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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섭/소설(2025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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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섭
어머니의 춤
털썩 운전석에 나를 부렸다.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조여 왔다. 사장의 호출을 받고 사장실로 올라갔었다. 한참 뜸을 들이던 사장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김 부장, 논조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오히려 격려해야겠지만……. 가뜩이나 광고가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나도 참…….”
사장은 말을 맺지 못했다. 나는 며칠 전, 관행처럼 이루어지는 재벌의 분식회계와 불법 상속에 비판적 의견을 피력했다. 전에 비해 날카롭게 쓴 기사도 아니었다. 그러나 광고주인 해당 기업에서 광고 철회를 운운하며 압박해 왔다고 한다. 경제 논리로는 신문사도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에 불과하다. 기실 나 역시 정의나 양심을 외치기 전에 가족부터 돌봐야 하는 가장이다.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을 바라며 겨우 모깃소리를 내는 신문사 일개 부장인 나를 왜들 강성이라고 날을 세우며 몰아대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세상을 경제 논리로 재단한다 해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은 저버릴 수 없다고 백번 다짐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고 핸들을 잡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이른 퇴근, 거리는 한산했다.
며칠 전 밭에서 일하다가 쓰러진 어머니를 숙부가 발견하여 119구급차로 J대학병원으로 옮겼다. 초저녁에 우연히 들른 숙부가 불이 꺼진 것이 의아해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고 한다. 어머니는 텃밭에 쓰러져 있었다. 다행히 하루 만에 깨어났다. 상태가 안정되자 나는 서울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이송했다. 노환으로 인지장애가 있으며 각별한 보호가 필요하다는 담당의 진단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여든을 넘은 어머니가 여전히 건강하리라고 믿어온 무심한 나 자신에게 소름이 끼쳤다. 신문 지면에 효를 잊은 시대를 한탄하는 기사를 올리면서도, 막상 내 어머니를 잊고 살아온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병원은 마치 시장통 같았다. 새삼스레 이렇게 아픈 사람이 많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상은 환자들이 가득했으며 보호자와 방문자들 소리로 묘한 활기마저 느껴졌다. 어머니는 구석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모로 누운 얼굴이 삭정이 같았다. 다가가 의자에 앉자 어머니는 어슴푸레 실눈을 뜨고 힘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카랑카랑 당당하던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저 초췌하고 무기력한 시골 노인이었다.
“좀 어떠셔요 어머니?”
“응 이제 개안타. 인자 집에 갈란다. 들거지들도 널렸을 턴디.”
어머니는 들릴락 말락 힘없이 웅얼거렸다. 어서 빨리 시골집에 가고 싶다는 애원 가득한 얼굴로 간절히 나를 바라보았다.
“이젠 일하시면 안 돼요. 우리 집으로 같이 가십시다.”
어머니는 흠칫 놀라며 내 얼굴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시골집에 못 간다는 내 말에 망연자실, 어머니의 얼굴은 실망을 넘어 체념으로 어두워졌다.
“밥은 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디. 들일은 못 헐랑가 몰라도…….”
들릴락 말락 웅얼거리며 병실 바닥에 눈을 주었다.
“당신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일찍 퇴근하세요?”
퇴근해 있던 아내가 뜨악하게 물었다.
“병원에 들러 어머니 뵙고 오는 길이오.”
“좀 어떠시던가요? 창식이 핑계로 못 가봐 죄송하네요”
“이제 집으로 모셔 와야 할 것 같소.”
나는 혼잣말하듯 툭 한마디 던졌다.
“모셔 와도 닭장 같은 아파트 구석방에서 어떻게 지내실지……”
“예?”
“창식이도 올해 고3이고, 나도 학교에 출근해야 하는데……. 저- 여보 창식이 대학입시까지 1년만 요양병원에 모십시다.”
아내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그건 절대 안 돼!”
단호하게 아내의 말을 잘랐다.
