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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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덕-시(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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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1 꽃을 만드는 여자 1
하루를 몇 번씩 접었다 폈다 하며
꽃을 만드는 여자
문이 닫혔다 열리는 사이
불이 꺼졌다 켜지는 사이
그녀 손에 싹이 돋는다
지친 어깨 늘어트린 하루의
등을 톡톡 쳐서 곧게 일으키고
꼿꼿해진 거실에
생기 한 다발 부려 놓는다
문이 닫혔다 열린 자리가
마음 환히 비추는 거울꽃이다
이리 저리 뒹구는 시든 이파리들
한 장, 두 장 거두어
줄에 널면 햇살바라기 꽃이 된다
바구니에 싱싱한 계절을 담아와
식탁에 꽃밭을 꾸미고
압력솥에 따스함을 입력하면
딸랑딸랑 방울꽃이 요령을 흔들고 돌아다닌다
방울소리 채워지면
얼른 꽃을 꺾어
마음에 걸어 두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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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2 꽃을 만드는 여자 2
-미용실에서
-어떤 꽃으로 해 드릴까요?-
주문한 꽃의 메모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지고
생의 동반자 같은 것들 시동을 건다
무성한 밭을 누비고 다니면서
무순처럼 쑥쑥 웃자란 이파리들 자른다
삐죽거리는 불만들을 쳐내면
지난 기억들이 잘려져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이슬부린 이파리들 바람에 부풀리고
줄기와 뿌리까지 탱탱한 노래 삽입한다
열 손가락이 저마다의 몫을 당기고 눌러준다
꽃잎 한 장, 한 장마다
꽃 이름을 새기면서
몸에서 뽑아낸 솜씨를 바르고
촘촘히 말아 캡을 씌운다
머리를 만질 때마다
손에서 피어나는 각양각색의 꽃을 위해
온종일 머리카락 밭을 누비고 다닌다
골고루 매만져 익힌 꽃이
활짝 피어나
화사한 손 흔들며 문을 나설 때
내 가슴은 온통 꽃물결로 출렁거린다
------------------------------------------------------------
작품 3 꽃을 만드는 여자 3
-산업체 특별학급
가쁜 숨 몰아쉬는 컨베어벨트 위로
노을꽃이 내려앉으면
작업복 대신
꽃잎 같은 교복으로 갈아입는 그녀
하나의 교복이 되면
꽃향기 그윽하다
제품 같은 오빠의 뒤에 제조일자로 남아
쓸쓸히 꽃대 꺾어야 했고
집 걱정 속옷으로 껴입고 다녔다
어둠을 잘라 형광등 불 밝힌 교실에
낮 동안의 노역을 끌어다 등줄기 꼿꼿이 세운
넌출 같은 갈래머리로 담 넘으려는 그녀
진딧물로 엉겨붙는 졸음과
가슴을 파먹는 책 속의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달빛 일으키는 시계바늘 위에서 씨름을 한다
불빛에 칠판 글씨 익어 가는 교실
낮에는 공장에서 꽃대 세우고
밤이면 책갈피마다 꽃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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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4
꽃을 만드는 여자 4
-조산원(助産員)
달 빛 끌어당겨 산문을 열어야 하는 그녀
만월(滿月)을 상하지 않게 잘 받아야 한다
소독된 마음을 펼쳐놓고 어둠을 가른다
푸른 달빛을 건져 올릴 수 있을까?
숨죽이며 물때를 기다린다
달이 물 속 깊이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구름에 산 그림자
겹쳤다, 벗어났다 한다
밀물이 작은 파도를 몰고 온다
점점 파도가 거세지더니
큰 파도가 산을 내려친다
혼절했던 산을 가까스로 일으켜
실뿌리같은 세상 끈을 움켜쥐게 한다
물때를 놓치면 안된다고
부르르 떠는 산에 불을 당긴다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달 비치더니
큰 파도 하나 달려들자
재빨리 타고 앉아 파도를 자른다
순간, 썰물이 미끈덩한 달 하나 뱉어낸다
바짝 날 세운 그녀
두 손 황홀한 달을 받쳐든다
쪼그리고 있던 달이 울음을 토하자
달꽃 피어나
주위가 온통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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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5
주름이 익어갈 때
밖에서 주눅이 들어 온 옷들에게
기를 살리는 일은
주름을 익히는 방법이 있지요
풀썩 주저앉아 한숨만 토하는 옷을
티검불 툭툭 털어 너럭바위에 널고
물 한 모금 촉촉이 갈수(渴水)로 뿌려주면
봄 이슬 머금고 파릇파릇 솟아나지요
무성한 상처의 가지와
불만의 언어들을
마디마다 고열과 미열을 고루고루 섞어가며
등과 가슴, 허벅지를 꼭꼭 밟아가면서
지압을 해 주면
진저리치던 옷들이
파안대소로 피어납니다 그러면,
내 손은 주치의가 되어
완치를 위해
옷의 구석구석에 쪼그린
그늘을 살펴
불편한 솔기마다
친절한 손길로 어루면
완연한 봄으로 깨어나지요
옷은 가뿐하게 일어서
당당한 어깨로 튀어 오릅니다
