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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구-단편소설1(2004.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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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와 물고기
병원의 아침은 여느 때처럼 분주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두꺼운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버티고 서있는 병원 건물의 위용마저 떠오르는 태양을 눈부셔하고 있을 무렵, 상현은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아, 또 깨지겠네. 왜 만날 늦는 걸까.'
신교수의 모습이 떠올랐을까 달리고 있는 다리에 정신을 집중해도 모자랄 상현의 얼굴이 순간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가 그대로 몽롱해졌다.
"자넨 뭔데 이제 들어오는 거야!"
상현이 문을 빠끔히 열고 머리를 들이밀자 신교수의 테러와도 같은 지청구가 날아왔다. 상현은 올 것이 왔다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고 문을 더 열어 젖혔다.
"누가 들어오래? 나가있어!"
이어서 날아든 두 번째 직격탄과 온 좌객들의 뜨겁고도 민망한 시선은 두 개 네 개의 화살이 되어 온몸을 찢어놓았다. 꼼짝없이 강제 퇴장을 당한 상현은 복도의 벽에 붙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서성이기를 한 30분쯤 했을까. 웅성거리는 소리와 의자 끄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더니 곧 문이 열리고 수련의들이 파도처럼 밀려나왔다. 상현은 거북이처럼 몸을 움츠리면서 인의 장벽 속으로 숨어들었지만 그런 기억을 쉽사리 잊을 신교수가 아니었다.
"이상현!"
바늘처럼 예리한 신교수가 짙게 쳐져있는 인의 장벽을 뚫고 상현을 투시해냈다. 상현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고개를 뽑아들었다. 그러자 한달 내내 당직을 서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어명을 너무나도 쉽게 툭 꺼내놓고 신 교수는 회진을 돌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고 싶지 않았지만 그랬다가는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두 달이 세 달 네 달이 될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시장에 팔려 가는 소처럼 무거운 억지 발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곧 있으면 자신이 맡은 입원 환자들에 대한 회진도 이어진다.
"어제 술 더 마셨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영준이 속삭였다. 그는 상현의 학교 선배였지만 상현과 같은 내과 1년 차로 수련을 받고 있었고 따라서 두 사람은 모두 신출내기였다.
"됐어요. 어제 괜히 방황하다가 들어와서 늦게 자는 바람에. 아, 당직 서려면 죽어 났다."
"후후, 열심히 서."
씩. 상현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는 영준의 얼굴이 그날은 최고로 밉상이었다
내과 레지던트 1년차. 상현은 병동을 가득 메우고 누워있는 수많은 환자를 돌보느라 여념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퇴원, 새로운 환자의 입원, 퇴원, 입원. 줄을 잇는 환자의 행렬은 마치 일상의 반복과도 같이 또는 그 자체가 일상처럼 다가왔다.
대강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영준이 TV를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숙소에서는 좀 금연하시지."
아침의 일도 있고 해서 상현은 빈정거리고 싶었다.
"아, 또 왜 그래?"
영준은 능글맞게 환하게 웃으며 화답해 주었다. 웃음만으로 그를 판단한다면 실없이 보일지 모르지만 영준은 매우 성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애기 보러 안 가요?"
"당직인데 어떻게 가? 그래도 너보다야 낫지만."
영준이 다시 슬쩍 상현을 긁었다.
"어제 술 마시자고 한 게 누군데, 자기만 일찍 들어가서 자고 일찍 나오면 다요? 괜히 나만 발동 걸려서 늦게까지 마셨잖소."
"아, 미안해. 그러니까 조금씩 먹어야지. 왜 흥분하고 그래. 피곤할 텐데 일찍 쉬어라."
창 밖은 어둠이었고 병원은.
"참, 스텝 한 명이 더 온다더라."
TV를 보던 영준이 침상에 누운 상현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요?"
눈을 감은 채 무심하게 되묻는 상현.
"그런데 너랑 동갑이래. 어쩌면 좋으냐?"
"글쎄요."
상현이 선잠을 자는 것 같아 영준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또 날이 밝았다는 건 과연 축복인가. 달력의 날짜를 지우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 된지 오래이다.
회진. 회진이다. 길을 비켜라. 그렇지만 복도에는 아직 아무도 없다. 상현 혼자만 불도 켜지 않은 길을 누비며 환자를 체크하는 것이다. 이 방에는 누구누구 저 방에는 여자 환자들, 그 방에는 격리 환자들이 있다. 밤새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선생님."
3506호에 들어서자 활력지수를 재고 있던 간호사가 인사를 했다. 상현은 입 벌리기가 귀찮아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만 했다.
의국회의. 의국회의다. 높은 사람들이 하나씩 들어온다. 그때마다 예를 표시하기 위해 엉덩이를 들썩이는 낮은 의사들. 그 중에 상현도 있고 영준도 있다. 영준이 고개까지 푹 숙이며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모습을 보며 상현은 웃기는 장면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미소를 지었다.
회의 중.
회진이다. 진짜 회진이다. 높은 사람들이 나가신다. 사람들이 길을 비킨다 진짜로. 정찰대가 앞으로 길을 트고 뒤에 따르는 군사들. 대단히 위엄이 높다. 병실에 들어설 때마다 환자들, 보호자들이 구세주 대하듯 경배를 드린다. 옆에 따르는 주치의가 나불거리며 상태를 설명하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한 마디에 환자의 운명이 바뀐다.
회진이 끝나고 쉴 틈도 없이 환자들에게 새로운 처방을 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잠깐이나마 엉덩이를 붙일 낯이면 어느새 핸드폰으로 호출 전화가 왔다. 그것도 안되면 방송으로 불러들인다.
"내과 전공의 선생님."
예상했던 대로 천장의 스피커가 켜지고 방송이 흘러나오려 했다. 차분한 여자의 목소리지만 거부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또 누굴 찾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과 전공의 선생님은 의국으로 오십시오."
누굴 찾는 게 아니고 모두 모이라는 소리였다. 상현은 적고 있던 차트를 마무리하고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의국에 들어섰을 때는 윗년차 선생들과 동기들이 제법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인지 몰라 앉아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데 신교수가 들어왔고 그 뒤를 이어서 낯선 사람이 따라 들어왔다. 가운을 입은 걸 보니 의사인 것 같은데 누구지. 상현은 잠결에 들었던 영준의 말을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이쪽으로 앉지."
신 교수는 같이 들어온 이에게 자신의 옆에 앉도록 하고 이내 소개하기 시작했다.
"자, 이쪽은 이번에 전문의 자격 시험을 통과하고 우리 병원 스텝으로 오시게 된. 역시 예상했던 대로 온다던 그 사람이구나. 그런데.
"김 한수 선생님이십니다."
김 한수. 상현은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그래, 녀석도 의대에 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한수가 일어나 인사말을 하는 동안 상현은 과거의 회상에 잠겨버렸다.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는 소리에 차안으로 돌아온 상현은 사람들을 따라 의국 문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다른 전공의들은 순식간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지만 상현은 잠시 자리에 서서 신 교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제발 그러지 말기를 바랬지만 한수가 상현을 불렀다.
"이 상현 선생!"
정말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된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잊혀지지 않고 뇌리에 저장되어 있었다. 고개를 푹 숙였던 상현은 묵묵히 돌아섰다.
"나 몰라? 김 한수. 오랜만이다."
"어, 네."
상현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계급사회나 마찬가지인 의사들의 세상에서 그는 분명히 높은 의사였고 자신은 낮은 의사였다. 그때 한수가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왜 그래? 동창끼리. 정말 오랜만이다. 고등학교 때 보고 처음인가?"
"어, 어. 그런가. 오랜만이다."
"네가 여기 있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어. 미리 연락을 해볼까도 했는데 놀래켜주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냥 왔지. 앞으로 잘 해보자."
'오,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나.'
상현은 어색함을 해결할 방도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어떻게 벌써 스텝으로?"
그래서 약간은 본심이 드러나 버렸을까.
"내가 온 게 별로인가보군."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농담이야. 농담."
'오, 이 유린당하는 기분.'
"넌 학교 다니다가 군대 갔다 왔지."
"어. 알고 있었군."
"다른 애들 만날 때 네 얘기도 들었지. 사실 난 면제받았어. 운동하다가 십자인대
가 나가서."
'오, 네가 운동도 한다고? 게다가 인대가 끊어질 정도로.'
"잘 됐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말을 상현은 잘도 해냈다. 해냈다.
"그래, 그럼 가서 일 봐. 회식 때 보자."
한수는 여유 있는 모습으로 멋지게 먼저 돌아섰다.
"어. 그, 래."
상현이 억지스런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아, 추워."
밤 10시. 언제나처럼 업무를 마치고 숙소의 문을 연 상현은 넋두리처럼 날씨 탓을 했다. 영준이 창문을 열어놓은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창문 열어 놓고 피라며."
"내가 언제 그랬소. 금연하라고 했지."
"그랬나. 사정 잘 알면서 왜 그래. 담배 피울 데도 없단 말야."
영준도 상현이 그냥 해본 소리라는 것쯤은 알면서도 대화를 원했을 뿐이다.
"끊어요, 끊어. 집에 가서도 애 때문에 못 피우면서."
"그래야지... 참 새로 온 스텝 선생하고 아는 사이야?"
"예?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 아까 의국 앞에서 뭐 좀 물어보려고 했는데 둘이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냥 갔지."
"제 학교 동창이에요."
"그래? 허, 재미있게 됐네. 고등학교?"
"네. 그런데 2학년 때 전학 가서 못 봤죠. 그때 이후로 처음 봤어요."
"세상이 좁긴 좁군. 헤어졌던 친구를 다시 만나고."
'친구?'
상현은 친구라는 단어가 조금은 뉘앙스가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친했어? 둘이."
"글세, 별로 안 친했어요. 공부만 했던 애라서. 성격도 별로고."
"그래? 학교 다닐 때 어땠는지 얘기 좀 해봐."
호사가 기질도 가지고 있는 영준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덤벼들었다. 상현은 아차 싶었지
만 이제 와서 말을 돌리기는 늦은 듯 싶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냐고? 사람은 언제나 변하고 있는 중이니까 그런 걸 따질 필요는 없을 텐데. 그래도 굳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왜 일까. 그이의 삶을 체험해 보고 싶기라도 한 건가. 하긴 한 사람 붙잡고 그 인격을 요모조모 뜯어보는 재미가 훌륭하기는 하지만서도.
한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단지 고등학교 1년 남짓한 단기간의 기억뿐이지만, 한 단어가 생각나기 마련이다. 그건 다름 아닌 상현이 그에게 붙여주었던 별명. 친구에게 좋은 별명 붙여줄리 없겠지만 그의 별명은 고약한 것 중에서도 아주 최악이었다. 그렇게 불리는 것을 전혀 원하지도 않았고 그런 별명을 붙인 상현을 원망하는 것이 매우 합당한 일로 보일 만큼 그랬다.
