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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민/시(2021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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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줄 알아야 해 외 4편
박성민
찰나였다 넘어졌다 벌떡 일어났다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무릎에 흙을 털어냈다 네 살배기는 울지 않았다 마음만 달려갔다 추스를 시간은 충분했다 천천히 다가갔다 안 아퍼? 뭐가? 천연덕스러웠다 모른 체했다 냉동고로 올려줬다 팔뚝만한 월드콘을 들었다 콘보다 걸음이 더 불안했다 손만 더 꽉 쥐었다 바지에 핏빛이 돌았다 안 아퍼? 뭐가? 미간을 찡그렸다 다 봤어? 고개만 끄덕였다 울음보가 터졌다 세상이 무너졌다 창피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냥 울음이 멈추길 기다렸다 콘 머리가 녹아 떨어졌다
사내는 우는 거 아니야 너만 지키는 말이지 그 말은 눈물을 없앴어 눈물이 없으려면 고통도 지워야지 고통을 지우려면 안 넘어져야지 누구도 넘어지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어 그래서 다시 일어나는 법도 몰라 손 내미는 실례도 잊었어 울 줄 알아야해 그래야 먼저 손잡을 수 있어
사실은 말이야 나도 매일 넘어져 들키지 말아야해 사람들이 비웃거든 넘어지는 사람들도 봐 옆 사람과 함께 깔깔대 실수는 곧 실패야 손 내미는 사람은 드물어 그러면서 기대고는 산대 네가 빨리 자라 걱정이야 네가 손을 놓을까봐 너도 나처럼 처다만 볼까봐 그때가 오면 정말 그때가 오면 야프냐고 한 번만 물어 줄래 맘 놓고 울 수 있게
자네 왔능가
꽃 보러 왔능가 날 보러 왔능가
낭끝부터 막산까지 자네 위해 차려봤네
엉겅퀴 씀바귀꽃 지나 찔레꽃까지
유채 씨 불러오는 가슴 가슴에 담아가시고
큰 산 넘을 때 숨 가쁘시거든
철퍼덕 엉덩이 깔고 앉아
푸른 잎들 속 싸리꽃도 바라봐주시게
좋은 날 받아 오지 황사 뿌연 날이 뭔가
저 먼 바다 못 보여줘 미안하네만
솔직히 나만 나만 봐줬음 하는 마음이 더 크네
깻넘어 가거들랑 내 속살만 보지 말고
부처손 닮은 내 마음도 보듬어주시게
그래 그렇게 출렁다리 건너오시면
여태 콩닥거리던 마음 이해할 것이네
막걸리 몇 잔 못 나눴는데
벌써 막배 들어온다네
부추랑 완두랑 쪼끔 담았네
어여 가시게 어여 가시게
보고 싶은 이만 잡아둘 수 있당가
기다리는 이도 있어야제
중심을 잡으려고
약한 가지에 커다란 모란꽃이
중심을 잡으려 흔들리고 있다
불안한 꽃대를 높이 올리는 민들레는
중심을 옮기려 흔들리고 있다
두발자전거는 속도가 중심을 만든다고
넘어질까 겁나는데
빨리 달리란다고 원망하던 조카도
흔들리는 중심을 온몸으로 잡아간다
불혹이란 말에
하루에 열두 번도 흔들리는 마음을 들킬까봐
태연한 척하다 눈치만 늘었다
구석에 숨어 아집만 지키려던
중심은 항시 밖에 있었다
거센 비에 철퍼덕 떨어지는 모란꽃도
세찬 바람 앙상한 꽃대만 남은 민들레도
페달을 밟으며 속도를 이겨낸 조카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더냐고 묻는다
세상에 스스로를 던졌을 때
비로소 잡아지는 중심이다
선線과 선禪 사이에서
흔들거리는 가지가 그리는 선線은
노란 은행잎과 하나 되기 위한 선禪이었나
힘찬 날개짓으로 하늘에 그은 박새의 선線은
스스로 허공이 되기 위한 선禪이었나
구급차에 실려 큰 숨을 몰아쉬며
응급실로 들어온 할머니는
연신 큰 소리로 날 잡아달라고 외쳤다
위아래로 크게 요동치던 모니터의 선線은
이내 변함없이 흘러갔다
의사의 사망선고 후 가려진 커튼 틈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붕대로 감긴 선禪을 봤다
길 잃은 낙엽이 구르는 선線을 따라 걷다가
오늘도 엉켜버린 수많은 선線들을 생각하다
폐부에 자리 잡은 3㎝ 암세포도 선禪이었나
그렇게 아버지도 굵은 선線 하나 못 그었어도
더 큰 선禪 하나 이루려 하시나 보다고
홀로 아름다운 선이 되고 싶었다
분꽃 씨방
―살아있는 화석이 되기까지
지금 태교 중이야
먼저 뿌리부터 내리는 법, 싹을 틔우는 법부터
오후 네 시쯤 꽃을 피워 다음 날 해 뜨면 지는 본능과
비가 왔을 때나 햇볕이 강할 때나 바람이 세찰 때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가 기초과정이야
씨방 속 언어들로 진화를 위한 과정을 가르쳤을 거야
그동안 인간의 역사보다 더 긴 이야기를 들려줬을 거야
지구가 수천수만 바퀴를 도는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씨방 속에서 함축해 녹여내는 시간이 심화과정이야
꽃 떨어진 자리에 연두색 씨앗이 보이면 실습과정이야
언어로만 읽혔던 자연의 변화무쌍을 느낄 거야