나는 마지못해 몇 숟갈 뜨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서재 소파에 무기력한 몸을 부렸다. 난마처럼 뒤엉킨 현실적인 여러 문제로 마음은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엉킨 실타래를 풀어보려 실마리를 찾을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해답 아닌 무수한 잡생각들만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무엇 때문에 나는 그토록 정신없이 살아왔는가? 그렇게 치열했던 삶으로 과연 무엇을 이루었는가? 그동안 외쳐온 목소리가 이 시대에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었던가?’
‘맞벌이로 숨 가쁘게 살아온 대가가 겨우 집 한 칸? 그렇고 그런 가정? 이게 나의 꿈이었던가? 그 많던 이상은 다 어디로 갔는가?’
‘어머니의 가르침 대로 당당하고 정의롭게 살아왔던가? 어머니가 평생을 희생하며 그토록 바라시던 출세란 대체 뭐란 말인가?’
회한과 아쉬움 가득한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아버지 기억은 없다. 아버지는 그저 안방 벽에 걸린 빛바랜 흑백 사진 하나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내가 두 살 때 아버지는 큰 산에 있는 금광에서 일하다가 매몰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겨우 스물 몇에 어머니는 청상과부가 되어, 나 하나만 붙들고 평생 가난을 숙명처럼 짊어진 채 녹아내렸던 것이다. 오직 나 하나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느라 평생을 다 바치셨다.
내가 다닌 J중학교는 집에서 20여 리 떨어진 읍내에 있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20여 리를 걸어 통학했다. 어느 날 방과 후 읍내에 사는 친구를 따라나섰다. 시장통을 지나다 저쪽 길 가장자리에 앉아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보자기를 깔고 쑥과 산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흥정했다. 초라한 모습으로 어머니가 읍내 시장에서 나물 장사를 하리라곤 미처 생각지도 못했었다. 막 사춘기의 창피함과 알 수 없는 설움이 밀려와 푹 고개를 숙이고 친구 몰래 울음을 삼켰다.
어머니는 항상 새벽 일찍 일어났다. 내 아침밥과 도시락을 소반에 챙겨두고 들에 나갔다가 어둑어둑 땅거미보다 늦게 돌아오곤 했다. 자주 남의 집에 품을 팔았다. 어떤 날엔 귀한 흰 쌀밥과 비린내 나는 생선 반찬을 얻어와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함께 먹었다. 그랬다, 삯일이 없는 날이나 비가 와서 일을 못 할 때면 들과 산을 헤매며 나물을 뜯어 장터에 나와 팔곤 했던 것이다.
“내 새끼 공부도 잘하고 참 착허지. 기죽지 말아야 헌다.”
가끔 눈깔사탕을 쥐어주었기에 그냥 시장에 다녀오는 줄만 알았었다.
돌도 소화 시킬 나이인 친구와 나, 모락모락 김이나는 빵 가게 찐빵이 눈에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던 우리는 찐빵 몇 개를 들고 냅다 뛰었다.
“저 저 도둑놈 잡아라!”
한 모퉁이도 못 돌아 주인의 두꺼비 손에 덜미가 잡혔다. 고개를 처박은 나 대신 어머니가 빌고 빌었다.
“사장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시오, 다 이 애미가 잘 못 가르친 탓이고만이라우.”
“이 호래자식!”
식식거리던 빵집 주인은 마지못해 물러섰다. 그날 밤 어머니는 마당 가 울타리에 세워진 싸리비에서 싸릿대 세 개를 빼놓고 나를 불렀다.
“이놈아, 애비 없는 호래자식이 자랑이더냐? 내가 너를 그렇게 갈쳤냐? 밥을 굶겼냐? 모래밭에 쎄를 박고 죽어도 남의 것은 쳐다도 보지 말랬거늘! 친구가 먼저 꼬셨어도 니놈이 말렸어야지!”
종아리에서 피가 나게 회초리를 치셨다. 싸릿대 세 개가 몽그라졌다. 새벽녘 잠결에 눈을 떠보니 어머니는 등잔불 아래 삯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내 강아지 깼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불을 덮어주며 토닥여주었다. 어머니가 편히 잠드는 것을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시절에는 헐벗고 끼니를 건너뛰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내 옷이며 신발이며 책가방은 누구에게 빠지지 않았다. 굶어본 기억도 없다. 도시락엔 간간이 흰쌀밥과 귀한 계란말이가 들어 있기도 했다.