한수의 별명은 바로 '물고기'였다. 그의 눈이 붕어처럼 툭 튀어나온 것일까. 아니다. 그럼 그가 매일 생선 반찬만 싸온다거나 그의 어머니가 어물전에서 장사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상현의 고등학생다운 유치한 발상이 만들어낸 기발하다면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I, My, Me. You, Your, You. He, His, Him...
Myself, Yourself, Himself...
self, selfish, sel fish, fish...
그렇게 그는 sel-fish라는 물고기가 된 것이다. 이기적인 물고기라는 뜻의. 지금이야 모두 이기적이고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도 웃어넘길 일이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이기적이라는 말이 지금보다는 훨씬 큰 욕처럼 들리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기억하기도 쉽게 기발한 발상의 별명을 만들어 유포시키고 가끔씩 웃음거리가 되게 하였으며 그의 이미지를 '이기적'으로 굳어지게 했으니 어찌 보면 상현이 더 큰 죄를 지은 건지도 몰랐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이제는 그의 별명을 기억하는 이가 드물디 드문 것이 사실이겠지만서도.
한수가 특별히 나쁜 짓일 일삼거나 남에게 피해를 준 것은 없었다. 폭력가, 외설가 등 그보다 나쁜 놈들은 수두룩했다. 한수에게 잘못이 있다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 그것뿐이었는지 모른다. 혼자 공부하고 점심시간에도 혼자 도시락을 먹고 혼자 집에 가고, 뭐하고 노는지는 몰라도 혼자 놀고 그랬다. 그게 어찌 나쁜 짓이겠나. 상현은 한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녀석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공부는 잘 하니 머리도 좋은 놈 같은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걸까. 같은 반 아이들하고 좀 같이 놀면 좋지 않겠니.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딱딱한 이름 대신 듣기 좋지는 않지만 웃기는 별명도 붙여주고 쉬는 시간이면 가끔씩 옆구리를 찔러가며 세상 밖으로 끌어내고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한수는 완고했고 상현이 그럴수록 자꾸만 더 자신만의 세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았다.
"흠, 그랬구나.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
고교의 추억을 듣고 난 영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변했겠죠. 낮에 보니까 성격 많이 좋아진 것 같더라고요."
"그렇겠지. 의대 졸업하고 수련까지 받았으면 대인관계도 많이 경험했을 테고, 근데 군대는
언제 가는 거야?"
"면제 받았데요. 십자 인대가 끊어졌다나. 운동도 안 하던 애였는데, 운동도 하나봐."
"그래서 벌써 스텝으로 왔구나. 잘 풀렸네. 그런데 네가 좀 껄끄럽겠다. 동창이 위에 있으니."
"할 수 없죠, 뭐. 하는 거 봐서 나도 그만큼만 해야지. 씻고 올게요."
상현은 수건을 챙겨 샤워장으로 갔다. 더운물을 틀고 몸을 적셨다. 고등학교 시절이 많이 생각나는 하루였다. 그때의 일을 한수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혹시 무슨 오해나 원한 같은 것을 간직한 건 아니겠지. 날씨가 추워져서인지 물이 따뜻하지가 않다. 물을 잠그자 이내 몸이 차가워지면서 소름이 돋았다.
"으- 춥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영준은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어디 가요?"
"출출하지 않냐? 요 앞에 나가서 붕어빵이나 먹고 오자."
"그런데 뭐 하러 옷을 다 챙겨 입었어. 잠깐 나갔다 올 거면서."
"날씨 많이 추워졌어. 잘못하면 감기 걸린다."
"하긴 샤워하는데 얼어죽을 뻔했네. 벌써 붕어빵이 나왔나? 그리고 왜 하필이면 붕어빵이야, 내 친구 생각나게."
"응? 후후, 그러고 보니 그러네. 같은 물고기네."
"와, 진짜 춥네."
옷을 대충 입고 나온 상현은 병원 밖의 날씨를 실감한 듯 외쳤다. 영준이 그것보라며 히죽 웃었다.
"저기 포장마차에서 붕어빵도 팔았나?"
상현은 병원 주위에 일년 내내 버티고 장사를 하는 포장마차 단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아냐. 조금 올라가면 새로 생긴 데 있어. 저기 보이지."
영준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지만 금새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몇 걸음 더 옮기고 나서야 허름한 포장마차가 하나 보였다. 포장마차라고 하기에도 그 이름이 걸맞지 않을 정도로 작고 초라한 모습이 멀찌감치 에서도 확인되었다.
가까이 에서 보자 더 그랬는데, 파라솔 하나에 비닐을 둘러치고 안에는 백열전구도 없이 초를 두 개 켜놓은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서자-사실 들어섰다기 보다는 옆에 섰다는 말이 어울린다.- 영준이 먼저 인사를 했다. 처음이 아닌 모양이다.
"아유, 예. 오셨떠요."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주인은 말이 어눌했다.
"먹어."
영준이 말하자 우두커니 서 있던 상현이 다 구워져서 철망 위에 진열되어 있는 붕어빵 한 개를 집어들었다. 그러자 희미한 촛불 사이로 주인의 얼굴이 보였는데 그는 언청이(구개열) 수술을 한 게 틀림없었다.
'불행한 사람이군.'
상현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묵은 얼마예요?"
상현이 묻자 주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정말 미안해하며 말했다.
"아, 저기, 100원인데요, 물이 떨어져서, 오늘은..."
"아 그래요. 다음에 먹죠."
그렇게 말하고 100원이라는 말이 의아하게 여겨져서 붕어빵은 얼마냐고 다시 물었다.
"150원요."
'그럼 남는 게 있나요?'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붕어 한 마리를 더 집어들었다.
둘이서 붕어빵 세 개씩 먹어서 여섯 개를 먹었는데 1000원을 내자 100원을 거슬러주었다. 영준은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주인은 펄쩍 뛰면서 100원을 손에 쥐어주었다. 상현이 보기에는 실로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과연 저렇게 해서 장사가 되는 건지, 장사에 뜻이 없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준에게 물었지만 영준도 대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게 말이다. 너무 착해서 돈도 모르는 것 같애."
그저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오늘 기대된다."
숙소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영준이 히죽 웃었다.
"뭐가요?"
상현은 피곤하다는 듯 건조하게 말했다. 제 삼자가 보면 너무 차갑게 보이겠지만 영준은 상현이 별 뜻 없이 종종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김한수 선생 말야. 며칠 보니까 괜찮은 사람 같던데, 오늘 회식 자리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사뭇 기대가 되는걸."
"형이 그 친구를 얼마나 안다고 그래요. 며칠 봐서 사람을 어떻게 알어."
"그러니까, 오늘 더 기대가 되지. 너 옛날 기억만 가지고 선입견을 갖고 있는 거 아니냐?"
"그럴 수도 있겠지."
상현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쉽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은 그래서 상현도 기대가 되긴 했다. 기대라기 보다는 궁금했다. 사람이 변했는지 시간만 지나갔는지. 피곤에 찌든 회식이 잡혀있는 쌀쌀한 금요일 저녁이 깊어만 갔다.
음식점 한 층을 빌린 환영식은 인원수가 많은 만큼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시작되었다. 낮은 사람들은 미리 와서 음식을 앞에 놓고 기다리고 높은 사람들은 뒤늦게 천천히 식당 안으로 입장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주인공 한수와 내과 과장이 입장하고 식순에 의해서 만찬이 진행되었다.
"그럼, 우리 과에 새로 오신 김한수 선생님의 소감 한 마디를 듣겠습니다."
사회를 보던 4년차 전공의가 한수를 소개하자 자리에 앉아 있던 한수가 미소를 머금은 채 일어섰다.
"너무 오래 기다리신 것 같아서 길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모두가 기다리던 얘기를 한수가 집어내자 좌중의 웃음꽃이 봉우리를 맺었다.
"우선 여러분과 함께 근무하게 되어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 실력이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과장님 이하 여러 선배 의사 선생님들의 지도하에 최선을 다해서 일하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는 의미에서 건배를 제의합니다."
한수가 꾸벅 인사를 하자 우레와 같지는 않아도 그와 비슷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그의 매끄러운 인사를 사랑했고 상현은 약간의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말이 없던 애가 어디서 저렇게 청산유수와 같은 말솜씨를 익혔을까. 웅변학원이라도 다녔단 말인가.'
배가 차 오르자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하기에 바빴다. 윗사람에게 얼굴을 알리고 술을 나눠 마시기 위해 잔을 들고 이리저리 방문을 했다. 그런 가운데 상현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한수를 관찰했다. 적대적인 감정 때문은 아니고 영준이 말했던 대로 그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한수는 또 예상치 못했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과장부터 시작하여 모든 스텝들에게 술잔을 돌리는 것을 보고 상현도 긴장을 풀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진짜 많이 변했네. 술도 잘 마시나봐."
상현이 옆자리에 있던 영준에게 말했다.
"네가 너무 오버한 거라니까. 괜찮은 사람 같구만. 자, 술이나 마셔."
영준은 벌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도 가서 인사나 해야겠다. 그래도 윗사람인데."
"형이 오버하는 거 아니오?"
영준이 잔을 들고 일어서자 상현이 남은 잔을 털어 넣으며 말했다.
한수에게 가는 영준을 보며 상현은 괜히 약이 올랐다. 아직 옛 친구를 믿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의 문이 열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 얼굴 속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교수들한테 술잔을 올릴 때의 표정이 영 아니잖아. 벌써 낯빛이 거만해진 것 같아. 여전히 하얀 저 얼굴과 족제비 같은 눈.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상현은 홀로 외로운 싸움을 고집했다. 그렇게 힐끗거리고 있는데 앉아서 술잔을 받아먹고 있던 한수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다가오기 시작했다. 상현은 시선을 주위로 돌려 외면했지만 더 가까이 다가오는 한수를 끝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이, 이 선생님! 술 한잔해야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한수가 상현 맞은 편에 앉았다.
"그, 그래. 그럽시다."
상현은 말이 불편했다. 말을 놓기도 그렇고 존댓말을 쓰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병원도 아닌데 편하게 좀 있어라. 자, 한잔 받아. 정말 오랜만이다. 이렇게 다시 만날 줄 알았다면 학교 다닐 때 좀 더 친해 놓는 건데."
"그, 그러게."
한수는 허물없이 말하는 듯 했지만 상현은 왠지 뒷덜미가 묵직해졌다. 둘은 옛 이야기를 몇 점 꺼내어 술을 몇 잔 더 마셨다.
상현은 언제부터 흥청망청 마시기 시작했는지 기억도 나지가 않았다. 다만 눈을 떴을 때 엄습해온 것은 오늘도 늦었구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의국회의 전에 해야만 하는 일들은 뒤로하더라도 회의마저 늦을 판이었다. 부랴부랴 가운을 걸치고 의국으로 달려들어갔다. 다행이 늦지는 않았지만 직무유기를 면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네 왜 그래?"
신 교수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상현은 고개를 숙였다. 히히 웃으면서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분위기였던 적은 유사이래 한번도 없었다.
"병원 생활하기 싫어? 어제 술 마셨다고 오늘 일 안 해도 되는 거야?"
드디어 죄송하다고 말할 기회가 왔다. 그런데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마지막 경고야. 한번 더 일 펑크내면 각오해."