주름이 익으면 기가 살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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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6
꽃을 만드는 여자 6
김 구이 기계 앞에 앉아 하루의 자전축을 돌리는 그녀
시장 한 모퉁이 습지를 말려 나간다
온도 센서에 눈금을 조절하고 간을 맞춰
열이 과하지 않게, 미진하지 않게
중심 축을 잡고 시간을 돌려 태엽을 감아간다
조선김, 돌김, 파래김의 낙장(落張)을 헤아리면서
다양한 그들의 내력을 차례로 읽어간다
부리던 사람 밑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김가루 날리는 일이지만
가슴언저리의 아물지 않은 상흔이
그녀의 길을 떠메고 간다
구어져 나오는 김 사이에 끼어들면
보도 블럭 틈새 비집고 자라나는
풀이끼가 되고
김이 구워져 떨어질 때마다
한 계단씩을 오르는 것도 같은데
구수한 냄새가 손짓하여 부르는 것도 같아
어딘가, 어딘가 두리번거리다
하마, 자신을 놓칠 뻔 한적 있다
구워져나온 김들은 반짝 윤을 낸다
튀어 오를 것 같은 바삭한 언어와
기름 향이 은은하게 피어나는 꽃들의 몸짓
거칠게 다루면 바스라질 것 같은
놓치면,
바람에 한없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날개 같은 김 꽃을
바람 들지 않게 조심스레 비닐포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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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7 겨울나비
102동 앞에 울타리 친 사람들을 뚫으니 맨 땅에 누워있는 나비 한마리,
머리끝까지 거적을 덮고 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길이 없는 저 나비가
희뿌연 공기를 가르고 균형 잃은 한 쪽 날개를 퍼덕이더니 순간, 언 땅에
곤두박질쳤다는 무성한 말이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며칠 전,
이웃 아파트에서도 출몰했다는 겨울나비 때문에 관리소는 골치가 아프다면서
투덜거리고, 저놈의 높이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아파트를 사정없이 찌른다.
하늘 지붕 아래 고개 조아린 25층 아파트 꼭대기에서 세 번째 복도 창문만이
조용히 입을 열고 방조자였음을 자백한다. 회오리바람이 이는 창문마다 빨간
불이 켜지고 상황조사를 나온 백차와 구급차가 쉬쉬하며 서둘러 봉해 놓고 떠난
그 자리는 여전히 헛구역질을 한다. 사람들은 어떤 냄새를 낚으려는 쇠파리 떼의
음모를 숨기고 세상의 공기를 걱정하면서, 절여진 가슴 나누며 무겁게 돌아갔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흔적을 삼킨 그 자리는 엉킨 실타래로 삶 속에 박혀
냄새를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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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8 묘비
투명한 가을 햇살에 양치를 끝낸 듯
가지런한 잇속을 드러내고 있는
현충원의 묘비들
그 속에서 묘비명으로 걸어나오는 얼굴들
세월의 강폭을 건너와
내 가슴 물결 타고 출렁거린다
푸른 창공을 향하던 꿈들이 접혀
쓸쓸한 이마를 만지고 있구나
폭풍우 거세던 날
꺼질 듯 가물거리는 등불의 심지로 맞서
환하게 솟아올랐던 꽃들이여
지난날을 그리워 할 겨를도 없이
잘려나간 시절들이여
작고 푸르던 몸 던져
이 땅에 큰 나무 그늘을 드리웠구나
깨알 같은 사연 물고 있는 묘비들 사이로
나는 굴곡진 시간의 강을 따라 걷는데
돌부리로 걸리는
묘비 하나
내 발부리를 적신다
빈 얼굴에 글자 몇,
무·명·용·사
둘러싼 이력
낙엽으로 흩어지고
이름 없는 이름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묘비에 손을 얹으니, 나는
멍울 삭이는
어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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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9
피리소리
상반신이 잘려나간 늙은 과실수들
과수원 모퉁이 그늘에 모여
힘줄 삭은 밑둥을 부여잡고
피리를 불고 있다
어린 과실수들이
단물 들이키는 것을 쳐다 볼 때마다
물오르던 지난 시간들이
높고 낮은 음으로
피리 구멍에서 흘러나온다
촉촉한 눈웃음,
지나는 바람과 밤이 익도록
사랑노래 부를 때는 몰랐다
햇살 손끝이 닿을 때마다
수줍은 볼이 발갛게
부풀 때도 몰랐다
실핏줄 하나까지 가래톳을 삭이며
절벽을 넘는 산고의 새벽을 깨야 할 때도
정말 몰랐었다
해마다 분신 같은 열매에
몸이 찢겨 나가도
달디단 침을 삼키며 견뎌왔는데
폐경기 여인으로 누워
구슬픈 피리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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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
가시 박힌 울음 속에는
햇살에 몸을 널고 있는 고양이 일가(一家)
길모퉁이 잡풀 숲 주인이 되었다
낯선 세상 부신 듯
여린 손짓, 발짓으로 자꾸 눈을 가리는
새끼들 곁에
기둥 발 세운 어미의 눈이 잔잔히 깔린다
지난 밤
가시가 콕콕 박힌, 겹겹의 그 울음으로
온 동리를 휘감던
암내를 날리던 그 고양이던가?