성적이 좋아 나는 도청소재지 전주에 있는 J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도시로 이사 간 가난한 고모 댁에서 하숙했다. 어느 일요일, 시골집에 다니러 왔다가 돌아가려고 지름길인 산길을 어머니와 걷고 있었다. 어머니는 커다란 쌀자루를 머리에 이고서도 앞장서 가뿐하게 걸었고, 나는 작은 보따리를 들고 후적후적 따르고 있었다. 이윽고 신작로에 이르고 버스가 멈추자, 어머니는 재빨리 쌀자루를 버스 안에 밀어 넣으며 어여 가거라, 손을 내저었다.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나는 먼지 낀 유리창을 손바닥으로 닦아가며 점점 작아지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버스가 일으키는 흙먼지 속으로 희미하게 멀어져가는 어머니가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속에서 장승인 듯 오래 서 있었다. 행여 닳을세라 보기도 아까운 자식을 보내며 허전해 눈물을 감추고 있었으리라. 아련한 그날의 코스모스와 어머니의 모습은 한 장 사진처럼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찍혀있다.
남부터미널에 내려 쌀자루를 메고 서노송동 고모 집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달동네인 서노송동 사글세 방에 사는 고모 가족에게는 내가 메고 오는 쌀자루가 귀한 식량이었다. 쌀자루를 멘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파져 오면 버스 뒤로 작아지던 어머니의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땀 범벅, 눈물범벅 나는 언덕길을 올랐다.
서울의 K대 인문대학에 합격했다. 사립이라 등록금이 우리 집 형편으로는 벅찬 금액이었지만 어머니는 미리 장만해 놓으신 듯 돈 걱정이랑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며, 돈뭉치를 꼭 쥐어주었다. 나는 작은 자취방을 얻어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다음 해 고향에 갔을 때 길에서 우연히 숙부를 만나게 되었다. 숙부는 주저하더니,
“내가 이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만, 어차피 너도 알아야 할 것 같다. 작년에 니 대학 등록금을 마련할 때 니 어머니가 건넛마을 박 부자에게 장리 빚을 얻었니라.”
“예? 장리빚요?”
“쌀 한 가마 이자가 일 년에 반 가마다. 없는 사람에게 장리는 큰일 나고 말고……. 아암, 필경 집안 말아먹고 말지! 여자 홀몸으로 아무리 억척스레 품을 판들 그 큰돈을 어떻게 갚것냐?”
결국 아버지 유산이자 우리 집 전 재산인 서당골 논 두 마지기가 박 부자에게 넘어갔다고 했다. 순간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서당골 두 마지기는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땅이었다. ‘그래, 내 처지에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 서울에는 공장도 많으니 막일을 해서라도 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돈을 모아 반드시 그 논을 찾아야 한다. 공부는 그 후에 생각하자’, 두 손을 쥐고 다짐했다. 가슴이 부르르 떨려왔다.
집에 오자 어머니는 밑반찬을 챙겨주며 어서 올라가라고 재촉하였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작심하고 말했다.
“어머니 나 학교 그만둘래요.”
어머니는 흠칫 놀라더니,
“뭐시라고?”
넋 나간 모습으로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아이고 울음을 터트렸다. 어머니가 눈물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니놈은 어찌 애미 마음을 그리도 모른다냐. 산 아래 이 근동 몇 동네서도 서울로 그 높은 대학을 간 사람은 너밖에 없다. 애미는 니 생각만 하면 아무리 일을 해도 심들지 않고, 몇 날을 굶어도 암시랑 않다. 니가 그렇게 자랑스럴 수가 없다. 이 애미는 그 재미로 살아간다. 아직 내 몸 성하니 먼일이라도 해서 돈은 벌 수 있다. 너는 그저 공부만 열심히 허면 된다. 제발 기죽지 말고 당당하거라.”
어머니는 두서없이 말을 이어갔고,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눈물만 삼켰다.