"예. 알겠습니다."
상현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런데 교수들과 나란히 앉아서 미소를 띠고 있는 한수가 보였다. 어제 분명히 한수가 2차를 가자고 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 어디로 갔는지 언제까지 마셨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왠지 모를 패배감이 가슴 한 쪽을 쓸고 지나갔다. 입이 말라왔다. 급히 나오느라 신경도 쓰지 못한 터라 수분이 부족했다. 호흡에 묻은 술 냄새가 어제의 흔적으로 남아 상현을 더 괴롭게 했다. 이젠 술 먹고 실수한 것에 대한 괴로움쯤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이상하게 잠도 오지 않을 만큼 화가 났다.
의국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벌겋게 충혈된 눈을 간직했던 상현은 끝나자마자 밖으로 나와 복도 끝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병원 밖의 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숨쉬고 싶었다. 병원의 퀘퀘한 세균투성이의 공기가 아닌 신선하고 활기가 실려있는 공기가 필요했다. 땅 끝을 지키고 있는 산들과 어렴풋이 보이는 호숫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다른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영준이었다.
"뭐해?"
짧은 한마디를 던지며 조심스럽게 접촉을 시도하는 영준의 마음을 상현은 알고 있었다. 위로.
"어제 많이 취한 거 같더니. 또 늦었군."
"기억이 나지를 않네. 어떻게 된 거지?"
"2차 간 거는 기억 나냐? 거기서 한 시간 정도 김한수 선생하고 마시다가 김선생은 전화가 와서 먼저 갔고, 넌 남았는데 그때부터 갑자기 취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 둘이 꽤 많이 마셨었거든. 기억 안나?"
"전혀. 그런데 한수는 중간에 왜 갔어?"
"모르지. 전화 받더니 일이 있다고 먼저 갔는데 어떻게 알겠냐?"
"한수가 먼저 2차 가자고 한 걸로 아는데?"
"그건 기억이 나는 모양이군. 그런데 술값도 안 내고 그냥 갔더라.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깜박한 모양이야."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상현이 심각한 표정을 하며 말했다.
"네 예감은 항상, 맞은 적이 없지. 안 그래?"
영준이 웃으며 말했다.
점심시간이 되었기에 상현은 영준을 찾아 식당으로 향했다. 식판에 밥을 타고 자리 경쟁이 치열한 틈을 타 앉았는데 마침 2시 방향으로 한수의 모습이 보였다. 한수도 상현을 보았지만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았을 뿐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앞에 앉은 교수와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바빠 보였다. 그는 하얗고 맑은 미소를 지으며 성대를 저음으로 길게 떨면서 웃었다. 상현이 언뜻 듣기에는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닌 것 같았는데 그렇게 웃음으로써 윗사람에게 겸손하게 보이고 윗사람의 말에 절대적인 관심과 호응을 표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친놈."
상현은 괜히 욕을 했다.
"왜 그래 또?"
영준이 말하며 상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한수를 찾아냈다.
"너,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밥이나 먹자."
곧 싸우기라고 할 것처럼 전의를 불태우는 상현을 영준이 다독거렸다.
"아까도 말했잖아.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 아무래도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
"후후, 아무튼 너도 웃기는 구석이 있다니까."
눈이 많이 내리는 밤이었다. 저녁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젠 제법 쌓여 길을 막아가고 있다. 고속도로 여기저기가 단절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버스가 못 다니게 되었다는 둥, 계속해서 눈 소식이 전해졌다.
상현이 숙소에 들어섰을 때 영준은 무언가에 열중이었다. 그 시간에 일에 열심일 사람이 아닌데 상현은 의아해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지 말았어야 했을까. 한수가 개인적으로 시킨 일이라는 것을 알고 상현은 광분했다.
"됐어. 왜 네가 더 야단이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위에서 내려오는 일이 하루 이틀이냐?"
영준이 태연하게 말하자 상현은 더욱 울화가 치미는 듯 으르렁거렸다.
"아냐, 분명히 뭔가 있어. 아마도 형이 나랑 친하기 때문에 타깃이 된 거야. 그렇지 않고선 이따위 일을 형한테 시킬 이유가 없지!"
하지만 화를 내 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영준은 웃으며 연신 그만두라고 말했다. 화를 삭히려는 듯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상현은 눈이 잘도 온다며 딴 소리를 하다가 붕어빵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왜, 물고기를 아주 씹어버리게?"
영준의 말에 상현은 웃고 말았다.
눈발을 얼굴에 맞으며 둘만의 포장마차로 갔을 때 주인은 막 정리를 하려던 참인 것 같았다.
"아이구, 오셨어요?"
주인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 지나칠 만큼의 인사를 해왔다.
"네. 들어가시려고요?"
영준이 묻자 주인은 아니라며 재빨리 붕어빵을 굽기 시작했다. 붕어빵이 익는 동안 상현은 어묵 국물을 종이컵에 따라 놓고 몇 개 남지 않은 어묵을 집어들었다.
"국물이 좀, 식었을 텐데요."
주인이 희미하게 밝히고 있는 촛불 사이로 미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저흰 식은 것도 잘 먹어요."
영준이 웃으면서 말하자 주인도 안심한 듯 다시 붕어빵이 들어 있는 빵 틀을 뒤집었다. 급한 나머지 약간 덜 익은 듯한 붕어빵 두개를 우선 철망 위에 올려놓았지만 상현도 영준도 아무 말 없이 붕어빵을 집어들었다.
"물고기 많이 먹어."
영준이 방금 전의 유머를 재연했다. 두 사람만이 아는 유머였지만 확실히 재미가 있었다. 몇 개를 더 먹고 틀에 들어있는 나머지 붕어들을 봉지에 싸서 병원으로 향했다.
"처음 건 약간 덜 익었지?"
영준이 상현에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회라고 생각하고 먹으면 되잖아요."
"그런가? 하하하. 웃긴다."
"앞으로 저 포장마차를 어부네 라고 불러요. 주인은 어부고."
"왜?"
"붕어를 잡아서 팔잖아요. 물고기로 만든 어묵도 팔고."
"그렇군. 이거 갖다가 김 선생 좀 드려."
영준이 붕어빵이 담긴 종이봉투를 보이며 말했다.
"안 먹을 걸요. 같은 물고기끼리."
두 사람은 서로의 유치한 말장난에 웃으며 병원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은 한수를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가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하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대신 그런 물밑 소문은 간호사들과 레지던트들에게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독사야, 독사."
"전혀 순둥이가 아냐. 조심해라."
"그렇게 안 생겼던데. 아무튼 사람은 알다가도 모를 존재라니까."
여기저기에서 평판이 스며 나왔지만 공식적으로 그에게 낙인을 찍을 방법은 없었다. 그는 외줄 타기를 하는 사람처럼 앞을 보고 있었고 뒤를 돌아볼 줄 몰랐으나 그 줄타기를 아주 잘하기 때문에 절대로 떨어지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계급사회인 병원에서 그보다 말발이 서지 않는 사람으로써 면상에 대고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또한 한수도 자신의 일에 실수한다거나 하는 어수룩한 자가 아니었다.
"거봐. 내가 전에 예견했었잖아. 뭔가 이상하다고 했지."
상현이 단골이 된 어부네 포장마차에서 한 손에 붕어빵을 들고 영준에게 말했다.
"그러게 말야. 나도 설마 했는데 정말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네. 당연히 알 수가 없지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까. 그래도 몇 개월 넘게 같이 일하다보니까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거 아냐."
"그야 그렇지. 아, 왜 하필 하고많은 병원 중에서 우리 병원으로 와 가지고 사람 힘들게 만드는 거야."
상현이 뜨거운 어묵을 문 체 입으로 하얀 김을 뿜으며 말했다.
"네 이론대로라면."
"이론대로라면?"
"당연히 너에게 복수를 하러 온 거겠지. 안 그래?"
영준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웃자고 던진 농담일 뿐인데 상현의 반응은 그렇지가 않았다.
"...맞아. 그럴지도 몰라. 지금의 상태로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녀석인 것 같애."
"농담이야. 정신차려."
영준이 뒤늦게 주워담으려 했지만 이미 상현은 굳게 믿어버린 듯 했다. 지갑을 꺼내 어부에게 이천 원을 건네자 거스름돈을 주었지만 상현은 생각에 몰두하는 듯 받지 않았다.
"아이구, 받아 가셔야는데."
어부가 빵 틀 뒤에서 나와 몇 걸음 따라나서며 말했지만 영준이 괜찮다며 손을 흔들었다.
12월 31일. 하루만 더 지나면 새해가 되는 아침이었다. 날짜의 흐름 속에 특별히 기념일을 지킨다거나 자유롭게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마음만은 홀가분한 날이었다. 내년이 되면 2년차로 올라가고 밑에 1년차도 들어오고, 그러면 일도 좀 줄어들고 오프도 늘어날 테고. 상현은 모처럼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아침 일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런 자존심 상하고 기분 잡치는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회진을 도는 중이었다. 교수와 한수, 상현과 인턴 뒤로 실습 나온 학생들까지 줄을 잇고 있어서 실로 대대적인 행렬이었다. 중환자실에 들어섰고 간염 말기인 환자 앞에 군집했다.
"복수가 많이 찬 것 같구먼."
노교수가 배를 만져보며 말했다.
"아, 네. 교수님."
한수가 우아한 목소리로 나섰다. 하지만 상현의 귀에는 가증스럽게만 들렸다. 정말로 귀를 거스른다는 말처럼 한수의 목소리가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일정한 목소리가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소리였는데, 지금처럼 위에다 대고 말할 때는 한없이 부드럽고 순종적인 것으로 변했고 밑에다 지껄일 때는 막무가내, 얼음, 암흑 그 자체였다. 바로 그 점이 상현이 실망한 것이었다. 이기적인 것을 벗어나 이중적으로 발전한 간신배의 목소리에 아침부터 귀를 잘라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건강에 해롭다. 건강에 해롭다 하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하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물리적으로는 아무 일이 없어서 중환자실은 평온해 보였지만 상현의 정신 세계에서는 커다란 스트레스를 해결하느라 신체 전해질 균형이 깨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스트레스 호르몬을 과다하게 분비하느라 세포들은 허덕이고있었다.
"천자를 좀 해볼까."
"예. 선생님, 저희가 하겠습니다. 이상현 선생, 복수천자 좀 해요."
어느새 나선다 했더니 갑작스럽게 상현에게 천자를 떠넘기자 상현은 좀 얼떨떨했다가 다시 화가 났다. 한다고 했으면 자기가 하지 왜 떠 넘기냐는 것이다. 상현은 대답도 안하고 주사기와 소독 솜을 준비해 환자의 옆으로 가서 섰다. 많이 해본 수기였기 때문에 부담 없이 환자의 하복부에 조심스럽게 바늘을 밀어 넣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나와야 할 복수는 나오지 않고 주위의 시선만 뜨겁게 달아올랐다.
두 번, 서번, 여전히 복수는 나오지 않고 상현의 이마에서 땀만 나왔다.
"이상하다. 많이 찼을 텐데 왜 안 나오지."
