으로 답했다
눈에서 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오래 무소식이었다 더듬더듬
그분 작은 집에 전화해 보니……
지난봄 동백꽃 지듯 그만 툭,
나무에서 지면 땅 위에 피는 동백
땅에서 지면 마음속에 핀다고 했다
내 마음속 박 장로님
영영 지지 않겠다
꽃 피던 시절
삼 년 넘도록
내 속옷에 주황빛 능소화 피고
노란 금계국 피었다
울 엄마 얼굴엔 먹구름 피었었다
행여 삼대독자 대 끊을세라,
흰 접시꽃에 수탉이 좋단다
동네방네 동분서주
푹푹 고아 마시게 하셨다
내 속옷 하얀 백합 꽃잎 피니
휴, 한숨 돌리셨다
떡두꺼비 같은 손주 셋에
환히 먹구름 걷히셨다
벌써 오 년, 큰애가 감감소식 없다
흰 접시꽃에 수탉은 글쎄
어디 가서 구한담
꽃 피던 그 시절은 글쎄
어디 가서 찾는담
정지문 안
시커먼 가마솥이/부글부글 끓었다/고래 아가리 아궁이에선/된장 뚝배기가 뽀글뽀글거렸다//눈곱 낀 전깃불 아래/밥 짓는 그 시간/두 동서 서로 양념 치며/죽을 맞췄다//쉿, 입에 손가락 갖다 대며/시어머니 흠을 잡았다/밥 타는 냄새도 놓친 채/아궁이 들쑤셨다//어둑어둑 정지문 안,/저녁상 재촉하는 남편 흘기기도/안성맞춤이었다//차라리 매운 연기가 맵지 않던/내 안방 같던
심사평
잊을 수 없고 견딜 수 없게 하는 존재의 한순간
신문사 신춘문예와 문학 계간지 신인상 등 매년 새로운 시인들이 쏟아진다. 매년 수백 명의 시인이 새롭게 탄생한다.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라지만 시가 끊임없이 써진다는 방증이다. 말 그대로 ‘시인 공화국’이다.
문제는 시인이 넘치는 나라에서 더 이상 시가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가 어디 한둘이랴만, 필요 이상 어렵게 길게 쓰는 시인들의 문제가 맨 앞일 것이다. 더불어 오로지 시험으로만 접근하는 공교육, 영상미디어의 범람, 지극히 감상적이고 단순함만 요구하는 독자들의 감성도 문제일 것이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 『불멸』에서 간파했듯이 시의 천분天分은 어떤 놀라운 관념으로 우리를 현혹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한순간을 잊을 수 없는 것이 되게 하고 견딜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하는 데 있다. 필요 이상으로 길고, 어렵게 쓴다는 지적에 자유롭지 못한 시인들이 많은 요즘, 《아라쇼츠》는 2024년 봄호 시부문 신인상에 김창임의 「섬」 외 4편을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밀란 쿤데라의 정의에 딱 들어맞는 시편들이다.
김창임 시인은 지나간 세월과 시절과 사람을 호명하지만, 단순히 부르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다시 올 수 없는 세목細目들을 불러내 존재했던 한순간을 잊을 수 없게 한다. 견딜 수 없게 한다. 세상은 오래전부터 크고 많고 빠른 것들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김창임은 “까치”, “물 버들”, “질경이”, “개미”(「섬」) 등 대수롭지 않은 것들과 “우물 속 개구리”, “마당가 쇠비름”, “사마귀”(「낮잠」) 등 눈 크게 뜨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불러낸다.
축하한다. 등단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시적 스펙트럼을 넓혀 더 많이, 더 오래 기억되고 사랑받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남태식, 안성덕, 장종권
수상소감
신인상은 평생 한 번
어느새 칠십 대 중반이다. 되돌아보면 아득하다. 바람이 흩트려 놓은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듯이 내 삶도 그랬던 것 같다. 앞만 보고 내달린 인생 구비마다 밝고 따뜻한 햇살이 들어 버틸 수 있었다. 이십 대 후반에 결혼하고 삼십 대에 아이를 낳고, 그 후반에 집을 장만했다. 그리고 사십 대 이후에는 일에 빠져 살았다.
배우에게 신인상은 평생에 한 번 주어진다.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처음이다. 시인 등단 또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이 나이에 소녀처럼 두근대는 심장의 박동은 얼마나 신선한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될까?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런 설렘을 잊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서툰 시를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말씀 올린다. 항상 격려를 아끼지 않은 시 창작반 지도교수님과 문우들께도 마음 모아 감사드리고 싶다./김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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