대학 졸업반 때 지방 어느 교도소에 갇혀있었다. 당시 어지럽던 정국,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엮였다. 푹푹 삶아대던 여름날, 어떻게 알았는지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교도관 입회하에 나무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천장에는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납덩이 같은 우리의 답답한 심사를 식혀 주지는 못했다. 탁자 위에는 어머니가 삶아온 계란 몇 알이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까맣게 여윈 얼굴로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적셔가면서 입을 여셨다.
“니가 왜 이런 곳에 있단 말이냐. 너는 죄지을 사람이 절대 못 된다. 내 배 아파 낳은 내 새끼는 애미가 잘 안다. 암! 알고말고. 죄가 없어 곧 풀려날 터이니 걱정일랑 말고 부디 몸 보전해야 헌다.”
어머니는 내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작심한 듯 당신 말씀만 마구 쏟아냈다.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어머니 얼굴만 처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잘 먹고 그런대로 지낼만하니 걱정마셔요.”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겨우 한마디 했다. 면회 시간은 금방 끝나 어머니와 나는 돌아서야 했다. 철문이 닫히기 전 뒤돌아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통로가 아닌 듬성듬성 잔디가 깔린 흙바닥을 후적후적 걸어가고 있었다. 몇 걸음도 못 가서 이내 비틀거리더니 그만, 땅바닥에 푹 주저앉았다. 꺼졌단 말이 맞을 것이다. 웅크린 좁은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태양에 유난히 작은 체구의 어머니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철문이 철커덕, 닫혔다. 어머니가 삶아온 계란을 먹지 않았건만 가슴이 꽉 막혔다. 막힌 가슴을 두 주먹으로 아무리 쳐대도 뚫리지 않았다. 내 앞에선 그토록 강한 척하지만, 어머니는 한낱 연약한 여자였다.
결혼하고 자식도 낳고 신문기자라는 직업으로 숨 가쁘게 살아왔다.
기껏 아버님 제사 그리고 명절 때나 고향에 내려가 잠깐 어머님을 뵙고 또다시 바쁜 일상에 묻혀 버렸다. 바리바리 싼 어머니의 체취가 담긴 보따리들이 아파트 구석에서 한동안 머물다 버려지기도 했었다.
어머니 간병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아내와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일주일이 되도록 평행선이었다.
“나도 잘 알아요. 어머님을 제가 모셔야 한다는 것쯤. 그런데 어렵사리 당신 교감 승진한 지 겨우 일 년이고, 아니 더 중요한 건 창식이가 지금 고3 입시생이란 말이에요. 정말 죄스럽지만 창식이 S대 들어가면 내년부터 내가 모실게요.”
“아니, 내 말을 귓등으로 들은 거여? 그럴 어머니가 아니란 말여! 왜? 어머니가 기다려 준답디까?”
내 말투는 점점 거칠어만 갔다.
“당신이 어머님 아들이듯 창식이도 내 아들이에요.”
아내도 물러서지 않았다. 자식 일만큼은 평소와 달리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이대로 이어지는 삶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불현듯 언젠가 책장 구석에 찔러둔 담배가 생각났다. 주방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여 몇 모금 빨았다. 어지럽고 소태보다 썼다. 내뿜는 담배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거푸 세 개비를 빨았다. 결심을 굳히자 그동안의 혼란이 사그라들었다. 오히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먼저 신문사 사장에게 사직서를 써 봉했다. 간단하게 작성한 사직서에는 오직 개인적인 사정이라 했다. 한 개비를 더 피운 후 아내에게도 편지를 썼다.
“미안하오. 가장 노릇도 제대로 못 한 주제에 고집만 피우는 무능한 나를 용서하시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더 이상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소. 무능한 남편을 부디 이해해 주었으면 하오. 미안하오. 당신이 우리 가정을 잘 꾸려가리라 믿소.”
나는 이미 눈물이 흥건했다. 밤새 꾸린 짐을 차에 싣고 어머니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여보, 이대로 가버리면 안 돼요! 안돼!”
아내는 깊게 울며 매달렸고 창식이는 엉거주춤 서 있었다. 어머니는 시골집으로 같이 가자는 말에 마냥 좋아하면서도 머뭇거렸다.