읊조리듯 쉽사리 말하는 노교수. 그때 다시 한수의 복수가 이어졌다.
"비켜봐요. 내가 할 테니까 이거나 누르고 있어요."
동작도 빠르게 새 주사기를 꺼내온 한수가 상현을 밀쳐내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현은 일순간에 자존심을 엉망으로 구기며 한편으로 물러섰다. 혈압이 폭등해서 뒷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것 같았다. 학생들까지 지켜보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정말로 대망신이었다.
'나오지 마라. 나오지 마라. 안 나온다. 절대로, 제발...'
상현은 가슴속으로 처절하게 기도했다. 한수가 실패해야만 본전이라도 찾을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기라도 치는 것처럼 한수가 밀어 넣은 주사기에 검은 흙색의 복수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뭐가 이러냐.'
상현은 분노했다. 학생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았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런 건 둘째 치고라도 상황을 그렇게까지 이끌 필요가 있냐는 생각에 한수를 죽이고만 싶었다. 그런 상현에게 한수는 마지막까지 최소한의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이 선생이 아직 감이 잘 안 서나 봅니다."
방금 전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예의바르고 겸손의 탈을 쓴 목소리로 노교수에게 고하는 한수. 상현은 차라리 한 줌 먼지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지고 싶었다.
차마 사라질 수 없었기에 간신히 회진을 마치고 의국으로 돌아온 상현은 만신창이가 된 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눈을 감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다행이 같은 연차로 근무하고 있는 승환이었다.
"형, 뭐해요?"
"어. 잠깐 쉬고 있었어. 아침부터 피곤해서."
"그래요? 나도 쉬러 왔는데. 차 한잔 드릴까요? 뭐 드시겠어요?"
"아무거나 주라."
상현은 아직도 머리가 무거운 듯 머리를 뒤로 젖히고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저, 김한수 선생님하고 동창이라면서요?"
지워버리고 싶은 그 이름을 다시 꺼내자 상현은 뜨려던 눈을 다시 감아 빛을 거부한 채 대답했다.
"어, 왜?"
"어떤 분이세요? 제가 볼 때는 평판이 별로 좋지는 않던데."
상현은 갑자기 후배가 사랑스러워졌다. 그런 눈이 번쩍 뜨이는 소리를 해주다니. 평소 승환이 기분을 잘 맞춰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재인식되었다.
"좀, 그래. 말하기도 뭐하고. 왜, 무슨 일 있었냐?"
"전에 김한수 선생님이 있던 병원에 아는 친구가 있어서 물어봤거든요."
승환이 상현 앞에 녹차 티백이 담긴 컵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쪽에서도 말리그(malignant)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겪어보면 진짜 괴팍하다고 그러던데요."
상현이 한수를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승환은 시원스럽게 한수의 험담을 했다. 상현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만족스러웠다.
"그래? 나도 고등학교 때 보고 10년만에 보는 거라서 잘은 몰라. 근데 나하고도 맞지는 않는 거 같더라."
상현은 조심스럽게 승환이 말에 지지를 보냈다.
"아, 그렇구나. 제가 보니까 아부를 너무 잘 하시는 거 같아요. 몸에 밴 것 같던데요. 허허허."
승환이 특유의 너털웃음을 펼쳐놓았다. 상현은 녹차가 맛있어졌다.
"너한테도 일 많이 시키지?"
"네. 미치겠어요. 꼭 자기 개인적인 일을 밑에 사람한테 다 시키려고 한다니까요. 형 동창이라서 뭐라고 욕은 못 하겠지만 아무튼 좀 심해요. 어! 형, 저 먼저 가볼게요. 10시에 뭐 해달라고 했는데 시간이 벌써 다 됐네."
"어, 그래. 수고해."
승환이 다 마신 종이컵을 휴지통에 버리며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들어왔다가 간 뒤로 상현은 무거웠던 머리가 맑아졌고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자식, 명의가 될 가능성이 있어.'
밤 10시가 되어서야 숙소에 잠시 앉을 기회를 맞이한 상현은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영준은 피곤했는지 상현이 들어왔을 때부터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잠시 후 TV옆에 놓아둔 상현의 핸드폰이 경쾌하게 울렸다.
"왜 또 찾으시나? 여보세요."
상현은 또 병동에서 찾으려니 생각하고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전화를 건 사람은 한수였다.
"어, 나야. 바빠?"
"아, 아냐. 말해. 무슨 일로?"
상현은 대수롭지 않게 답을 했지만 예감은 좋지가 못했다.
"다른 게 아니고, 내일 아침 의국회의 하기 전에, 한 7시쯤? 내방으로 와줄래. 좀 부탁할 게 있어서."
"음? 그래? 무슨 일인데?"
상현의 목소리가 살짝 꼬여버렸다. 하지만 한수는 계속 여유 있고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내일 아침에 알려줄 테니까, 잊지 말고 와라."
"그래. 알았어."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그럴까봐 얼른 전화를 끊었다. 그제야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에이, 씨발. 자식이 왜 오라 가라야! 진짜 너무 하네."
한수의 욕지거리 때문인지 아니면 미리부터 깨어있던 건지 영준이 침대에서 일어나 담배를 물었다.
"왜 또 그래? 무슨 일이야?"
상현이 고개를 돌려 영준을 보았으나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금방 말을 잇지 못했다.
"한수 새끼가 내일 아침에 자기 방으로 오래. 시킬 일이 있다고."
상현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영준이 혀를 차다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쯧쯧, 어쩌냐. 네가 참어 열내면 너만 더 손해지. 그래도 스텝인데 어떡하겠냐."
"지가 아무리 스텝이라도 갓 전문의 딴 주제밖에 더 되냐고. 그리고 나하고 동창이면서 그럴 수가 있는 거야! 진짜 인간이 밉다 미워."
"침착해라. 흥분하면 싸움에서 지는 거야. 네가 열내고 화내고 흥분하는 게 김 선생이 노리고 있는 거 아니겠어."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는 진정 쉽지가 않았다. 상현은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아, 배고프다. 그러지 말고 국물이나 좀 먹으러 가자. 소주 한 병만 사 가지고 가서 어묵이랑 먹으면 딱 이겠다. 그만 화 풀어. 화내봤자 너만 더 손해라니까."
어부네 포장마차에 선 영준은 주인에게 소주병을 흔들어 보이며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주인은 환하게 웃으면서 먹으라고 손짓을 했다. 영준이 주인장도 한잔하라고 종이컵을 내밀었지만 주인은 쉽게 받지 않다가 억지로 손에 쥐어주자 할 수 없이 입만 살짝 대고 리어카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도대체 이번에는 무슨 일을 시킬지 정말 고민된다."
상현이 술을 홀짝거리며.
"그러게. 둘의 관계가 정말 웃긴다. 10년만에 복수를 위해 나타난 친구. 그 친구에게 철저히 짓밟히는 친구. 하하."
소주는 벌써 삼분의 이 가량이 비워졌고 영준은 약간은 기분이 좋아진 듯 싱글벙글 이었다.
"복수는 무슨 복수야. 내가 그럴만한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어디까지나 그 놈 성격이 뒤틀린 게 문제야. 이젠 다른 사람들도 다 알던데 뭐."
"모르는 사람들도 있어."
"그래, 걔보다 위에 있는 교수들은 당연히 모르지. 그들에게는 항상 상냥하니까. 그래도 정말 사람 볼 줄 아는 교수는 알 거야. 알면서도 뭐라고 할 수 없는 거겠지."
"그렇겠지."
"아휴-. 진짜 걔 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붕어빵과 어묵과 물고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별안간 제 3의 인물이 돌발적으로 대화에 개입했다.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인데 어부가 두 사람의 개인적인 일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그때까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그는 아주 공손한 얼굴을 약간 앞으로 들이밀면서 말했는데 그러자 입술 위의 수술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예? 아, 아뇨. 그냥 누구 흉 좀 보느라고요."
영준이 대답을 금방 잘 해냈다.
"예. 아주 끔찍한 놈이 있어요."
영준이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상현이 술기운이 올랐는지 상관도 없는 주인에게 마음속에 담은 소리를 털어놓았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을 만큼 저를 미치게 만들고 있죠."
"정말 심각한 모양이네요."
이번에는 주인이 대구를 하며 상현의 말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건 상담을 해주는 것처럼 진지하고 포용적인 목소리였는데 어수룩해 보이던 주인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두 사람 다 알지 못했었다.
"어쩌면 좋죠?"
상현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니 넋두리라도 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러자 몇 초 정도 지난 후에 주인은 붕어빵 하나를 집어들어 상현에게 내밀었다. 어리둥절하기는 상현뿐 아니라 영준도 마찬가지였다.
"이거나 먹으라고요?"
상현이 말하자 주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뇨. 이걸 그 사람 방문에 붙여 놓으세요."
그뿐이었다. 주인이 다른 말도 없이 계속해서 붕어빵을 들고 있는 터라 자연스럽게 붕어빵을 넘겨받은 상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걔 별명이 물고기라는 걸 아저씨가 어떻게 아셨지. 방문에 붙이면 그야말로 문패가 되겠는걸."
옆에 있던 영준도 웃음을 터뜨렸고 주인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주인 아저씨 참 재미있으시네."
상현이 남아 있던 술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그리곤 넘겨받은 붕어빵을 성의껏 손에 들고 병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걸으면서도 계속 웃고 있는 상현에게 영준은 그러다가 정말로 실행에 옮기겠다고 말했다.
"못할 것도 없지."
상현은 갑자기 오기가 생겨났다.
"그럼 당장에 네가 한 걸 알 텐데도."
"그래봤자 지가 어떻게 하겠어. 어차피 이제는 막 가는 거야."
병원에 들어서 교수 연구동 쪽으로 향하는 상현을 영준이 몇 번 말렸지만 상현은 끝내 유치한 장난을 치기 위해 영준을 숙소로 혼자 보내고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이걸 뭘로 붙이나.'
자정이 가까운 병원은 불이 꺼져 더욱 을씨년스러웠고 간혹 복도 의자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보호자들이 지나가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들고 있었다.
간호 스테이션에서 압정을 발견한 상현은 그것이 딱 맞겠다고 생각했다. 반창고나 다른 접착제는 어울리지가 않는다. 차라리 못이나 송곳, 이런 것들이 어울릴 것이다. 그래 압정 두 개를 조심스레 손에 들고 한수의 방으로 향했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방이 몇 개 있어서 조심스럽게 한수의 방까지 다가갔다. 그런데 한수의 방에도 아직 불이 켜져 있어서 상현은 더욱 숨을 죽여야 했다.
'뭐야, 아직 안 간 거야, 불을 켜놓고 간 거야? 아무튼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니까.'