쓰레기장에 나타나
무덤 파헤치듯 봉지를 날카롭게 찢으며
게걸스레 허기를 채우던
임신한 그 고양이던가?
폭풍우 같던 시간을 건너왔구나
희미한 달빛에 걸린
가시울음 속에
넝쿨 같은 새끼들 감고 있었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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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
천평칭(天平秤)
마주 앉은 두 사람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사위를 던지고 있다
찻잔 속에 마음을 꼭꼭 숨기고
탁자에 떨어지는 딱딱한 숫자들을 줍고 있다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려는 듯
허공에 수없이 가위 바위 보 하면서
내가 가위를 내면 그는 주먹을 내고
그가 보를 내면 내가 가위를 내는
자꾸 어긋나는 게임
저울 위에 올라앉아 서로의 무게만 잰다
깃발이 손짓 해 부르는 강 언덕에 당도하기까지
살얼음판 건너듯 조심조심 발 디뎌야 하는데
아직 몇 개의 강을 더 건너야 하는지
마음을 저울질하면서
넘치면 덜어내고,
모자라면 보태고,
손닿지 않던 먼 거리에서 점점 다가와
좁혀진 그와 나와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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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
역류
그와 내가 맑음이었을 때는
막힘 없이 소통되었다
서로 물줄기 흘리면
서로의 하수구를 잘 흐르더니
구름이던 어느 날
바람결에 나부끼던 이파리 하나
가시 되어 목에 걸렸다
서로를 삼키지 못하고 무겁게 내려앉아
비를 뿌리더니 마침내,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를 몰고 온다
수위를 넘어서고
가슴 언저리에서 거친 소용돌이된다
소통되지 못하고 범람하여
허접쓰레기들 쏟아져 나와
고인 빗물에 둥둥 떠다닌다
충혈된 눈자위 굴리며 허둥대는
생쥐 한 마리
젖은 털을 부르르 턴다
하수구를 해체하고
무겁게 누르던 것들을 하나씩 들어낸다
가슴에 달라붙어 서로를 질척이게 했던 것들
긁어낸다
둘의 틈새 비집고 공기방울이 올라오고
점차 수위가 낮아지더니
묵은 체증이 뚫려 트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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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 항해
물길 가르고
우리 집 포구에 닻을 내린 가물치
솥과 뚜껑의 힘 겨루기가 시작되어
만만한 균형이다가
술렁이는 파도이다가
결국 그의 꼬리차기로 배가 기울고
튀어나온
먼 물길을 갈망하듯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듯
바닥에 오체투지(五體投地) 할 때마다
쏴쏴 물결이 몰려와 소용돌이 된다
간절한 마음으로 입을 달싹거릴 때마다
플랑크톤이 튀고
불한지옥을 건너온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제가 가르고 온 물길을 놓지 않는다
그는 수평선 아득한 대양을 꿈꾸어 왔을 것이다
바닥에서 그를 주워 다시 벌겋게 달궈진 솥에 넣자
파닥파닥 불똥이 튄다
진퇴양난의 벽에 갇혀
붉고 슬픈 뱃고동을 울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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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 낚시터 풍경
찬바람이 거리를 점점 옥죌수록 생겨나는 낚시터
골목어귀, 보도의 후미진 곳마다
보퉁이 껴안듯 자리잡은,
바람에 옷자락 날리는 사람들
비닐 천막으로 둘러쳐진
물웅덩이에 미끼처럼 흘러든다
언젠가부터
횡단보도 건너편에서도
훈김 서린 비린내가 몰려온다
신호등에 발 묶이는 사람들
주머니 속이 궁금해져
달그럭거리던 마음을 걸어 낚싯줄을 늘이고
허허로운 등줄기까지 바늘에 꿰어
입질을 하면
딸깍딸깍 자맥질하던 붕어들 줄줄이 올라온다
구겨진 단풍잎 한 장에
여러 마리의 붕어를 낚을 수 있다는 소문이
그 낚시터에 모여들게 한다
비린내 안개처럼 자욱하게 공복 속으로 스미고
통통하게 알 밴 붕어 한 마리
입안 가득 부서지는 소리난다
꼬리지느러미까지 내장 속으로 밀어 넣으면
구들장으로 데워져 온 몸이 따끈따끈 해지고
움츠렸던 어깨에 붉은 살이 돋는다
길도 따뜻해져 뭉개 구름 흘러간다
---------------------------------------------
제 15 길
목련꽃 칼라가 눈부신 친구들을
골목에 숨어
부러움 가득 달빛을 태웠다는 그녀
'전쟁 나면 소용없다'
'남의 식구 될 딸, 가르쳐 뭐하나' 하던
배고픔이 머리에 올라앉았던 시절
사춘기 솜털 불퉁거릴 때 그녀
초등학교 졸업장 달랑 들고
아버지가 낸 길을 따라 시집을 갔다
내가 여고시절의 맑은 해를 닦고 있을 때
젖내 달큰한 달을 짊어지고
내가 해독이 난해한 문자를 헤아리면서
