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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만/시(2017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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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881회 작성일 17-12-17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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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만1.jpg


신인상(2017년 겨울호)

고종만

허드렛돌

 

 

고향집 문간에는 허드렛돌 하나가 살지요

그의 원적도 성별도 나이도 모르지만

품새가 푸르고 매끄러운 게

바닷가에서 왔으리라 짐작하지요

아마 할아버지는 알았을지도 모르는

그가 하는 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지요

대문 고임돌, 키를 돋우는 디딤돌, 메주를 띄우는 누름돌, 무딘 낫을 가는 숫돌, 화날 때 내리치는 주릿돌, ……,

이제 손을 놓고 먼지를 쓰고 앉은

그가 내게 속삭입니다

추억이 많아 외로울 수 없다고

자기는 언제나 제자리에 있으니

너무 늦지 않게 오라고

빛 낡은 문간에 기대앉은

허드렛돌

 

 

 

 

말복

 

 

말매미는 고욤나무 정자 뿌리가 들먹이도록 울었지

미역 감은 까까머리 기선이와 벌거숭이 경만이

볼 볼그족족한

개살구 해당화 열매로 푹 꺼진 뱃구레를 달랬지

동네 어른들 벼랑그늘에 무쇠솥을 걸고

호밀가루 수제비를 숭덩숭덩 떼어 넣고

돌깻잎 돌부추로 개장국을 끓였지

명절이나 할베 할메 생신날이나 겨우

희멀건한 고깃국을 먹을 수 있었던 그 시절

개장국이라니,

불뚝해진 배를 끌어안고

……애 애 애 풀피리,

복털이가 지금도 두 눈가에 너울너울한 그날은

아마도 몽돌을 따글따글 굽던 말복이었지

얼레지를 서로 먹겠다고 희번덕대던 한때였지

 

 

 

 

잃어버린 풍경

 

 

징검돌이 빨래판이던

늘 푸른 냇가 빨래터

 

보지 말아야 할 말들이 살았고

반드시 보아야 할 말들도 살았지

담지 말아야 할 말들이 살았고

꼭 담아야 할 말들도 살았지

세워야 할 말들이 살았고

흘려야 할 말들도 살았지

묻어야 할 말들이 살았고

차마 묻지 못할 말들도 살았지

죽어서도 간직해야 할 말들이 살았고

한시라도 간직해서는 안 될 말들도 살았지

그 빨래터에는

비비면 비빌수록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 선명해지는 말들이 살았고

그 말들이 눈물을 헹구었지

 

지금은 냇물만이

남은 말들을 구시렁구시렁 흘리고 있지

 

 

 

 

화려한 오독

 

 

늘 푸르고 넉넉한 산이어서

늘 평안한 줄 알았는데

헐렁한 사내의 낯선 방문에도

꿩은 축포를 쏘고

소나무는 송홧가루를 뿌리고

청설모는 숲을 헤치며 길잡이를 나섰다

백수는 누렸을 너도밤나무 발치로 흐르는

개울은 여울목을 내 주고

산까치 솔새 도라지 산국……

환영연을 베푸는

,

이토록 기골이 장대한 산도

외로움엔 초연할 수 없었던가

 

 

 

 

환청

 

 

그날 이후로 눈을 뜨나 감으나

그 유월의 바다가 귀에 살아야

갈매기는 서녘 바다에 어찌나 붉은 울음을 토하는지

오늘은 비 오는 이른 아침부터 가슴을 적셔야

생업을 팽개치고 그 바다로 달려갈 수 없었어야

안주로 나온 홍합 접시에는

너만 발그랗게 너울대고

막소주 잔에서는 너만 찔끔찔끔 넘쳐야

해당화며 원추리며 바위손이며 해송이며

할메할베바위는 곱게 늙는지

수평선은 여전히 유쾌하게 웃고 있는지

네 발자국 묻은 그 유월의 바다는 아픈 데 없이 잘 사는지

오늘밤은 등대에게 전화를 할까봐야

 

 

 

 

 

바람이 차별 없이 불어오는 날에도

거리는 거리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벽을 쌓느라 허무느라

뭐 보고 뭐 볼 겨를 없이 바쁘다

쌓을 건 쌓고 허물 건 허물어야 되겠지만

쌓는 것만이 벽을 더 굳건히 지킬 수 있다는 듯

허무는 것만이 벽을 더 새롭게 할 수 있다는 듯

햇살이 차별 없이 내리는 날에도

거리는 거리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어제를 빌미로 오늘을 허무느라

내일을 빌미로 오늘을 쌓느라

뭐 보고 뭐 볼 겨를 없이 바쁘다

이 별빛 좋은 밤에도

너는 너의 벽에서

나는 나의 벽에서

 

 

 

 

 

소감



심사평

신인상심사평-고종만

<해당작품 - 허드렛돌, 말복, 잃어버린 풍경, 화려한 오독, 환청>

 

운율(韻律)로 되살린 정취(情趣)와 근원(根源)’에 대한 애정

 

백인덕

 

시는 언어에 기반 한 매체 예술이다. 누구나 다 아는 정의지만 여기서 간과(看過)하기 십상인 것은 장르로서의 시적 특성 이전에 언어로서의 제약, 한계가 적용된다는 점일 것이다. 모든 언어는 의사소통이라는 본래의 목적 아래 수행성을 가질 때, 그것이 사용되는 사회 문화적 환경에 맞게 변형될 수밖에 없다. 언어의 사회성, 또는 시대성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반면에 대부분의 언어는 자기의 기원(基源)을 간직하려는 지속성이라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것은 언어의 역사성이라고 볼 수 있다.

고종안 시인은 사회성보다는 역사성에 더 강한 방점을 찍고 시작(詩作)을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인식은 허드렛돌그가 하는 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지요/대문 고임돌, 키를 돋우는 디딤돌, 메주를 띄우는 누름돌, 무딘 낫을 가는 숫돌, 화날 때 내리치는 주릿돌, ……이라는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먼지가 앉은 채로 그냥 두었다면 단지 허드렛돌로 끝내 잊혀 질 돌 하나에 대여섯 개의 이름을 되살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은 사소한 것처럼 보일지는 모른지만 중요한 의미를 함축(含蓄)한다. 그것은 현대적이라는 미명(美名) 아래 날로 난해지기만 할 뿐인 모국어에 작은 숨통을 틔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운율을 통해 숨 가쁘게 연접(連接)하는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헐렁한 사내의 낯선 방문에도/꿩은 축포를 쏘고/소나무는 송홧가루를 뿌리고/청설모는 숲을 헤치며 길잡이를 나섰다/백수는 누렸을 너도밤나무 발치로 흐르는/개울은 여울목을 내 주고/산까치 솔새 도라지 산국……/환영연을 베푸는”(화려한 오독) ‘의 정경을 잡아내고 있다. 말복잃어버린 풍경등의 작품도 이런 미덕이 들어 있는 계열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시에서 시어가 지나치게 난해한 현대적 개념어에 치우치는 현상을 조금이라도 보정(補正)하기 위해 흥취가 살아있는 우리말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시인들을 보다 더 많이 활발하게 발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어를 단순 나열하는 데만 그친다면 그런 시어들마저 정형화된 틀에 갇혀 사용 자체가 쉽게 진부해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시어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현대적 기법을 통해 보완되어야 한다. 고종만 시인이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바로 이런 점일 것이다.


[이 게시물은 리토피아님에 의해 2024-04-25 16:32:35 신인상수상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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