잠시 망설이던 상현은 주머니에 고이 간직했던 붕어빵을 꺼내 문에 대고 정 중앙에 압정을 갖다 댔다. 그러나 워낙 소리나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상태여서 쉽게 압정이 박히지 않았다. 오른 손 엄지손가락 하나에 온몸의 힘을 집중해서 압정 머리를 누르자 붕어빵을 꿰고 있던 심이 나무에 스르륵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쾌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안에서 바스락거리며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자 상현은 첩보원과 같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복도를 미끄러지듯이 달려 모퉁이를 돌아 몸을 숨겼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자 상현은 어둠 속에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한수의 모습이 분명했다. 한수는 복도 양쪽을 한번씩 쳐다보더니 다시 방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갔는데 다행이 자신의 문패를 보지는 못한 것 같았다. 상현은 한숨을 내쉬며 오줌이 찔끔 나올 것 같은 스릴을 풀어버렸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상현은 쉽게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눈을 거의 감은 채 화장실을 거쳐 샤워장으로 걸어갔다. 몇 분 동안 더운물을 뒤집어쓰고서야 잠이 깬 상현은 가운을 걸치고 병동으로 향했다.
한시간 가량 환자를 살핀 상현은 한수의 호출을 잊지 않고 연구동으로 향했다. 어제 벌인 유치한 장난을 생각하니 쑥스러웠다. 한수가 또 뭐라고 캐묻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런 생각은 한수의 방 앞에 도착했을 때 최고조가 되었는데 붙여 놓았던 붕어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수가 붕어빵을 자신에게 집어던지는 상상을 하며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뭐야, 오라고 해놓고 어디 간 거야."
다시 한번 노크를 하고 아무런 대답도 없자 상현은 문고리를 돌려보았다. 스르르 돌아가는 문고리, 그리고 아무런 저항 없이 열리는 한수의 방문. 그 안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책상과 간이 침대, 컴퓨터, 작은 냉장고, 책들과 서류들 더하기 잡동사니가 어지럽지만 정교하게 배치된 그 방에 한수만 없었다. 대신 상현이 방에 딸린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물고기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건 또 뭐냐?"
이른 아침에 생선은 더 비린 냄새가 났다.
"설마 이걸 어떻게 하라고 불렀던 건 아니겠지.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상현은 그냥 방을 나가버리려고 했지만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는 물고기가 눈 끝을 붙잡고 늘어졌다. 상현이 다시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세면대에 물을 받았다.
"이런 걸 왜 바닥에 놓은 거야."
물이 받아지자 상현은 바닥에 있던 물고기를 두 손으로 집어 올려 세면대 안에 넣었다. 그러자 금방 생기를 찾은 듯 활기차게 움직이는 물고기를 뒤로하고 상현은 한수의 방을 나왔다.
의국회의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한수가 나타나지 않자 상현을 비롯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연락을 해보았지만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한수 없이 진행된 의국회의가 끝나자 신교수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신 교수는 상현을 지목했다. 신 교수는 상현이 동창이니 한번 찾아보라고 무슨 일인지 알아 보라 했다. 대답을 했지만 상현은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속으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고생시키는 한수를 원망했다.
오전 내내 틈틈이 전화를 해보았지만 한수는 받지 않았다. 신호가 가는 걸 보면 핸드폰을 꺼놓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상현은 무슨 일인지 조금은 궁금해지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상상을 떠올렸다. 그 중에는 지난밤에 했던 '유치한 장난'도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한수가 사라졌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붕어빵을 건네며 알 수 없는 얼굴이었던 어부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점심식사를 하기 전에 상현은 한수의 방에 다시 들렀다. 여전히 방문을 잠겨있지 않았고 아침에 본 그대로 한수의 흔적은 없는 상태였다. 이상한 것은 화장실에 있어야 할 중간 크기의 물고기가 없어진 것이었다. 한수가 가져간 것일까. 상현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수의 책상 위를 차지하고 있는 서류들을 뒤적거리다가 방을 나왔다.
한수가 사라진 것은 당시에 큰 이슈로 떠올랐다. 경찰까지 나와서 조사를 하고 갔을 정도니 소문이 빠른 병원 안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의 대화에 오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런 흔적이나 단서도 없이 하룻밤사이에 행적을 감춘 사건은 온갖 추측과 추리와 견해가 난무하게 만들었고, 현상금을 걸었다는 둥 아니라는 둥 없는 얘기까지 추가되어 한편의 책으로 만들어도 될 만큼 한수의 일대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나 단기간에 그치고 말았다. 아무리 큰 사건이 일어났다 해도 약간의 시간만 주워진다면 누구나 무심해지고 쉽게 잊어버렸다. 몇 달이 지나자 한수가 사라진 사건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상현을 비롯한 병원 사람들은 각자의 일로 바쁘게 살아갈 뿐이었다. 상현은 가끔 궁금증이 돋아나긴 했지만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한수가 없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하고 더 이상 친구의 행로에 관심을 갖지 않기로 했다.
어느덧 잊혀진 이름이여.
계절은 바뀌고 사람은 시간을 먹으며 모든 것은 변해갔다. 아픈 사람은 계속해서 생겨났고 상현을 비롯한 의사들은 그들을 치료하거나 혹은 사망선고를 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면 또 다른 환자들이 찾아오고, 그것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무한궤도처럼 혹은 윤회의 수레바퀴처럼, 사람은 그 한순간을 채우고 있는 보잘것없이 가벼운 존재처럼, 실제로 변한 것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너였다면 언젠가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또 다른 내가 되는 것이다.
구름이 끼고 서늘한 바람이 상공에서 치고 내려오는 게 눈이 올 것 같은 날. 상현은 주말 오프를 나가기 위해 서둘러 병동 일을 끝마치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병동에 들러 자신이 내린 처방들이 잘 이행되었는지 만 확인하면 1박 2일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운을 벗고 외출복까지 챙겨 입고 병동에 도착했을 때 자신이 내린 지시사항이 반도 채 이행되지 않은 것을 보고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병섭이 어디 갔어요?"
상현이 병동 간호사에게 물었다. 너무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그러자 뒤틀린 분위기를 감지한 간호사는 금방 호출해드리겠다며 전화기를 들었고 전화를 끊은 지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병섭이 걸어왔다. 병섭도 병동에 흐르는 이상기류를 감지하고 숙연한 표정이 되었다.
"야, 너 뭐하냐?"
상현이 다짜고짜 물었다.
"예?"
병섭은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긁적이며 상현에게 다가갔다.
"너, 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상현의 목소리가 높고 거칠어졌다. 병섭은 고개만 숙일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일이 좀 밀려놔서..."
"서둘러서 빠릿빠릿하게 하면 왜 밀려, 좀 뛰어 다녀라 1년차가 어딜 그렇게 처박혀 있는 거야!"
상현은 좀 심하다 싶었지만 평소부터 병섭을 좋아하지 못했다. 병섭이 워낙 말이 없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병섭의 스타일이고 성격 탓이겠지만 다른 사람과 융화되어서 일하기엔 조금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죄송합니다."
병섭이 또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지만 상현은 그런 소리마저 듣기가 싫었다.
"너 같은 놈이 조용하다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거야. 수동적으로 살지 말고 좀 적극적으로 해라. 빨리 일 끝마치고 다 되는 대로 전화해."
상현은 그렇게 말하고 미련 없이 일어났다. 병동을 나가는 상현에게 병섭은 꾸벅 인사를 했지만 상현이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히죽 웃었다.
상현이 다른 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동기 관우를 만나 저녁을 먹은 후에 조용한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서야 병섭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렇지 않아도 저녁을 먹을 때 아직까지도 전화가 오지 않는다고 관우에게 병섭의 흠을 잡았었다.
"너 지금 몇 시냐?"
상현의 말꼬리가 미끄럽게 꼬부라졌다. 전화기 밖으로 병섭의 당황하는 목소리를 들은 관우가 붉어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일을 다 마쳤다는 말을 듣고 상현은 앞으로 지켜볼 테니 똑바로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이 자식 진짜 어리버리하다니까."
상현이 잔을 들어 관우에게 권하며 말했다.
자정이 넘어서 술집을 나온 상현은 관우를 먼저 보내고 택시를 잡았다. 허나 갈 곳이라곤 병원 숙소밖에 없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더 만날 사람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숙소로 돌아가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반쯤 갔을 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여러 겹으로 붙어 있는 함박눈이 공간을 가득 채울 기세로 하염없이 쏟아졌다. 병원 정문에서 택시에서 내린 다음 숙소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눈은 벌써 쌓이기 시작해 밟을 때마다 뿌지직하고 소리를 낼 정도였다.
불이 꺼진 복도를 걸어 방문 앞에 도달했을 때 술이 많이 취했지만 상현은 분명히 방문 앞에 매달려 있는 붕어빵을 목격했다.
"뭐야, 씨발."
상현은 가차없이 그것을 떼어내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외투를 벗은 다음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어떤 놈이 장난치는......"
입 속을 맴도는 중얼거림을 다 뱉어내지 못하고 잠에 빠졌다.
그날 아침은 다른 날과 달리 눈을 떴을 때 남아있는 술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뜬 상현은 잠시동안 천장을 응시하며 그대로 누워있었다. 다시 잠이 들지도 않았고 몸은 이불 속에 담긴 채 온전히 각성된 상태였다. 일요일인데 무엇을 할까. 아무 것도 없었다. 일어나야 하나.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누워있어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이불을 걷어내고 슬리퍼를 신고 욕실로 들어가 아침 첫 소변을 보았다. 바지를 올리고 세면대 앞에 선 상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마주쳤을 때 거울이 더러워진 건지 자기 얼굴이 지저분한 건지 금방 깨닫지 못했다. 눈을 부릅뜨고 얼굴을 거울 가까이 가져갔다. 거기 거울 안에는 부스럼이 지배하는 것 같은 각질투성이의 얼굴이 들어있었다. 그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서 조금 있으면 피부가 갈라지고 피가 나올 것만 같았다. 얼굴을 양쪽으로 돌려보다가 심히 불쾌함을 느낀 상현은 손으로 양쪽 볼을 만져보았다.
그때 그 껄끄러움과 동시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손을 본 상현은 놀라움의 헉하는 소리가 가슴속에서부터 흘러나와 주체하지 못하고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거울에 비친 손은 손가락 사이가 붙어 있는 괴이한 모습이었다. 재빨리 거울을 벗어나 실제 눈으로 확인한 상현의 손은.
얼굴처럼 갈라지고 있었고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물갈퀴처럼 붙어 있었다. 아니 점점 붙어가고 있었다. 피부도 계속해서 갈라지고 있었다. 상현은 변해가고 있었다.
저는 이 민 구
주소 충남 천안시 안서동 468-6 도솔빌리지 1-102호
전화 016-601-2789
병원의 아침은 여느 때처럼 분주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두꺼운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버티고 서있는 병원 건물의 위용마저 떠오르는 태양을 눈부셔하고 있을 무렵, 상현은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아, 또 깨지겠네. 왜 만날 늦는 걸까.'
신교수의 모습이 떠올랐을까 달리고 있는 다리에 정신을 집중해도 모자랄 상현의 얼굴이 순간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가 그대로 몽롱해졌다.
"자넨 뭔데 이제 들어오는 거야!"
상현이 문을 빠끔히 열고 머리를 들이밀자 신교수의 테러와도 같은 지청구가 날아왔다. 상현은 올 것이 왔다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고 문을 더 열어 젖혔다.
