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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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춘실/시(2025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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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시부문
승춘실
목련 외 4편
후두두 지는 날이 와도
떠난 자리 잎새마다 빈손이어도
더 이상 꺾이지는 말자
몇 생을 거듭하여
키워 올린 줄기의 내력 있으니
쉬이 지는 것 아니리라
꽃봉오리 날들의 기도 잊지 말자
먼저 꿈꾸는 건 외로운 까닭이다
그리움은 너에게로
외로움은 나에게로
향방은 달라도 둘이 한 몸인 것을
후두두 목련꽃 지는 날
제자리를 견딘다
마음 깊이 다음 생을 꿈꾼다
나무 위 꽃 자리, 외로움이
문신 같다
한글반 어르신들
굽이굽이 능선 내리내리 골짜기
이고 지고 온 세월이 굽은 등에 고스란히
꺾인 허리춤에 매달린 책 보퉁이의 꿈
팔순 구순 더딘 걸음으로 들어서는
한글반 어르신들
처음부터 낯설지 않다
산처럼 나무처럼
여자라고 맏딸이라고
살림하느라 동생들 업어 키우느라
못 배운 이유가 가난만은 아니었구나
창피해 몇 번이나 되돌아갔다는
양지마을 어르신
지난겨울 아들 먼저 앞세우고
허구한 날 먼 산만 바라본다는
내금마을 어르신
“선상님 입만 압푸지 대가리애 안 드러가”
말이 글을 찾아가는 천리길
가도 가도 제자리라며
울고 웃고 발가벗고, 되찾은 유년의 어리광까지
그때는 무겁고 지금은 가볍다
어느 날, 꽃잎 지듯 홀연히 가신
친정어머니가 속절없이 그리워진다
외삼촌 어깨 너머로 깨우쳤다는
글이라도 한 장 남기셨으면
딱새는 알고 있다
처음엔 그저 우연처럼 딱 따닥 따따따따
온종일 유리창에 딱새 한 마리
방안에 갇힌 나의 적요가 기습하는 파열음으로 욱신거릴 때
밖에 갇힌 너의 동공은 어둠의 공간을 다급하게 난타하지만
창이 열리면 너의 비상은 위험하고
다음날 보일러실 환기통에서 허덕허덕 날갯짓
밤사이 쪽잠 들다 인기척에 놀란 듯 터널 속을 자맥질했다
길을 잃었나 여러 번 길을 잃었던 나처럼, 악몽을 쫓듯
딱 따닥 따따따따 금속성 마찰음을 전송했다
출구는 숲으로 열려있음을
얼마 후 녀석이 슬쩍 궁금할 즈음
달뜬 몸짓으로 우편함을 포르르 들락거렸다
나뭇가지와 나뭇잎 둥지 틀어 아기새 네 마리의 요람이 되기까지
그랬구나, 떠날 수 없는 너의 이유
반가웠다
새가슴 졸이며 경계하는 눈길 아직 따가운데
그만큼만, 전부가 아니어도 괜찮다며
나를 믿어준 것 같은 고마움이
헝클어진 일상은 고비마다 찾아오고
떠나고만 싶은 마음 한구석을 들켜버린 듯
한 시절 공들여 터를 잡고 새끼를 품은 딱새와 나
모성의 절박한 날갯짓이 울컥 우편함에 꽂힌다
수평선
멀리서 바라볼 때만 존재할 뿐
그대에게 다다를 수 없다
한달음 다가가면 그만큼 더 멀어지는
기나긴 표류
처음 본 순간의 확신이 전부이던
그대는 언제나 눈물바다
나의 파도가 스러져 스러져 이르는 곳
격랑을 지나온 자리마다 부서지는 가책
가도 가도 먼 길이다
사무치게 그리워하다가
그토록 애잔히 부르다가
영영 멀어지다가
하늘가에 맞닿은 이름이여
그대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라는 파도가
물거품으로 물거품으로 기억을 지우며
끊임없이 수평선에 이른다
도반
산에 살아 바다로 간다는 여행길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이십 년 만에 안부를 묻는다
바다와 하늘이 만난 가뭇한 수평선
보고 싶었다는 말 대신 침묵이 흐른다
섞여 살지 못해 여기까지 흘러왔노라고
나른하게 누운 바다
하늘은 내내 대꾸한 적 없지만
단잠 재우듯 감싸 안으며
이제 외길 하나로 마주 본다
가끔씩 나에게 묻는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면
어디일까, 누구일까
그때마다 밀려드는 너의 조수潮水
알음알음 이름이 잊혀지고
물어물어 온 길이 봉인된다
바다도 돌아누워 산을 그리워했을까,
불쑥 안부를 묻는 나를 두고
너는 다시 길을 뜬다
바다와 하늘이 만나 외길을 만든다
심사평
함께 가는 서정抒情
시인이 넘치고 시가 넘치는데 정작 시다운 시가 없다고들 한다. 필요 이상으로 현학적이고 어려운 시가 많단다. 자기연민이나 하소연으로 얄팍한 감성이나 자극하고, 추억 소환에 그치고 마는 그렇고 그런 시가 많다고도 한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쉬운 주제를 어렵게 쓰는 시인이 많다, 어려운 주제를 더 어렵게 쓰는 시인이 많다.