미팅과 축제의 왁자한 길목에 서성거리고
꽃잎으로 흩날릴 때
그녀, 좌판에 비릿한 그물을 치고
거친 하루를 출렁거렸다
수평선과 지평선을 숨가쁘게 넘나들던
두 아이를 오지게 걸치고
구불구불 기어오른 등나무
비포장 길에 맨발로 달려온
그녀의 등뒤에
아스팔트길 위에 풋내 나는
내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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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16 종이컵이 흘리는 말
준비된 마음 차곡차곡 쌓아 놓고 있다가
누군가 날 부르면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는다
안에 갇혀있던 여린 얼굴
누구 앞에 나서기란 조바심이 난다
그리움처럼 품어야 하는 것들
내가 감수해야 하는 것들
뿌리칠 수 없는 것들
쓰디쓴 맛, 떫은맛, 새콤달콤한 맛
내 몸의 실핏줄을 타고 흐르면
흥건하게 젖여
살거죽이 물러지도록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밤안개 같은 날들
살아간다는 것은
맛을 알아간다는 것
맛을 알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젖어드는 것
힘줄 삭아져 후질근해지면
구겨지거나 내 팽개쳐질 일만 남아도
한때, 나를 소중하게 감싸던
따스한 손과 기억들을 놓지 못한다
--------------------------------------------------------------
작품17
건반 위에서
단단한 콘크리트 벽과 창으로 경계짓는
아파트의 수없이 많은 창문 사이로
길 잃은 아이처럼
피아노 소리가 두리번거린다
하얀 건반, 검은 건반 위를
징검다리 건너듯 조심스레
유리구슬 굴리는데
길을 가다가 음계에 걸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시작하고
앞을 가로막는 숲을 헤치고 바위를 돌아
시냇물 굽어진 길
정상으로 가기 위해
음표의 능선을 수없이 타고 넘는
저 등반
'뻐꾹 왈츠' 에서 고개 내민
뻐꾸기 한마리 아파트 숲을 날아다니며
콘크리트 벽과 벽을
길과 길을 하나로 묶으면서
둥글게 날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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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18 관계
새 구두를 신던 날, 발은
반들거리는 구두코에 환하게 물들고
구두 소리가 길을 컹컹 울리는 것 같아
발등이 가려울 정도로 으쓱거려졌다
든든하게 받쳐주는 구두 울타리 속에서
다가서는 길이 용수철처럼 튀었다
'너는 내 틀 속에 갇혔어'
오만하게 말하는 구두의 뻣뻣한 명령어는
발 근육과 작은 뼈들의 성정을 무시했다
'내가 알맹이야'라는 발과
길을 갈수록 마찰을 빚었다
욱신거리던 발의불만이 물집으로 터지고
쓰린 눈물이 흘러
함께 가는 길이 자꾸 절룩거렸다
발의 상처에 굳은살이 박히고
발의 눈물이 구두에 스며들어
옆구리 넉넉해진 둘은 손을 잡는다
먼지로 얼룩진 길에서 긁히고
주름 가득한 얼굴이 되어서야
헐렁한 마음으로 서로를 보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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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19
자전거
힘주어 패달을 밟아 보지만 좀처럼 나가질 않는다
튜브가 바닥에 납작 누워 시위를 한다
삶의 체인 끌고
감당키 어려운 짐에도
수없이 막아서는 장애물에도
방향을 틀면서 바퀴 탱탱하게 굴러 왔는데
무심했던 마음을 펌푸질해보니
허기가 얼마나 컷는지
거푸 거푸 채워도 반응이 없다
가슴에 박힌 못을 빼내고
바람 새는 상처를 치료하고 나서야
부시시 한숨 털고 일어나
흐트러진 바큇살을 하나 하나 일으키고
곧추세운 허리춤에
일상을 끌어다 동여맨다
앞바퀴가 힘을 모아 어기영차 뒷바퀴를 끌고
바닥을 탁탁 치면서
막아서는 것들 거뜬히 뛰어 넘을 것 같은
갈기 날리는 천리마가 된다
--------------------------------------------------------
우편번호 ;156-850
주소; 서울시 동작구 신대방2동 한성 아파트 104동1603호
전화; 02-834-7957 , 016-375-7957
이름 ;김 은 덕
---경력사항--
청주 대성여자고등학교 교사 역임
각종 백일장에 시와 산문 다수 입상
서울시 여성문예원 주부백일장 입상
시사랑회 포엠큐픽션 이달의 우수작 2회
국민카드 문학상 입상
동작구 주부백일장 장원
하루를 몇 번씩 접었다 폈다 하며
꽃을 만드는 여자
문이 닫혔다 열리는 사이
불이 꺼졌다 켜지는 사이
그녀 손에 싹이 돋는다
지친 어깨 늘어트린 하루의
등을 톡톡 쳐서 곧게 일으키고
꼿꼿해진 거실에
생기 한 다발 부려 놓는다
문이 닫혔다 열린 자리가
마음 환히 비추는 거울꽃이다
이리 저리 뒹구는 시든 이파리들
한 장, 두 장 거두어
줄에 널면 햇살바라기 꽃이 된다
바구니에 싱싱한 계절을 담아와
식탁에 꽃밭을 꾸미고
압력솥에 따스함을 입력하면
딸랑딸랑 방울꽃이 요령을 흔들고 돌아다닌다
