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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시(2025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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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시부문
김현정
순례 외 4편
걸음마 떼고 땅과 나 사이
발걸음 무겁고 고달팠으니
이젠 맞지 않는 신발 대신
맨발 신고 길 나선다
맨발에 마음 귀가 열리니
조약돌이 하는 말 듣긴다
바닷가 모래알도 말을 한다
따스한 발이 손처럼
가을이 떨군 도토리, 밤톨을 줍는다
간혹 돌부리에 차여 비명도 토하지만
마음의 각질 벗겨내고
달보드레한 흙의 전언을 듣는다
지구 경전을 넘긴다
어머니 탯줄 같은 산길
맨발로 걸으면 온몸에 피가 돈다
고봉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운 듯
한겨울 잉걸불이 타는 듯
오늘도 나 탁발승처럼 맨발의 바리때 들고
걸식을 나선다
봄똥
진눈깨비 날리는 텃밭
누군가 배내똥 한 무더기 지려놓았네
아가 똥 나온다 똥, 똥
아버지 힘 주세요 힘
그해 겨우내 녹음기를 튼 듯
병실을 휘돌던 레파토리
시원허게 싸면
시방 죽어도 여한 없겄다,
누런 전잎인 듯 둘러선 자식들에게
고작 한마디 남기고
아버지 이승의 괄약근을 놓으셨네
겨울 끄트머리
다 쏟고 가신 아버지 같은 대지에
새봄의 배내똥인 양
모락모락 봄똥이 핀다
채송화, 붉다
터진 살림을
한 땀 한 땀 시침질하느라
뙤약볕 아래서 늘 벌건했다
문래동 봉제공장에 간 언니가
이따금 부쳐오는
어머님 전상서에 더
붉어지곤 했다
마이신, 사카린, 활명수며 바세린
바리바리 지고 친정 동네에 가셨다
쌀, 보리 위에 저녁노을까지
얹어 이고 오던 돌팔이 가장
찬밥 한 덩이로 남겨져 동생이랑
긴 오후 나절을 봉숭아 꽃잎처럼
다독다독 빻곤 했다
목을 빼고 해그림자가 얼른
길어지길 기다렸다
자꾸만 구멍 나는 살림살이
서툰 시침질에 나는
그날의 어머니처럼 자주 눈이 붓는다
웅크린 채송화처럼,
유년의 울타리는 늘 기울어져 있었고
그 아래 채송화 붉었다
보따리에 눌린 어머니 같은 꽃
다문다문 피어 있었다
깻잎장아찌
몇 장 땄는디
장아찌 눌러둬,
정 많은 십년지기 정자 언니가
뙤약볕 한 보따리 부리고 갔다
후루룩 씻은 깻잎 한 소쿠리
한숨처럼 부푼다
에휴, 이걸 어느 세월에 다
딸내미 핸드폰에 코 박은 사이
반토막 난 일요일 오후가
금세 침침해진다
소금물에 정궜다가
간장 푼 물에 식초에 액젓,
고래기 끼지 말라고 소주 쪼끔
사람이든 음식이든 삭어야 헌다
아득한 어머니 지청구가 누름돌처럼
아픈 허리를 자박자박 눌러준다
찔끔찔끔,
남은 소주 몇 잔 털어 넣는다
깻잎보다 내 얼굴이 먼저
간간해진다
가는 봄
레드카펫 위 연분홍 드레스
한 줄 실오라기 바람에도 아슬아슬
겨우내 몸피 줄이느라
오르락내리락 바빴었지
아랫녘 봄소식 예고편에
조회수 뜨거웠지
16부작 미니 시리즈 여주인공처럼
시청률 걱정에 속이 탔지
어느 날 악플 같은 비바람에
서둘러 조기종영
화무십일홍이니 화양연화니
평점 뻔한 리뷰를 날릴 거고
난 그저 도로변에
초록 히잡 쓴 엑스트라
채 지우지 못한 마스카라처럼
검은 눈물 보도에 흘러내릴 때
발자국마다 찍혀지는 봄의 마침표
심사평
익숙한 듯 남다른
새해 벽두 신문사 신춘문예 당선 시들이 쏟아졌다. 신문사에 잡지, 해마다 수백 명의 시인이 태어난다. 가히 ‘시인 공화국’이라는 말 무색하지 않다. 족히 일만을 넘는다는 시인, 남달라야 한다.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이 무당의 공수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차별화되어야 선자選者의 눈에 든다. 살아남는다. 기성과의 차별화는 주제, 소재, 상상력, 이야기 방식 등 여럿이겠다.
문학은 사람의 일이다. 사람의 이야기다. 그러니 세상과 사람과 유리遊離된 시는 공허한 독백일 뿐이다. 일상 속 비일상이나 삶의 비의秘義 또는 이면의 진실을 말해야 할 터인데, 현학적이거나 개인적인 사설辭說에 그치고 마는 시가 많고 많다. 무당의 독백 같고 공수 같은 시가 넘쳐나는 시절, 얄팍하게 감성을 자극하고 추억이나 소환시키는 시가 대세인 요즘, ‘순례’ 외 10편을 응모한 김현정의 시는 익숙한 듯 남다르다. 현대인들이 과도하게 집착하는 물질문명의 사유로도 읽힌다. ‘봄똥’은 “겨울 끄트머리/다 쏟고 가신 아버지 같은 대지에/새봄의 배내똥인 양/모락모락 봄똥이 핀다”며 생명의 순환을 주목하고, ‘채송화, 붉다’는 오늘을 있게 한 잊지 말아야 할 어제를 불러낸다.
오늘날 많은 시가 너무 어렵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너무 얄팍하고 진부해 문학성이라곤 없다는 비판 또한 비켜 가지 못한다. 그만그만하고 그렇고 그런 감성이나 자극하고 추억 소환에 그치고 마는 시가 넘친다는 말이다. 시의 스펙트럼을 넓혀 문학성과 대중성을 함께 획득하는 시인으로 남을 것이라 믿는다. 등단을 축하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리토피아’가 펴준 멍석에서 신명 나게 노시기를 바란다./손현숙, 남태식, 안성덕, 장종권.
당선소감
인생 바다 하염없이 헤매다가
샘골 시장 생선전 어귀 삭풍에 흔들리는 풀치 몇 꾸리, 대양을 유영했던 초롱한 눈망울 온데간데없네요.
한 줄기 비린내로 소환되던 시절, 인생 바다 하염없이 헤매다가 어느 날부터 발목 잡혀 시 한 줄 써내려 머리통 짓찧으며 보내는 깜깜했던 날들이 눈에 선합니다.
언젠가는 기필코 어머니의 저녁 밥상에 올라온 풀치 조림 같은 시를 쓸 날이 오겠지요.
막내딸 덕분에 비행기 탈 거라는 그 기대에 못 부친 어머님 전상서 이제야 올립니다. 지금 제 볼보다 더 붉었던 어머니 두 손에요.
여러모로 부족한 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회초리로 알고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그림자도 안 보이는 시에 발목 잡혀 끙끙대던 저에게 네비게이션이 되어준 ‘정읍 예총’ 시 창작반 문우님들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한다는 수줍은 고백을 전합니다./김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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