“너 회사에 가야 할틴디.”
“당분간 휴가를 냈으니 걱정마셔요.”
그렇게 어머니와 시골 생활이 시작되었다. 먼저 방을 수리해 어머니의 침대를 마련했다. 나는 침대 옆 바닥에서 이불을 깔고 잤다. 주방 시설도 편리하게, 모든 것을 어머니의 동선을 고려해 집을 고쳤다. 하루종일 어머니를 살피고 집안일을 하며 보냈다. 그동안 하지 않던 일들인지라 낯설고 서툴렀다. 그러나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거나 귀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들로 그동안 나를 짓누르던 무거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서툰 일들은 서서히 익숙해졌고 어머니와 일상은 한결 안정되어 갔다.
숲해설가로 근처 숲에서 관광객들에게 해설도 했다. 고향 J시 시장으로 있는 선배가 내 실정과 경력을 인정하여 임시직으로 배려해 준 것이다. 관광객들에게 나무와 숲을 해설하고 산림의 관광 자원화를 기획하는 일이었다. 오전 세 시간만 근무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숲에 대한 지식은 미진했지만, 전공을 살려 인문학적인 주제를 더해 ‘자연과 인간의 삶’이라는 컨텐츠도 만들었다. 소통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다 보니 호응이 좋았다.
어느 날 오후 잠시 외출하고 돌아오는 나를, 어머니가 대문 간에 나와 학수고대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어머니의 얼굴은 금세 지고 없는 함박꽃처럼 피어났다.
“어머니 오늘은 저와 술 한잔합시다.”
어머니가 좋아했던 육회와 막걸리를 사 온 참이었다. 봄볕이 따사롭게 감싸주는 마루에 마주 앉았다. 술잔이 오갔다. 모자간의 마음은 상기되어 갔고 따스한 정은 조용히 흘렀다. 빈속에 몇 잔 막걸리가 들어가자 거나해졌다. 나는 둥둥 북을 치며 노래 불렀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청청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속엔 희망도 많다.”
예전 어머니가 고된 일을 하다가 잠시 쉬며 흥얼거리던 노래였다. 오랜만에 아니 생전 처음으로 모자지간의 흥은 더욱 무르익고 있었다. 노을도 유난히 붉게 타올랐다.
어머니는 흥에 겨워 덩실덩실 아니 엉거주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 겨우 두 살에 홀몸 되어 하나뿐인 아들 평생 뒷바라지한 세상, 언제 한 번 춤추고 싶었겠는가? 하나뿐인 피붙이 먹이고 가르치느라 정신줄 놓고 산 평생이었다. 다 늙고 병들어 금쪽같은 새끼와 같이 산 세월이 흡족하였을까? 하늘로 돌아가 만날 젊으나 젊은 그리운 남편, 떳떳이 만날 수 있어 행복한 걸까? 여자를 잊고 어미로만 산 평생이 그래도 싫지만은 않은 걸까? 아니, 아니 모든 게 그 반대일까? 어머니는 너울너울 비틀비틀 춤을 추었다.
창식이는 아내가 소원했던 S대에 합격했다. 아내는 왜 그토록 S대를 고집한 것인지……. 돌아서면 남이라더니, 아내와는 가뭄에 콩 나듯 형식적인 안부 전화 말고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신문사는 사장님 특별 권한으로 언제든 복직이 가능한 장기 휴가 처리되었다는 총무부장의 전화를 사직서 제출 직후 받았었다.
따뜻한 봄날에는 어머니와 꽃 나들이 다녔다. 휠체어를 밀고 느릿느릿 걸으며 모자지간 이야기는 꽃보다 아름답게 이어졌다. 여름밤 모깃불을 피워놓고 멍석에 나란히 누워 어릴 적 추억을 더듬었다. 국자 같은 북두칠성은 그대로였다. 붉을 대로 붉은 고추도 함께 땄다. 가을볕 따사로운 마당을 맨발로 걸었으며 덕석에 고추도 말렸다. 누렇게 익은 나락 사이로 꾸불꾸불 논두렁을 어머니를 업고 마냥 거닐기도 했다. 소담스럽게 첫눈이 내리면 방문을 열어놓고 추위도 잊은 채 옛이야기는 오래오래 이어졌다. 어머니의 눈가엔 자주 눈물이 고였고, 내 눈에도 까닭 없는 눈물이 주르르 흐르기도 했다. 나는 틈틈이 책을 읽고 글도 썼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시와 수필도 써 몇 차례 지역신문에 투고했다. 잃어버렸던 순수한 감성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그렇게 5년 세월이 꿈같이 흘렀다. 내 삶도 조용히 재편집되었다.