방울소리 채워지면
얼른 꽃을 꺾어
마음에 걸어 두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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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2 꽃을 만드는 여자 2
-미용실에서
-어떤 꽃으로 해 드릴까요?-
주문한 꽃의 메모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지고
생의 동반자 같은 것들 시동을 건다
무성한 밭을 누비고 다니면서
무순처럼 쑥쑥 웃자란 이파리들 자른다
삐죽거리는 불만들을 쳐내면
지난 기억들이 잘려져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이슬부린 이파리들 바람에 부풀리고
줄기와 뿌리까지 탱탱한 노래 삽입한다
열 손가락이 저마다의 몫을 당기고 눌러준다
꽃잎 한 장, 한 장마다
꽃 이름을 새기면서
몸에서 뽑아낸 솜씨를 바르고
촘촘히 말아 캡을 씌운다
머리를 만질 때마다
손에서 피어나는 각양각색의 꽃을 위해
온종일 머리카락 밭을 누비고 다닌다
골고루 매만져 익힌 꽃이
활짝 피어나
화사한 손 흔들며 문을 나설 때
내 가슴은 온통 꽃물결로 출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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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3 꽃을 만드는 여자 3
-산업체 특별학급
가쁜 숨 몰아쉬는 컨베어벨트 위로
노을꽃이 내려앉으면
작업복 대신
꽃잎 같은 교복으로 갈아입는 그녀
하나의 교복이 되면
꽃향기 그윽하다
제품 같은 오빠의 뒤에 제조일자로 남아
쓸쓸히 꽃대 꺾어야 했고
집 걱정 속옷으로 껴입고 다녔다
어둠을 잘라 형광등 불 밝힌 교실에
낮 동안의 노역을 끌어다 등줄기 꼿꼿이 세운
넌출 같은 갈래머리로 담 넘으려는 그녀
진딧물로 엉겨붙는 졸음과
가슴을 파먹는 책 속의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달빛 일으키는 시계바늘 위에서 씨름을 한다
불빛에 칠판 글씨 익어 가는 교실
낮에는 공장에서 꽃대 세우고
밤이면 책갈피마다 꽃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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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4
꽃을 만드는 여자 4
-조산원(助産員)
달 빛 끌어당겨 산문을 열어야 하는 그녀
만월(滿月)을 상하지 않게 잘 받아야 한다
소독된 마음을 펼쳐놓고 어둠을 가른다
푸른 달빛을 건져 올릴 수 있을까?
숨죽이며 물때를 기다린다
달이 물 속 깊이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구름에 산 그림자
겹쳤다, 벗어났다 한다
밀물이 작은 파도를 몰고 온다
점점 파도가 거세지더니
큰 파도가 산을 내려친다
혼절했던 산을 가까스로 일으켜
실뿌리같은 세상 끈을 움켜쥐게 한다
물때를 놓치면 안된다고
부르르 떠는 산에 불을 당긴다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달 비치더니
큰 파도 하나 달려들자
재빨리 타고 앉아 파도를 자른다
순간, 썰물이 미끈덩한 달 하나 뱉어낸다
바짝 날 세운 그녀
두 손 황홀한 달을 받쳐든다
쪼그리고 있던 달이 울음을 토하자
달꽃 피어나
주위가 온통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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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5
주름이 익어갈 때
밖에서 주눅이 들어 온 옷들에게
기를 살리는 일은
주름을 익히는 방법이 있지요
풀썩 주저앉아 한숨만 토하는 옷을
티검불 툭툭 털어 너럭바위에 널고
물 한 모금 촉촉이 갈수(渴水)로 뿌려주면
봄 이슬 머금고 파릇파릇 솟아나지요
무성한 상처의 가지와
불만의 언어들을
마디마다 고열과 미열을 고루고루 섞어가며
등과 가슴, 허벅지를 꼭꼭 밟아가면서
지압을 해 주면
진저리치던 옷들이
파안대소로 피어납니다 그러면,
내 손은 주치의가 되어
완치를 위해
옷의 구석구석에 쪼그린
그늘을 살펴
불편한 솔기마다
친절한 손길로 어루면
완연한 봄으로 깨어나지요
옷은 가뿐하게 일어서
당당한 어깨로 튀어 오릅니다
주름이 익으면 기가 살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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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6
꽃을 만드는 여자 6
김 구이 기계 앞에 앉아 하루의 자전축을 돌리는 그녀
시장 한 모퉁이 습지를 말려 나간다
온도 센서에 눈금을 조절하고 간을 맞춰
열이 과하지 않게, 미진하지 않게
중심 축을 잡고 시간을 돌려 태엽을 감아간다
조선김, 돌김, 파래김의 낙장(落張)을 헤아리면서