"누가 들어오래? 나가있어!"
이어서 날아든 두 번째 직격탄과 온 좌객들의 뜨겁고도 민망한 시선은 두 개 네 개의 화살이 되어 온몸을 찢어놓았다. 꼼짝없이 강제 퇴장을 당한 상현은 복도의 벽에 붙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서성이기를 한 30분쯤 했을까. 웅성거리는 소리와 의자 끄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더니 곧 문이 열리고 수련의들이 파도처럼 밀려나왔다. 상현은 거북이처럼 몸을 움츠리면서 인의 장벽 속으로 숨어들었지만 그런 기억을 쉽사리 잊을 신교수가 아니었다.
"이상현!"
바늘처럼 예리한 신교수가 짙게 쳐져있는 인의 장벽을 뚫고 상현을 투시해냈다. 상현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고개를 뽑아들었다. 그러자 한달 내내 당직을 서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어명을 너무나도 쉽게 툭 꺼내놓고 신 교수는 회진을 돌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고 싶지 않았지만 그랬다가는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두 달이 세 달 네 달이 될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시장에 팔려 가는 소처럼 무거운 억지 발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곧 있으면 자신이 맡은 입원 환자들에 대한 회진도 이어진다.
"어제 술 더 마셨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영준이 속삭였다. 그는 상현의 학교 선배였지만 상현과 같은 내과 1년 차로 수련을 받고 있었고 따라서 두 사람은 모두 신출내기였다.
"됐어요. 어제 괜히 방황하다가 들어와서 늦게 자는 바람에. 아, 당직 서려면 죽어 났다."
"후후, 열심히 서."
씩. 상현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는 영준의 얼굴이 그날은 최고로 밉상이었다
내과 레지던트 1년차. 상현은 병동을 가득 메우고 누워있는 수많은 환자를 돌보느라 여념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퇴원, 새로운 환자의 입원, 퇴원, 입원. 줄을 잇는 환자의 행렬은 마치 일상의 반복과도 같이 또는 그 자체가 일상처럼 다가왔다.
대강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영준이 TV를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숙소에서는 좀 금연하시지."
아침의 일도 있고 해서 상현은 빈정거리고 싶었다.
"아, 또 왜 그래?"
영준은 능글맞게 환하게 웃으며 화답해 주었다. 웃음만으로 그를 판단한다면 실없이 보일지 모르지만 영준은 매우 성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애기 보러 안 가요?"
"당직인데 어떻게 가? 그래도 너보다야 낫지만."
영준이 다시 슬쩍 상현을 긁었다.
"어제 술 마시자고 한 게 누군데, 자기만 일찍 들어가서 자고 일찍 나오면 다요? 괜히 나만 발동 걸려서 늦게까지 마셨잖소."
"아, 미안해. 그러니까 조금씩 먹어야지. 왜 흥분하고 그래. 피곤할 텐데 일찍 쉬어라."
창 밖은 어둠이었고 병원은.
"참, 스텝 한 명이 더 온다더라."
TV를 보던 영준이 침상에 누운 상현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요?"
눈을 감은 채 무심하게 되묻는 상현.
"그런데 너랑 동갑이래. 어쩌면 좋으냐?"
"글쎄요."
상현이 선잠을 자는 것 같아 영준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또 날이 밝았다는 건 과연 축복인가. 달력의 날짜를 지우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 된지 오래이다.
회진. 회진이다. 길을 비켜라. 그렇지만 복도에는 아직 아무도 없다. 상현 혼자만 불도 켜지 않은 길을 누비며 환자를 체크하는 것이다. 이 방에는 누구누구 저 방에는 여자 환자들, 그 방에는 격리 환자들이 있다. 밤새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선생님."
3506호에 들어서자 활력지수를 재고 있던 간호사가 인사를 했다. 상현은 입 벌리기가 귀찮아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만 했다.
의국회의. 의국회의다. 높은 사람들이 하나씩 들어온다. 그때마다 예를 표시하기 위해 엉덩이를 들썩이는 낮은 의사들. 그 중에 상현도 있고 영준도 있다. 영준이 고개까지 푹 숙이며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모습을 보며 상현은 웃기는 장면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미소를 지었다.
회의 중.
회진이다. 진짜 회진이다. 높은 사람들이 나가신다. 사람들이 길을 비킨다 진짜로. 정찰대가 앞으로 길을 트고 뒤에 따르는 군사들. 대단히 위엄이 높다. 병실에 들어설 때마다 환자들, 보호자들이 구세주 대하듯 경배를 드린다. 옆에 따르는 주치의가 나불거리며 상태를 설명하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한 마디에 환자의 운명이 바뀐다.
회진이 끝나고 쉴 틈도 없이 환자들에게 새로운 처방을 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잠깐이나마 엉덩이를 붙일 낯이면 어느새 핸드폰으로 호출 전화가 왔다. 그것도 안되면 방송으로 불러들인다.
"내과 전공의 선생님."
예상했던 대로 천장의 스피커가 켜지고 방송이 흘러나오려 했다. 차분한 여자의 목소리지만 거부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또 누굴 찾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과 전공의 선생님은 의국으로 오십시오."
누굴 찾는 게 아니고 모두 모이라는 소리였다. 상현은 적고 있던 차트를 마무리하고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의국에 들어섰을 때는 윗년차 선생들과 동기들이 제법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인지 몰라 앉아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데 신교수가 들어왔고 그 뒤를 이어서 낯선 사람이 따라 들어왔다. 가운을 입은 걸 보니 의사인 것 같은데 누구지. 상현은 잠결에 들었던 영준의 말을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이쪽으로 앉지."
신 교수는 같이 들어온 이에게 자신의 옆에 앉도록 하고 이내 소개하기 시작했다.
"자, 이쪽은 이번에 전문의 자격 시험을 통과하고 우리 병원 스텝으로 오시게 된. 역시 예상했던 대로 온다던 그 사람이구나. 그런데.
"김 한수 선생님이십니다."
김 한수. 상현은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그래, 녀석도 의대에 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한수가 일어나 인사말을 하는 동안 상현은 과거의 회상에 잠겨버렸다.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는 소리에 차안으로 돌아온 상현은 사람들을 따라 의국 문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다른 전공의들은 순식간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지만 상현은 잠시 자리에 서서 신 교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제발 그러지 말기를 바랬지만 한수가 상현을 불렀다.
"이 상현 선생!"
정말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된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잊혀지지 않고 뇌리에 저장되어 있었다. 고개를 푹 숙였던 상현은 묵묵히 돌아섰다.
"나 몰라? 김 한수. 오랜만이다."
"어, 네."
상현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계급사회나 마찬가지인 의사들의 세상에서 그는 분명히 높은 의사였고 자신은 낮은 의사였다. 그때 한수가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왜 그래? 동창끼리. 정말 오랜만이다. 고등학교 때 보고 처음인가?"
"어, 어. 그런가. 오랜만이다."
"네가 여기 있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어. 미리 연락을 해볼까도 했는데 놀래켜주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냥 왔지. 앞으로 잘 해보자."
'오,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나.'
상현은 어색함을 해결할 방도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어떻게 벌써 스텝으로?"
그래서 약간은 본심이 드러나 버렸을까.
"내가 온 게 별로인가보군."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농담이야. 농담."
'오, 이 유린당하는 기분.'
"넌 학교 다니다가 군대 갔다 왔지."
"어. 알고 있었군."
"다른 애들 만날 때 네 얘기도 들었지. 사실 난 면제받았어. 운동하다가 십자인대
가 나가서."
'오, 네가 운동도 한다고? 게다가 인대가 끊어질 정도로.'
"잘 됐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말을 상현은 잘도 해냈다. 해냈다.
"그래, 그럼 가서 일 봐. 회식 때 보자."
한수는 여유 있는 모습으로 멋지게 먼저 돌아섰다.
"어. 그, 래."
상현이 억지스런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아, 추워."
밤 10시. 언제나처럼 업무를 마치고 숙소의 문을 연 상현은 넋두리처럼 날씨 탓을 했다. 영준이 창문을 열어놓은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창문 열어 놓고 피라며."
"내가 언제 그랬소. 금연하라고 했지."
"그랬나. 사정 잘 알면서 왜 그래. 담배 피울 데도 없단 말야."
영준도 상현이 그냥 해본 소리라는 것쯤은 알면서도 대화를 원했을 뿐이다.
"끊어요, 끊어. 집에 가서도 애 때문에 못 피우면서."
"그래야지... 참 새로 온 스텝 선생하고 아는 사이야?"
"예?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 아까 의국 앞에서 뭐 좀 물어보려고 했는데 둘이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냥 갔지."
"제 학교 동창이에요."
"그래? 허, 재미있게 됐네. 고등학교?"
"네. 그런데 2학년 때 전학 가서 못 봤죠. 그때 이후로 처음 봤어요."
"세상이 좁긴 좁군. 헤어졌던 친구를 다시 만나고."
'친구?'
상현은 친구라는 단어가 조금은 뉘앙스가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친했어? 둘이."
"글세, 별로 안 친했어요. 공부만 했던 애라서. 성격도 별로고."
"그래? 학교 다닐 때 어땠는지 얘기 좀 해봐."
호사가 기질도 가지고 있는 영준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덤벼들었다. 상현은 아차 싶었지
만 이제 와서 말을 돌리기는 늦은 듯 싶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냐고? 사람은 언제나 변하고 있는 중이니까 그런 걸 따질 필요는 없을 텐데. 그래도 굳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왜 일까. 그이의 삶을 체험해 보고 싶기라도 한 건가. 하긴 한 사람 붙잡고 그 인격을 요모조모 뜯어보는 재미가 훌륭하기는 하지만서도.
한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단지 고등학교 1년 남짓한 단기간의 기억뿐이지만, 한 단어가 생각나기 마련이다. 그건 다름 아닌 상현이 그에게 붙여주었던 별명. 친구에게 좋은 별명 붙여줄리 없겠지만 그의 별명은 고약한 것 중에서도 아주 최악이었다. 그렇게 불리는 것을 전혀 원하지도 않았고 그런 별명을 붙인 상현을 원망하는 것이 매우 합당한 일로 보일 만큼 그랬다.
한수의 별명은 바로 '물고기'였다. 그의 눈이 붕어처럼 툭 튀어나온 것일까. 아니다. 그럼 그가 매일 생선 반찬만 싸온다거나 그의 어머니가 어물전에서 장사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상현의 고등학생다운 유치한 발상이 만들어낸 기발하다면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I, My, Me. You, Your, You. He, His, Him...
Myself, Yourself, Himself...
self, selfish, sel fish, fish...
그렇게 그는 sel-fish라는 물고기가 된 것이다. 이기적인 물고기라는 뜻의. 지금이야 모두 이기적이고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도 웃어넘길 일이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이기적이라는 말이 지금보다는 훨씬 큰 욕처럼 들리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기억하기도 쉽게 기발한 발상의 별명을 만들어 유포시키고 가끔씩 웃음거리가 되게 하였으며 그의 이미지를 '이기적'으로 굳어지게 했으니 어찌 보면 상현이 더 큰 죄를 지은 건지도 몰랐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이제는 그의 별명을 기억하는 이가 드물디 드문 것이 사실이겠지만서도.
