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 신인상
- 수상자
- 투고작
김정자/시(2024 겨울)
페이지 정보

본문
김정자
변비 외 4편
그제도 어제도
너를 위하고 또 나를 위하여
밤늦도록 욱여넣었다
미리 취했던 걸까, 호기 부렸다
점심에 양배추 쪄
강된장 쌈했건만
똥구멍만 벌름벌름
벌써 사흘째 끄응 끙
순산은 글렀다
두리둥실 만삭인데
세상 무섭다는 걸 어찌 안 걸까?
나올 기미가 없다
먹는 것이 남는 거라고
박박 우겨주던 나쁜 놈들,
욕심껏 욱여넣고도 남은 피자가
비웃는 것만 같다
양수가 터지는 걸까 아 몰라
찔끔 오줌 몇 방울
꿈
아침 점심 건너뛰고
세 시간 걸었다
세상은 너무도 솔직하다
저울눈 보기 싫어 눈을 감는다
빙글빙글 머릿속에
쇳덩이라도 들었나,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벌거벗은 통닭이
몸통 없는 족발이
줄줄이 내달린다
밤새도록 꿈속을 뛴다
한 마리 돼지,
아니 증량이 더 어렵다는
역도선수가 되어 끄응 끙
황저우에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금메달! 금메달!
이런, 아직도 퍼질러 자냐?
해가 중천이다
주태백이
봉분도 없는 묘에
막걸리 한 병을 들이붓는다
그렇게 환장하던
한 잔술에 열일곱 그 에린 것을,
목구멍에 술이 넘어갑디까
주둥이가 크면 됫밥을 먹겠소
말밥을 먹겠소
그제는 분했소 또
어제는 보고 자펐소
모가지 돌아가게 넘겨다본 사립문
삭아 내리도록 어찌 한 번,
시집살이 암만 소태 같아도
풋콩 걷어버린 당신만 했겄소
서리태까지 얕보기에 애먼 덕석만
빵구 나게 팼었소
아버지
아직도 술맛 여전허요?
자반고등어
내리 딸 일곱에 겨우 건졌다는
삼대독자 아버지
쥐면 깨질까 놓으면 날아갈까,
없는 살림에도 비린 것만 쩌금거렸다고
벌써 사흘째
달구새끼 덕석 허적거리듯
밥알을 새며 깨적거린다
말없이 나를 쫀다
써금써금한 어물전
쉬파리 덤벙거린다
시퍼런 배춧잎 한 장에
떨이 자반고등어 두 손
꽁다리 자른 묵은지에 멸치 여남은 마리
숭덩숭덩 양파 대파가 팔팔 끓는다
내가 끓는다
이빨 다 빠진 아버지
물간 고등어보다 더 비리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한 그릇 달게 비운다
으슬으슬
먹장구름도 나처럼
말을 안 듣나, 하늘이 쿵쾅쿵쾅
생전 엄마처럼 가슴을 친다
마중 나온 반 아이 엄마들
빨강, 노랑, 운동장이 온통 꽃밭이다
장독가에 흐드러진
분꽃이라도 찧어 바르고 오지 않고,
발랑 까진 우산을 쓰고
갯벌 뒤지다 온 할머니,
널배 대신 고무신을 띄우려는 걸까,
작달비 내리꽂히고
없는 뻘게 구멍이라도 기어들고 싶은데
우르릉 반 아이들이 몰려온다
미정아, 미정아
패대기친 우산 대신
내빼는 내 손 잡느라 고꾸라진 할머니
퉁퉁 분 국수 가닥 같던
장맛비 그친 지 한 식경
할머니 대신 내가 으슬으슬
펄펄 끓고 있다
심사평
우리들의 오늘을 위한 어제
시는 순수한 정서의 표출이라고도 하고 사람을 흥분·고양 시키는 문학 양식이라고도 한다. 정서 표출이든 사람을 흥분 고양 시키는 문학이든, 상대 즉 독자가 있어야 한다. 자기연민에 기인한 자기 정화이니 형식이든 내용이든 상관없다고 한다면 할 말 없다. 다만 형식만 갖춰 굳이 시라 말할 필요가 있느냐, 반문은 가능하겠다.
김정자의 「변비」 외 4편을 《리토피아》 2024년 겨울호 신인상 시부문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응모한 작품 전편에 견지하는 일관된 시적 형상화와 고른 수준이 평자들의 눈에 들었다. 작금의 시단 일각에 유행병처럼 번진 그렇고 그런 감성과 추억 소환에 그치고 마는 시를 추종하지 않아서 안심했다. 담담한 필치로 그려낸 「변비」, 「꿈」은 차고 넘치는 세상의 이야기다. 이미 중증인 비만 사회를 은유하고 있다. 세월의 대척점에 있는 「주태백이」, 「자반고등어」도 얄팍한 감성에 기대지 않고 삶의 가운데에 들어가 공감하려는 자세가 믿음을 주었다. 평론가 김현의 말대로 문학은 배고픈 거지에게 빵 하나 주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세상에 배고픈 거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추문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인터넷과 SNS의 과도한 의존은 우리 삶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현대인들은 스스로 자폐의 길을 택했다. 나만 있고 너와 우리는 사라졌다. 오늘과 내일만 있고 어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어제 없는 오늘이, 내일이 어찌 존재하겠는가. 시에 너와 우리의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다. 어제의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다.
등단을 축하한다, 상투적인 이야기이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눈 크게 뜨고, 멀리 많이 보고, 오래 생각하기를 바란다. 어제를 잊지 말되 어제에 매몰되지는 말기를 바란다./안성덕, 남태식, 손현숙
수상소감
아버지께로 달려갑니다
시에 뜻을 두었던 시절, 아버지가 가슴에 대못을 박으며 막아섰습니다. 말짱한 날개를 부러뜨려 접었었습니다.
빛바랜 꿈이 한물간 저를 발 벗고 마중 온 것 같습니다. 예총 시창작반 지도교수님 수업은 큰 행운이고 축복이었으니까요. 날이 갈수록 더 어려운 시, 샘이 깊지 않아 한 종지 퍼내면 금방 바닥이 드러나 한계를 느끼기도 합니다.
아직 걸음마 중인 제 손을 잡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더 열심히 더 많이 갈고 닦겠습니다.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얼른 아버지께로 달려가야겠습니다. 반세기 피멍 든 가슴에 녹슨 못, 빠지려나 모르겠네요./김정자
- 이전글김정옥/시(2024 겨울) 25.02.09
- 다음글김창임/시(2023년 겨울 아라쇼츠) 24.09.1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