다양한 그들의 내력을 차례로 읽어간다
부리던 사람 밑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김가루 날리는 일이지만
가슴언저리의 아물지 않은 상흔이
그녀의 길을 떠메고 간다
구어져 나오는 김 사이에 끼어들면
보도 블럭 틈새 비집고 자라나는
풀이끼가 되고
김이 구워져 떨어질 때마다
한 계단씩을 오르는 것도 같은데
구수한 냄새가 손짓하여 부르는 것도 같아
어딘가, 어딘가 두리번거리다
하마, 자신을 놓칠 뻔 한적 있다
구워져나온 김들은 반짝 윤을 낸다
튀어 오를 것 같은 바삭한 언어와
기름 향이 은은하게 피어나는 꽃들의 몸짓
거칠게 다루면 바스라질 것 같은
놓치면,
바람에 한없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날개 같은 김 꽃을
바람 들지 않게 조심스레 비닐포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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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7 겨울나비
102동 앞에 울타리 친 사람들을 뚫으니 맨 땅에 누워있는 나비 한마리,
머리끝까지 거적을 덮고 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길이 없는 저 나비가
희뿌연 공기를 가르고 균형 잃은 한 쪽 날개를 퍼덕이더니 순간, 언 땅에
곤두박질쳤다는 무성한 말이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며칠 전,
이웃 아파트에서도 출몰했다는 겨울나비 때문에 관리소는 골치가 아프다면서
투덜거리고, 저놈의 높이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아파트를 사정없이 찌른다.
하늘 지붕 아래 고개 조아린 25층 아파트 꼭대기에서 세 번째 복도 창문만이
조용히 입을 열고 방조자였음을 자백한다. 회오리바람이 이는 창문마다 빨간
불이 켜지고 상황조사를 나온 백차와 구급차가 쉬쉬하며 서둘러 봉해 놓고 떠난
그 자리는 여전히 헛구역질을 한다. 사람들은 어떤 냄새를 낚으려는 쇠파리 떼의
음모를 숨기고 세상의 공기를 걱정하면서, 절여진 가슴 나누며 무겁게 돌아갔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흔적을 삼킨 그 자리는 엉킨 실타래로 삶 속에 박혀
냄새를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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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8 묘비
투명한 가을 햇살에 양치를 끝낸 듯
가지런한 잇속을 드러내고 있는
현충원의 묘비들
그 속에서 묘비명으로 걸어나오는 얼굴들
세월의 강폭을 건너와
내 가슴 물결 타고 출렁거린다
푸른 창공을 향하던 꿈들이 접혀
쓸쓸한 이마를 만지고 있구나
폭풍우 거세던 날
꺼질 듯 가물거리는 등불의 심지로 맞서
환하게 솟아올랐던 꽃들이여
지난날을 그리워 할 겨를도 없이
잘려나간 시절들이여
작고 푸르던 몸 던져
이 땅에 큰 나무 그늘을 드리웠구나
깨알 같은 사연 물고 있는 묘비들 사이로
나는 굴곡진 시간의 강을 따라 걷는데
돌부리로 걸리는
묘비 하나
내 발부리를 적신다
빈 얼굴에 글자 몇,
무·명·용·사
둘러싼 이력
낙엽으로 흩어지고
이름 없는 이름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묘비에 손을 얹으니, 나는
멍울 삭이는
어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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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9
피리소리
상반신이 잘려나간 늙은 과실수들
과수원 모퉁이 그늘에 모여
힘줄 삭은 밑둥을 부여잡고
피리를 불고 있다
어린 과실수들이
단물 들이키는 것을 쳐다 볼 때마다
물오르던 지난 시간들이
높고 낮은 음으로
피리 구멍에서 흘러나온다
촉촉한 눈웃음,
지나는 바람과 밤이 익도록
사랑노래 부를 때는 몰랐다
햇살 손끝이 닿을 때마다
수줍은 볼이 발갛게
부풀 때도 몰랐다
실핏줄 하나까지 가래톳을 삭이며
절벽을 넘는 산고의 새벽을 깨야 할 때도
정말 몰랐었다
해마다 분신 같은 열매에
몸이 찢겨 나가도
달디단 침을 삼키며 견뎌왔는데
폐경기 여인으로 누워
구슬픈 피리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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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
가시 박힌 울음 속에는
햇살에 몸을 널고 있는 고양이 일가(一家)
길모퉁이 잡풀 숲 주인이 되었다
낯선 세상 부신 듯
여린 손짓, 발짓으로 자꾸 눈을 가리는
새끼들 곁에
기둥 발 세운 어미의 눈이 잔잔히 깔린다
지난 밤
가시가 콕콕 박힌, 겹겹의 그 울음으로
온 동리를 휘감던
암내를 날리던 그 고양이던가?