정보화 시대를 지나, 제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했다. 과도하게 물질문명을 숭배한 우리는 설상가상 개인주의 늪에 빠졌다. ‘나’만 있고 ‘앞’만 있고 ‘너’와 ‘옆’이 없다. 사는 일이 경쟁이요 전쟁이다. 속도만 추구하고 사람보다 기계를 더 믿는다. 관계는 오로지 이해득실에 따르며, 우리의 은근한 정서인 정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사람 人 사이 間, 사람이 왜 人間이겠는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손 내밀고 서로 손잡아 주며 함께 가야 할 관계란 말일 터다.
계간 <리토피아> 2025년 가을호 신인상에 「도반」외 14편을 투고한 승춘실 시인을 선정한다. 투고한 작품 대부분 수채화 같은 서정抒情 짙은 작품이다. 그간 우리가 애써 잊고 살았던, 차마 챙기지 못했던 ‘주변’을 상기시킨다.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정’을 일깨운다. 함께 먼 길을 가고 있는 세월과 세상과 사람에 의미를 부여하고 구체화한다. 함께 가야 오래 갈 수 있고, 더불어 가야 멀리 간다고 담담한 필치로 그려낸 서정은 공감력이 크다.
투고된 작품 모두 AI시대를 살아가는 각박한 현대인들에겐 생경할 수 있는 주제를 편하게 표현했다. 응모한 작품만으로 확인하기에는 한계가 있겠으나,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려는 의지가 확실해 보인다. 또 성실한 습작기를 거친 듯하여 믿음이 간다. 신인상 수상을 축하한다. 더욱 정진하여 세상에 시의 큰 그늘을 드리우리라 믿는다. /안성덕, 남태식, 손현숙
소감
모국어의 텃밭에서 정착하고 싶다
오래된 시작이라고 말해야 할까.
늦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 할 것 같은 절박감으로 오래 짝사랑하던 시에게 고백하는 마음 같다.
‘보고 싶다’ 보다 강한 말은 ‘쓰고 싶다’ 라고.
나의 습작은 간헐적이었으며 대부분 홀로 이루어졌다.
그래서인지 세상에 시를 내놓는 것이 부끄럽고 어색하다.
기형도 시 「비가2」에서 “내부의 유배지”라는 표현에 격한 공감이 갔다.
그럼에도 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끝나지 않았고 다시 변화를 꿈꾼다.
다만 자연, 외로움, 그리움이라는 시적 정서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그건 시인됨의 본성이 아닐까, 변명도 해본다.
그동안 마음이 간절한 만큼 시 쓰기는 치열하지 못했다.
길 위의 날들이 길었다. 이제는 읽고 쓰고 모국어의 텃밭에서 정착하고 싶다.
시인이라 처음 명명해주신 《리토피아》 심사위원님들께, 도움 주신 박미경 시인에게, 나의 뮤즈 자연에게, 눈사람에게, 감사드린다./승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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