어느 늦은 가을날 어머니와 뒷산에 갔다. 어머니는 솔잎과 잔 나뭇가지를 정성스레 모았다.
“어머니 그걸 왜 모으세요?”
“군불 때야지야”
두꺼비처럼 굼뜬 어머니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나도 두리번거리며 나뭇가지를 주워 모았다.
“아자씨는 누구다요?”
어머니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아들 정우여요 어머니”
“우리 아들은 어린디.”
어머니는 점점 쇠약해졌다. 기억을 잃어갔다.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내가 누구인지도 헷갈렸다. 그러다가 가끔은 내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때때로 어머니의 말은 먼 시간여행 같았다.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아니 어머니에게 나는 여전히 환갑 지난 세 살배기 어린애였다. 날이 갈수록 어머니는 더 많은 것을 잊고 잃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이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어머니의 평생이 마지막으로 흐르는 걸 알았지만 이상하게도 애달프지 않았다. 한 많은 어머니의 평생이 너무도 고달프고 험난한 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뜰앞 은행나무에 남은 몇 잎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던 날, 까마귀가 까악 까악 깍 유난스럽게 울어댔다. 하늘은 금세 눈이라도 퍼부을 듯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침대에 누워 내 손을 꼬옥 잡은 채 편안하게 가셨다. 신방을 꾸리고, 나를 낳고 첫 국밥을 떴던 방이다. 아버지가 저승길에 잠시 쉬어가셨던 그 방이다. 갑자기 세상이 멈췄다. 나는 적막해졌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하나도 슬프지 않았고 외려 경이로웠다. 내 눈에만 그리 보였을까? 어머니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지는 듯만 했다. 어머니가 늘 그렸을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고 생각했다. 선산 아버지 곁에 어머니를 모셨다.
나는 집 모퉁이에서 어머니가 입던 옷과 쓰던 물건들을 모아 태웠다. 그동안 어머니와의 추억도 불꽃 속에서 활활 타고 있었다. 아내와 아들이 뒤에서 묵묵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솟아오르는 불꽃 연기 속에 그날처럼 어머니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연기와 함께 저 하늘로 멀리멀리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나는 사라지는 연기를 보며 아무도 모르게 혼잣말했다.
“어머니 사랑해요. 아니 사랑했어요. 어머니는 내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의 의미를 깨우쳐주었어요. 어머니는 내 삶의 좌표를 설정해 준 가장 큰 스승이지요. 5년은 결코 제 인생의 여백이 아니에요. 행복과 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된, 말년의 어머니와 같이한 날들은 제 인생의 가장 화려한 날로 기억될 겁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핸드백에서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 신문사 사장이 어머니 돌아가시면 전해주라며 주신 편지였다.
“나는 이 시대에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소. 광고주인 그 기업에서 공갈 협박에 금전 회유까지 집요했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야 알았습니다. 김 부장의 청렴과 사회정의 실현 의지를 존중합니다. 모친과의 행복한 이별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존경합니다. 강자 독식과 금전만능이 횡행하는 현 우리 사회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함께하고 싶습니다. 기다리겠소, 반드시 복귀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가족, 아내와 S대 졸업반 아들, 그리고 내가 탄 차는 서서히 고향을 뒤로하고 서울로 가는 큰길로 접어들었다. 그새 아버지라도 만난 건가, 저만치서 어머니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동구 밖까지 따라오며,
“운전 조심하거라.”
손을 흔들었다. 룸미러 속에 오래 서 있었다.