쓰레기장에 나타나
무덤 파헤치듯 봉지를 날카롭게 찢으며
게걸스레 허기를 채우던
임신한 그 고양이던가?
폭풍우 같던 시간을 건너왔구나
희미한 달빛에 걸린
가시울음 속에
넝쿨 같은 새끼들 감고 있었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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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
천평칭(天平秤)
마주 앉은 두 사람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사위를 던지고 있다
찻잔 속에 마음을 꼭꼭 숨기고
탁자에 떨어지는 딱딱한 숫자들을 줍고 있다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려는 듯
허공에 수없이 가위 바위 보 하면서
내가 가위를 내면 그는 주먹을 내고
그가 보를 내면 내가 가위를 내는
자꾸 어긋나는 게임
저울 위에 올라앉아 서로의 무게만 잰다
깃발이 손짓 해 부르는 강 언덕에 당도하기까지
살얼음판 건너듯 조심조심 발 디뎌야 하는데
아직 몇 개의 강을 더 건너야 하는지
마음을 저울질하면서
넘치면 덜어내고,
모자라면 보태고,
손닿지 않던 먼 거리에서 점점 다가와
좁혀진 그와 나와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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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
역류
그와 내가 맑음이었을 때는
막힘 없이 소통되었다
서로 물줄기 흘리면
서로의 하수구를 잘 흐르더니
구름이던 어느 날
바람결에 나부끼던 이파리 하나
가시 되어 목에 걸렸다
서로를 삼키지 못하고 무겁게 내려앉아
비를 뿌리더니 마침내,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를 몰고 온다
수위를 넘어서고
가슴 언저리에서 거친 소용돌이된다
소통되지 못하고 범람하여
허접쓰레기들 쏟아져 나와
고인 빗물에 둥둥 떠다닌다
충혈된 눈자위 굴리며 허둥대는
생쥐 한 마리
젖은 털을 부르르 턴다
하수구를 해체하고
무겁게 누르던 것들을 하나씩 들어낸다
가슴에 달라붙어 서로를 질척이게 했던 것들
긁어낸다
둘의 틈새 비집고 공기방울이 올라오고
점차 수위가 낮아지더니
묵은 체증이 뚫려 트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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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 항해
물길 가르고
우리 집 포구에 닻을 내린 가물치
솥과 뚜껑의 힘 겨루기가 시작되어
만만한 균형이다가
술렁이는 파도이다가
결국 그의 꼬리차기로 배가 기울고
튀어나온
먼 물길을 갈망하듯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듯
바닥에 오체투지(五體投地) 할 때마다
쏴쏴 물결이 몰려와 소용돌이 된다
간절한 마음으로 입을 달싹거릴 때마다
플랑크톤이 튀고
불한지옥을 건너온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제가 가르고 온 물길을 놓지 않는다
그는 수평선 아득한 대양을 꿈꾸어 왔을 것이다
바닥에서 그를 주워 다시 벌겋게 달궈진 솥에 넣자
파닥파닥 불똥이 튄다
진퇴양난의 벽에 갇혀
붉고 슬픈 뱃고동을 울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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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 낚시터 풍경
찬바람이 거리를 점점 옥죌수록 생겨나는 낚시터
골목어귀, 보도의 후미진 곳마다
보퉁이 껴안듯 자리잡은,
바람에 옷자락 날리는 사람들
비닐 천막으로 둘러쳐진
물웅덩이에 미끼처럼 흘러든다
언젠가부터
횡단보도 건너편에서도
훈김 서린 비린내가 몰려온다
신호등에 발 묶이는 사람들
주머니 속이 궁금해져
달그럭거리던 마음을 걸어 낚싯줄을 늘이고
허허로운 등줄기까지 바늘에 꿰어
입질을 하면
딸깍딸깍 자맥질하던 붕어들 줄줄이 올라온다
구겨진 단풍잎 한 장에
여러 마리의 붕어를 낚을 수 있다는 소문이
그 낚시터에 모여들게 한다
비린내 안개처럼 자욱하게 공복 속으로 스미고
통통하게 알 밴 붕어 한 마리
입안 가득 부서지는 소리난다
꼬리지느러미까지 내장 속으로 밀어 넣으면
구들장으로 데워져 온 몸이 따끈따끈 해지고
움츠렸던 어깨에 붉은 살이 돋는다
길도 따뜻해져 뭉개 구름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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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길
목련꽃 칼라가 눈부신 친구들을
골목에 숨어
부러움 가득 달빛을 태웠다는 그녀
'전쟁 나면 소용없다'
'남의 식구 될 딸, 가르쳐 뭐하나' 하던
배고픔이 머리에 올라앉았던 시절
사춘기 솜털 불퉁거릴 때 그녀
초등학교 졸업장 달랑 들고
아버지가 낸 길을 따라 시집을 갔다
내가 여고시절의 맑은 해를 닦고 있을 때