처음 겪는 두려움에 까맣게 타버렸을 거야
그렇게 태운 속만큼 단단해졌을 거야
보슬비가 까치발로 내리던 날
콘크리트 바닥으로 통통 튀며 첫울음을 터트렸어
너를 주워 손바닥에 올리고 한참을 쳐다봤어
저토록 부드러운 것이 이토록 강한 것을 토해냈어
살아있는 화석이었어 아직 온기가 느껴져
그 속에 담긴 우주가 숨 쉬고 있었어
심사평
양성을 구조화할 수 있는 시의 가능성 엿보여
요즘 시에서 ‘다양성’을 언급하면 너무 쉽게 ‘주제의 선택’이라는 측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의식이나 언어 실험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양성을 주제의 종류나 가짓수가 아니라 그것의 배열이나 구조화라는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박성민 시인은 이 다양성을 ‘환상環狀적 층위’로 구조화할 수 있는 특출한 능력을 보여준다. 시적 배경이며 언어의 태생적 환경 조건인 남도 방언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이 어휘들이 포획하는 특별한 삶의 모습을 통해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인생의 근본 가치를 탐색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처손 닮은 내 마음도 보듬어주시게/그래 그렇게 출렁다리 건너오시면/여태 콩닥거리던 마음 이해할것이네”(‘자네 왔능가’)처럼 정감을 교감交感으로 치환하는 솜씨도 갖추고 있다. 같은 작품에서 “보고 싶은 이만 잡아둘 수 있당가/기다리는 이도 있어야제”라는 결말의 명제는 분명히 보편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환상적 층위를 이루고 있다고 하면 과언過言이 되고 말 것이다.
박성민 시인에게서 더욱더 주목해야 할 점은 “흔들거리는 가지가 그리는 선線은/노란 은행잎과 하나 되기 위한 선禪이었나/힘찬 날갯짓으로 하늘에 그은 박새의 선線은/스스로 허공이 되기 위한 선禪이었나”(‘선線과 선禪 사이에서’)라는 근본 질문 던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가 정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시는 감각과 감정의 작용이지만 그 지향이 모두 정서의 차원에서 멈출 필요는 없다. 또한, 시인은 세상을 향해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더냐고 묻는다/세상에 스스로를 던졌을 때/비로소 잡아지는 중심이다”(‘중심을 잡으려고’) 선언할 수 있는 의지를 보여준다. 원초적 언어의 생동성이 계속 바깥에 원형을 이룬 현실적 지향을 건드리면서 격렬하게 때론 알아챌 수도 없는 미진微震의 상태로 충돌한다. 이 부딪침을 통해 시작詩作은 부단히 더 깊게 누적될 수 있을 것이다./장종권 남태식 백인덕
수상소감
다시 사람 속으로, 다시 세상 속으로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내 속에 나를 보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을 읽어내는 일은 선입견과 거기서 파생된 편견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아집과 고집을 세상에 적당히 섞어내려는 나와의 다툼이었습니다. 내가 보는 사람과 나를 보는 사람, 내가 보는 세상과 나를 보는 세상 그 사이에서 몇 만 번을 흔들렸습니다, 여전히 소낙비 퍼붓는 토담 아래 채송홥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면 물들어버리던가, 눈 감아버리던가, 버티지 못하고 도망칠 거라고 세기말에 봉기형은 말했습니다. 2층 상하방에서 창헌이형, 정훈이랑 거침없는 펜촉이 되자 했는데 지금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지 조차 모르겠습니다. 이런 나에게 당선은 가득 채운 바랑을 메고 높은 산사로 오르는 탁발승입니다.
시에 물들게 해준 ‘아카사니’ 선후배님들과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를 다독이시던 임 선생님, 흔들릴 때마다 꾸지람 대신 칭찬으로 보듬어 주신 신 선생님과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문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영원한 독자를 자청한 30년 지기 해기와 못난 아들에게 항시 미안하다는 어머님께 공을 돌립니다.
더 발전하는 작품으로 리토피아에 보답하도록 정진하겠습니다./박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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