당선소감
이야기의 힘을 믿습니다
어릴 적 조르고 졸라 듣던 어머니의 이야기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혹부리 영감에 소금 장수, 매일 반복 상영이었지만 들을 때마다 새로워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곤 했었지요. 어쩌다 도깨비라도 출연한 날 밤엔 참다 참다 이불에 오줌을 싸기도 했고요. 이야기의 힘을 믿습니다. ‘아리비안 나이트’의 ‘천일야화千一夜話’처럼 이야기는 나라를, 사람을 구하기도 한다지요.
황혼 녘에 글을 쓰며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누군들 소설 몇 권 아닌 인생 있을까마는 나도 꺼내 보면 족히 장편 열 권은 될 듯합니다. 문학의 언저리를 배회하며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온 이야기들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돌아보면 삶은 늘 경황없었지만 이제 비로소 그 여정을 풀어낼 여유가 찾아왔습니다. 우연히 ‘영화’를 접하게 되면서 직접 쓴 대본으로 나 자신의 이야기를 구현해 보겠다는 열정도 타 올랐습니다. 지난해에는 내 삶에 픽션을 가미해 쓴 시나리오를 영화화해 실버영화제에서 대상을 받는 과분한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아직 서툴고 미숙한 글이 등단이라는 선물을 받게 되어 마냥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민망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하세요’라는 격려로 알고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길잡이가 되어 주신 A 교수님과 계간 ‘리토피아’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 내 삶뿐만 아니라 건너온 시대도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야기의 힘을 믿고 더 깊이 사유하겠습니다. 말석에라도 문학의 곁에 머물겠습니다. 뼈를 세우고 살을 불려준 고향 자연에 머물며 향기 나는 삶을 오래 이어가고 싶습니다. 천하루 밤을 넘어 끝없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김근섭
심사평
이 시대를 향해 던지는 훈훈한 메시지
소설은 허구이나 본질적으로 서사의 구조를 갖고 있다. 서사는 곧 이야기이며 이야기를 전개함에 있어서 적절한 인물과 구성을 통해 독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한다. 흔히 소설은 인생을 반영한다고 한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소설은 현실에 뒤처지거나 현실이 소설보다 독하다는 말이 있다. 그 모든 문학 이론을 갖춘 작품이라 하더라도 소설은 이 세상에 존재하거나 혹은 있을 법한 이야기를 가공하고 재구성하여 한 편의 이야기라는 장르로 탄생한다.
김근섭의 「어머니의 춤」은 이 시대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감동적인 서사로 쓴 작품이다. 구성은 전통적인 소설 형식을 취했다. 이 소설은 현실과 회상이 반복되는 구조이다. 신문사 부장인 ‘나’는 어느 날 시골에서 홀로 살고 있는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전갈을 받는다. 어머니를 서울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모신 후 간병을 하며 어머니의 문제로 아내와의 의견 조율이 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현실적인, 우리 사회에서 누구나 겪는, 있음직한 내용이 전개된다. 입시를 앞둔 아들 창식의 문제로 어머니를 모시는 일은 난관에 부딪친다. 아내는 아들이 대학에 입학한 일년 후까지만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자고 말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한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집으로 내려간다. 일찍 혼자가 된 어머니가 ‘나’를 키우며 고생한 경험이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는데 전통적인 어머니 상과 효자의 이야기처럼 보여지나 그 이면에는 무너져가는 우리의 전통문화와 정신 세계가 녹아 있다.
빠르게 현대화로 접어든 우리 사회는 부모와 자식 사이라든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와 인정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소설이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복잡한 현실과 이기적인 개인주의에 밀려난 우리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직서를 반려한 언론사 사장의 편지는 양심과 희망의 메시지를 준다. 광고주인 기업으로부터 받은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청렴과 사회정의를 실현한 직원인 ‘나’를 인정해주고 어머니 장례식 후 다시 복귀하기를 바란다는 사장의 편지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이 시대를 향해 던지는 훈훈한 메시지라는 점에서 소설의 효용 이론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이 소설을 통해 안정된 문장과 호흡으로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 기대를 갖게 된다./유시연 안성덕 장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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