젖내 달큰한 달을 짊어지고
내가 해독이 난해한 문자를 헤아리면서
미팅과 축제의 왁자한 길목에 서성거리고
꽃잎으로 흩날릴 때
그녀, 좌판에 비릿한 그물을 치고
거친 하루를 출렁거렸다
수평선과 지평선을 숨가쁘게 넘나들던
두 아이를 오지게 걸치고
구불구불 기어오른 등나무
비포장 길에 맨발로 달려온
그녀의 등뒤에
아스팔트길 위에 풋내 나는
내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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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16 종이컵이 흘리는 말
준비된 마음 차곡차곡 쌓아 놓고 있다가
누군가 날 부르면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는다
안에 갇혀있던 여린 얼굴
누구 앞에 나서기란 조바심이 난다
그리움처럼 품어야 하는 것들
내가 감수해야 하는 것들
뿌리칠 수 없는 것들
쓰디쓴 맛, 떫은맛, 새콤달콤한 맛
내 몸의 실핏줄을 타고 흐르면
흥건하게 젖여
살거죽이 물러지도록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밤안개 같은 날들
살아간다는 것은
맛을 알아간다는 것
맛을 알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젖어드는 것
힘줄 삭아져 후질근해지면
구겨지거나 내 팽개쳐질 일만 남아도
한때, 나를 소중하게 감싸던
따스한 손과 기억들을 놓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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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17
건반 위에서
단단한 콘크리트 벽과 창으로 경계짓는
아파트의 수없이 많은 창문 사이로
길 잃은 아이처럼
피아노 소리가 두리번거린다
하얀 건반, 검은 건반 위를
징검다리 건너듯 조심스레
유리구슬 굴리는데
길을 가다가 음계에 걸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시작하고
앞을 가로막는 숲을 헤치고 바위를 돌아
시냇물 굽어진 길
정상으로 가기 위해
음표의 능선을 수없이 타고 넘는
저 등반
'뻐꾹 왈츠' 에서 고개 내민
뻐꾸기 한마리 아파트 숲을 날아다니며
콘크리트 벽과 벽을
길과 길을 하나로 묶으면서
둥글게 날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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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18 관계
새 구두를 신던 날, 발은
반들거리는 구두코에 환하게 물들고
구두 소리가 길을 컹컹 울리는 것 같아
발등이 가려울 정도로 으쓱거려졌다
든든하게 받쳐주는 구두 울타리 속에서
다가서는 길이 용수철처럼 튀었다
'너는 내 틀 속에 갇혔어'
오만하게 말하는 구두의 뻣뻣한 명령어는
발 근육과 작은 뼈들의 성정을 무시했다
'내가 알맹이야'라는 발과
길을 갈수록 마찰을 빚었다
욱신거리던 발의불만이 물집으로 터지고
쓰린 눈물이 흘러
함께 가는 길이 자꾸 절룩거렸다
발의 상처에 굳은살이 박히고
발의 눈물이 구두에 스며들어
옆구리 넉넉해진 둘은 손을 잡는다
먼지로 얼룩진 길에서 긁히고
주름 가득한 얼굴이 되어서야
헐렁한 마음으로 서로를 보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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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19
자전거
힘주어 패달을 밟아 보지만 좀처럼 나가질 않는다
튜브가 바닥에 납작 누워 시위를 한다
삶의 체인 끌고
감당키 어려운 짐에도
수없이 막아서는 장애물에도
방향을 틀면서 바퀴 탱탱하게 굴러 왔는데
무심했던 마음을 펌푸질해보니
허기가 얼마나 컷는지
거푸 거푸 채워도 반응이 없다
가슴에 박힌 못을 빼내고
바람 새는 상처를 치료하고 나서야
부시시 한숨 털고 일어나
흐트러진 바큇살을 하나 하나 일으키고
곧추세운 허리춤에
일상을 끌어다 동여맨다
앞바퀴가 힘을 모아 어기영차 뒷바퀴를 끌고
바닥을 탁탁 치면서
막아서는 것들 거뜬히 뛰어 넘을 것 같은
갈기 날리는 천리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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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번호 ;156-850
주소; 서울시 동작구 신대방2동 한성 아파트 104동1603호
전화; 02-834-7957 , 016-375-7957
이름 ;김 은 덕
---경력사항--
청주 대성여자고등학교 교사 역임
각종 백일장에 시와 산문 다수 입상
서울시 여성문예원 주부백일장 입상
시사랑회 포엠큐픽션 이달의 우수작 2회
국민카드 문학상 입상
동작구 주부백일장 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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