한수가 특별히 나쁜 짓일 일삼거나 남에게 피해를 준 것은 없었다. 폭력가, 외설가 등 그보다 나쁜 놈들은 수두룩했다. 한수에게 잘못이 있다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 그것뿐이었는지 모른다. 혼자 공부하고 점심시간에도 혼자 도시락을 먹고 혼자 집에 가고, 뭐하고 노는지는 몰라도 혼자 놀고 그랬다. 그게 어찌 나쁜 짓이겠나. 상현은 한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녀석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공부는 잘 하니 머리도 좋은 놈 같은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걸까. 같은 반 아이들하고 좀 같이 놀면 좋지 않겠니.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딱딱한 이름 대신 듣기 좋지는 않지만 웃기는 별명도 붙여주고 쉬는 시간이면 가끔씩 옆구리를 찔러가며 세상 밖으로 끌어내고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한수는 완고했고 상현이 그럴수록 자꾸만 더 자신만의 세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았다.
"흠, 그랬구나.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
고교의 추억을 듣고 난 영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변했겠죠. 낮에 보니까 성격 많이 좋아진 것 같더라고요."
"그렇겠지. 의대 졸업하고 수련까지 받았으면 대인관계도 많이 경험했을 테고, 근데 군대는
언제 가는 거야?"
"면제 받았데요. 십자 인대가 끊어졌다나. 운동도 안 하던 애였는데, 운동도 하나봐."
"그래서 벌써 스텝으로 왔구나. 잘 풀렸네. 그런데 네가 좀 껄끄럽겠다. 동창이 위에 있으니."
"할 수 없죠, 뭐. 하는 거 봐서 나도 그만큼만 해야지. 씻고 올게요."
상현은 수건을 챙겨 샤워장으로 갔다. 더운물을 틀고 몸을 적셨다. 고등학교 시절이 많이 생각나는 하루였다. 그때의 일을 한수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혹시 무슨 오해나 원한 같은 것을 간직한 건 아니겠지. 날씨가 추워져서인지 물이 따뜻하지가 않다. 물을 잠그자 이내 몸이 차가워지면서 소름이 돋았다.
"으- 춥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영준은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어디 가요?"
"출출하지 않냐? 요 앞에 나가서 붕어빵이나 먹고 오자."
"그런데 뭐 하러 옷을 다 챙겨 입었어. 잠깐 나갔다 올 거면서."
"날씨 많이 추워졌어. 잘못하면 감기 걸린다."
"하긴 샤워하는데 얼어죽을 뻔했네. 벌써 붕어빵이 나왔나? 그리고 왜 하필이면 붕어빵이야, 내 친구 생각나게."
"응? 후후, 그러고 보니 그러네. 같은 물고기네."
"와, 진짜 춥네."
옷을 대충 입고 나온 상현은 병원 밖의 날씨를 실감한 듯 외쳤다. 영준이 그것보라며 히죽 웃었다.
"저기 포장마차에서 붕어빵도 팔았나?"
상현은 병원 주위에 일년 내내 버티고 장사를 하는 포장마차 단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아냐. 조금 올라가면 새로 생긴 데 있어. 저기 보이지."
영준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지만 금새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몇 걸음 더 옮기고 나서야 허름한 포장마차가 하나 보였다. 포장마차라고 하기에도 그 이름이 걸맞지 않을 정도로 작고 초라한 모습이 멀찌감치 에서도 확인되었다.
가까이 에서 보자 더 그랬는데, 파라솔 하나에 비닐을 둘러치고 안에는 백열전구도 없이 초를 두 개 켜놓은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서자-사실 들어섰다기 보다는 옆에 섰다는 말이 어울린다.- 영준이 먼저 인사를 했다. 처음이 아닌 모양이다.
"아유, 예. 오셨떠요."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주인은 말이 어눌했다.
"먹어."
영준이 말하자 우두커니 서 있던 상현이 다 구워져서 철망 위에 진열되어 있는 붕어빵 한 개를 집어들었다. 그러자 희미한 촛불 사이로 주인의 얼굴이 보였는데 그는 언청이(구개열) 수술을 한 게 틀림없었다.
'불행한 사람이군.'
상현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묵은 얼마예요?"
상현이 묻자 주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정말 미안해하며 말했다.
"아, 저기, 100원인데요, 물이 떨어져서, 오늘은..."
"아 그래요. 다음에 먹죠."
그렇게 말하고 100원이라는 말이 의아하게 여겨져서 붕어빵은 얼마냐고 다시 물었다.
"150원요."
'그럼 남는 게 있나요?'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붕어 한 마리를 더 집어들었다.
둘이서 붕어빵 세 개씩 먹어서 여섯 개를 먹었는데 1000원을 내자 100원을 거슬러주었다. 영준은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주인은 펄쩍 뛰면서 100원을 손에 쥐어주었다. 상현이 보기에는 실로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과연 저렇게 해서 장사가 되는 건지, 장사에 뜻이 없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준에게 물었지만 영준도 대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게 말이다. 너무 착해서 돈도 모르는 것 같애."
그저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오늘 기대된다."
숙소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영준이 히죽 웃었다.
"뭐가요?"
상현은 피곤하다는 듯 건조하게 말했다. 제 삼자가 보면 너무 차갑게 보이겠지만 영준은 상현이 별 뜻 없이 종종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김한수 선생 말야. 며칠 보니까 괜찮은 사람 같던데, 오늘 회식 자리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사뭇 기대가 되는걸."
"형이 그 친구를 얼마나 안다고 그래요. 며칠 봐서 사람을 어떻게 알어."
"그러니까, 오늘 더 기대가 되지. 너 옛날 기억만 가지고 선입견을 갖고 있는 거 아니냐?"
"그럴 수도 있겠지."
상현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쉽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은 그래서 상현도 기대가 되긴 했다. 기대라기 보다는 궁금했다. 사람이 변했는지 시간만 지나갔는지. 피곤에 찌든 회식이 잡혀있는 쌀쌀한 금요일 저녁이 깊어만 갔다.
음식점 한 층을 빌린 환영식은 인원수가 많은 만큼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시작되었다. 낮은 사람들은 미리 와서 음식을 앞에 놓고 기다리고 높은 사람들은 뒤늦게 천천히 식당 안으로 입장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주인공 한수와 내과 과장이 입장하고 식순에 의해서 만찬이 진행되었다.
"그럼, 우리 과에 새로 오신 김한수 선생님의 소감 한 마디를 듣겠습니다."
사회를 보던 4년차 전공의가 한수를 소개하자 자리에 앉아 있던 한수가 미소를 머금은 채 일어섰다.
"너무 오래 기다리신 것 같아서 길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모두가 기다리던 얘기를 한수가 집어내자 좌중의 웃음꽃이 봉우리를 맺었다.
"우선 여러분과 함께 근무하게 되어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 실력이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과장님 이하 여러 선배 의사 선생님들의 지도하에 최선을 다해서 일하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는 의미에서 건배를 제의합니다."
한수가 꾸벅 인사를 하자 우레와 같지는 않아도 그와 비슷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그의 매끄러운 인사를 사랑했고 상현은 약간의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말이 없던 애가 어디서 저렇게 청산유수와 같은 말솜씨를 익혔을까. 웅변학원이라도 다녔단 말인가.'
배가 차 오르자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하기에 바빴다. 윗사람에게 얼굴을 알리고 술을 나눠 마시기 위해 잔을 들고 이리저리 방문을 했다. 그런 가운데 상현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한수를 관찰했다. 적대적인 감정 때문은 아니고 영준이 말했던 대로 그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한수는 또 예상치 못했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과장부터 시작하여 모든 스텝들에게 술잔을 돌리는 것을 보고 상현도 긴장을 풀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진짜 많이 변했네. 술도 잘 마시나봐."
상현이 옆자리에 있던 영준에게 말했다.
"네가 너무 오버한 거라니까. 괜찮은 사람 같구만. 자, 술이나 마셔."
영준은 벌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도 가서 인사나 해야겠다. 그래도 윗사람인데."
"형이 오버하는 거 아니오?"
영준이 잔을 들고 일어서자 상현이 남은 잔을 털어 넣으며 말했다.
한수에게 가는 영준을 보며 상현은 괜히 약이 올랐다. 아직 옛 친구를 믿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의 문이 열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 얼굴 속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교수들한테 술잔을 올릴 때의 표정이 영 아니잖아. 벌써 낯빛이 거만해진 것 같아. 여전히 하얀 저 얼굴과 족제비 같은 눈.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상현은 홀로 외로운 싸움을 고집했다. 그렇게 힐끗거리고 있는데 앉아서 술잔을 받아먹고 있던 한수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다가오기 시작했다. 상현은 시선을 주위로 돌려 외면했지만 더 가까이 다가오는 한수를 끝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이, 이 선생님! 술 한잔해야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한수가 상현 맞은 편에 앉았다.
"그, 그래. 그럽시다."
상현은 말이 불편했다. 말을 놓기도 그렇고 존댓말을 쓰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병원도 아닌데 편하게 좀 있어라. 자, 한잔 받아. 정말 오랜만이다. 이렇게 다시 만날 줄 알았다면 학교 다닐 때 좀 더 친해 놓는 건데."
"그, 그러게."
한수는 허물없이 말하는 듯 했지만 상현은 왠지 뒷덜미가 묵직해졌다. 둘은 옛 이야기를 몇 점 꺼내어 술을 몇 잔 더 마셨다.
상현은 언제부터 흥청망청 마시기 시작했는지 기억도 나지가 않았다. 다만 눈을 떴을 때 엄습해온 것은 오늘도 늦었구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의국회의 전에 해야만 하는 일들은 뒤로하더라도 회의마저 늦을 판이었다. 부랴부랴 가운을 걸치고 의국으로 달려들어갔다. 다행이 늦지는 않았지만 직무유기를 면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네 왜 그래?"
신 교수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상현은 고개를 숙였다. 히히 웃으면서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분위기였던 적은 유사이래 한번도 없었다.
"병원 생활하기 싫어? 어제 술 마셨다고 오늘 일 안 해도 되는 거야?"
드디어 죄송하다고 말할 기회가 왔다. 그런데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마지막 경고야. 한번 더 일 펑크내면 각오해."
"예. 알겠습니다."
상현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런데 교수들과 나란히 앉아서 미소를 띠고 있는 한수가 보였다. 어제 분명히 한수가 2차를 가자고 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 어디로 갔는지 언제까지 마셨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왠지 모를 패배감이 가슴 한 쪽을 쓸고 지나갔다. 입이 말라왔다. 급히 나오느라 신경도 쓰지 못한 터라 수분이 부족했다. 호흡에 묻은 술 냄새가 어제의 흔적으로 남아 상현을 더 괴롭게 했다. 이젠 술 먹고 실수한 것에 대한 괴로움쯤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이상하게 잠도 오지 않을 만큼 화가 났다.
의국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벌겋게 충혈된 눈을 간직했던 상현은 끝나자마자 밖으로 나와 복도 끝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병원 밖의 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숨쉬고 싶었다. 병원의 퀘퀘한 세균투성이의 공기가 아닌 신선하고 활기가 실려있는 공기가 필요했다. 땅 끝을 지키고 있는 산들과 어렴풋이 보이는 호숫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다른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영준이었다.
"뭐해?"
짧은 한마디를 던지며 조심스럽게 접촉을 시도하는 영준의 마음을 상현은 알고 있었다. 위로.
"어제 많이 취한 거 같더니. 또 늦었군."
"기억이 나지를 않네. 어떻게 된 거지?"
"2차 간 거는 기억 나냐? 거기서 한 시간 정도 김한수 선생하고 마시다가 김선생은 전화가 와서 먼저 갔고, 넌 남았는데 그때부터 갑자기 취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 둘이 꽤 많이 마셨었거든. 기억 안나?"
"전혀. 그런데 한수는 중간에 왜 갔어?"
"모르지. 전화 받더니 일이 있다고 먼저 갔는데 어떻게 알겠냐?"
"한수가 먼저 2차 가자고 한 걸로 아는데?"
"그건 기억이 나는 모양이군. 그런데 술값도 안 내고 그냥 갔더라.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깜박한 모양이야."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상현이 심각한 표정을 하며 말했다.
"네 예감은 항상, 맞은 적이 없지. 안 그래?"
영준이 웃으며 말했다.
점심시간이 되었기에 상현은 영준을 찾아 식당으로 향했다. 식판에 밥을 타고 자리 경쟁이 치열한 틈을 타 앉았는데 마침 2시 방향으로 한수의 모습이 보였다. 한수도 상현을 보았지만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았을 뿐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앞에 앉은 교수와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바빠 보였다. 그는 하얗고 맑은 미소를 지으며 성대를 저음으로 길게 떨면서 웃었다. 상현이 언뜻 듣기에는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닌 것 같았는데 그렇게 웃음으로써 윗사람에게 겸손하게 보이고 윗사람의 말에 절대적인 관심과 호응을 표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친놈."
상현은 괜히 욕을 했다.
"왜 그래 또?"
영준이 말하며 상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한수를 찾아냈다.
"너,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밥이나 먹자."
곧 싸우기라고 할 것처럼 전의를 불태우는 상현을 영준이 다독거렸다.
"아까도 말했잖아.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 아무래도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
"후후, 아무튼 너도 웃기는 구석이 있다니까."
눈이 많이 내리는 밤이었다. 저녁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젠 제법 쌓여 길을 막아가고 있다. 고속도로 여기저기가 단절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버스가 못 다니게 되었다는 둥, 계속해서 눈 소식이 전해졌다.
상현이 숙소에 들어섰을 때 영준은 무언가에 열중이었다. 그 시간에 일에 열심일 사람이 아닌데 상현은 의아해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지 말았어야 했을까. 한수가 개인적으로 시킨 일이라는 것을 알고 상현은 광분했다.
"됐어. 왜 네가 더 야단이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위에서 내려오는 일이 하루 이틀이냐?"
영준이 태연하게 말하자 상현은 더욱 울화가 치미는 듯 으르렁거렸다.
"아냐, 분명히 뭔가 있어. 아마도 형이 나랑 친하기 때문에 타깃이 된 거야. 그렇지 않고선 이따위 일을 형한테 시킬 이유가 없지!"
하지만 화를 내 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영준은 웃으며 연신 그만두라고 말했다. 화를 삭히려는 듯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상현은 눈이 잘도 온다며 딴 소리를 하다가 붕어빵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왜, 물고기를 아주 씹어버리게?"
영준의 말에 상현은 웃고 말았다.
눈발을 얼굴에 맞으며 둘만의 포장마차로 갔을 때 주인은 막 정리를 하려던 참인 것 같았다.
"아이구, 오셨어요?"
주인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 지나칠 만큼의 인사를 해왔다.
"네. 들어가시려고요?"
영준이 묻자 주인은 아니라며 재빨리 붕어빵을 굽기 시작했다. 붕어빵이 익는 동안 상현은 어묵 국물을 종이컵에 따라 놓고 몇 개 남지 않은 어묵을 집어들었다.
"국물이 좀, 식었을 텐데요."
주인이 희미하게 밝히고 있는 촛불 사이로 미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저흰 식은 것도 잘 먹어요."
영준이 웃으면서 말하자 주인도 안심한 듯 다시 붕어빵이 들어 있는 빵 틀을 뒤집었다. 급한 나머지 약간 덜 익은 듯한 붕어빵 두개를 우선 철망 위에 올려놓았지만 상현도 영준도 아무 말 없이 붕어빵을 집어들었다.
"물고기 많이 먹어."
영준이 방금 전의 유머를 재연했다. 두 사람만이 아는 유머였지만 확실히 재미가 있었다. 몇 개를 더 먹고 틀에 들어있는 나머지 붕어들을 봉지에 싸서 병원으로 향했다.
"처음 건 약간 덜 익었지?"
영준이 상현에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회라고 생각하고 먹으면 되잖아요."
"그런가? 하하하. 웃긴다."
"앞으로 저 포장마차를 어부네 라고 불러요. 주인은 어부고."
"왜?"
"붕어를 잡아서 팔잖아요. 물고기로 만든 어묵도 팔고."
"그렇군. 이거 갖다가 김 선생 좀 드려."
영준이 붕어빵이 담긴 종이봉투를 보이며 말했다.
"안 먹을 걸요. 같은 물고기끼리."
두 사람은 서로의 유치한 말장난에 웃으며 병원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은 한수를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가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하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대신 그런 물밑 소문은 간호사들과 레지던트들에게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독사야, 독사."
"전혀 순둥이가 아냐. 조심해라."
"그렇게 안 생겼던데. 아무튼 사람은 알다가도 모를 존재라니까."
여기저기에서 평판이 스며 나왔지만 공식적으로 그에게 낙인을 찍을 방법은 없었다. 그는 외줄 타기를 하는 사람처럼 앞을 보고 있었고 뒤를 돌아볼 줄 몰랐으나 그 줄타기를 아주 잘하기 때문에 절대로 떨어지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계급사회인 병원에서 그보다 말발이 서지 않는 사람으로써 면상에 대고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또한 한수도 자신의 일에 실수한다거나 하는 어수룩한 자가 아니었다.
"거봐. 내가 전에 예견했었잖아. 뭔가 이상하다고 했지."
상현이 단골이 된 어부네 포장마차에서 한 손에 붕어빵을 들고 영준에게 말했다.
"그러게 말야. 나도 설마 했는데 정말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네. 당연히 알 수가 없지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까. 그래도 몇 개월 넘게 같이 일하다보니까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거 아냐."
"그야 그렇지. 아, 왜 하필 하고많은 병원 중에서 우리 병원으로 와 가지고 사람 힘들게 만드는 거야."
상현이 뜨거운 어묵을 문 체 입으로 하얀 김을 뿜으며 말했다.
"네 이론대로라면."
"이론대로라면?"
"당연히 너에게 복수를 하러 온 거겠지. 안 그래?"
영준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웃자고 던진 농담일 뿐인데 상현의 반응은 그렇지가 않았다.
"...맞아. 그럴지도 몰라. 지금의 상태로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녀석인 것 같애."
"농담이야. 정신차려."
영준이 뒤늦게 주워담으려 했지만 이미 상현은 굳게 믿어버린 듯 했다. 지갑을 꺼내 어부에게 이천 원을 건네자 거스름돈을 주었지만 상현은 생각에 몰두하는 듯 받지 않았다.
"아이구, 받아 가셔야는데."
어부가 빵 틀 뒤에서 나와 몇 걸음 따라나서며 말했지만 영준이 괜찮다며 손을 흔들었다.
12월 31일. 하루만 더 지나면 새해가 되는 아침이었다. 날짜의 흐름 속에 특별히 기념일을 지킨다거나 자유롭게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마음만은 홀가분한 날이었다. 내년이 되면 2년차로 올라가고 밑에 1년차도 들어오고, 그러면 일도 좀 줄어들고 오프도 늘어날 테고. 상현은 모처럼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아침 일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런 자존심 상하고 기분 잡치는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회진을 도는 중이었다. 교수와 한수, 상현과 인턴 뒤로 실습 나온 학생들까지 줄을 잇고 있어서 실로 대대적인 행렬이었다. 중환자실에 들어섰고 간염 말기인 환자 앞에 군집했다.
"복수가 많이 찬 것 같구먼."
노교수가 배를 만져보며 말했다.
"아, 네. 교수님."
한수가 우아한 목소리로 나섰다. 하지만 상현의 귀에는 가증스럽게만 들렸다. 정말로 귀를 거스른다는 말처럼 한수의 목소리가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일정한 목소리가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소리였는데, 지금처럼 위에다 대고 말할 때는 한없이 부드럽고 순종적인 것으로 변했고 밑에다 지껄일 때는 막무가내, 얼음, 암흑 그 자체였다. 바로 그 점이 상현이 실망한 것이었다. 이기적인 것을 벗어나 이중적으로 발전한 간신배의 목소리에 아침부터 귀를 잘라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건강에 해롭다. 건강에 해롭다 하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하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물리적으로는 아무 일이 없어서 중환자실은 평온해 보였지만 상현의 정신 세계에서는 커다란 스트레스를 해결하느라 신체 전해질 균형이 깨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스트레스 호르몬을 과다하게 분비하느라 세포들은 허덕이고있었다.
"천자를 좀 해볼까."
"예. 선생님, 저희가 하겠습니다. 이상현 선생, 복수천자 좀 해요."
어느새 나선다 했더니 갑작스럽게 상현에게 천자를 떠넘기자 상현은 좀 얼떨떨했다가 다시 화가 났다. 한다고 했으면 자기가 하지 왜 떠 넘기냐는 것이다. 상현은 대답도 안하고 주사기와 소독 솜을 준비해 환자의 옆으로 가서 섰다. 많이 해본 수기였기 때문에 부담 없이 환자의 하복부에 조심스럽게 바늘을 밀어 넣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나와야 할 복수는 나오지 않고 주위의 시선만 뜨겁게 달아올랐다.
두 번, 서번, 여전히 복수는 나오지 않고 상현의 이마에서 땀만 나왔다.
"이상하다. 많이 찼을 텐데 왜 안 나오지."
읊조리듯 쉽사리 말하는 노교수. 그때 다시 한수의 복수가 이어졌다.
"비켜봐요. 내가 할 테니까 이거나 누르고 있어요."
동작도 빠르게 새 주사기를 꺼내온 한수가 상현을 밀쳐내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현은 일순간에 자존심을 엉망으로 구기며 한편으로 물러섰다. 혈압이 폭등해서 뒷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것 같았다. 학생들까지 지켜보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정말로 대망신이었다.
'나오지 마라. 나오지 마라. 안 나온다. 절대로, 제발...'
상현은 가슴속으로 처절하게 기도했다. 한수가 실패해야만 본전이라도 찾을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기라도 치는 것처럼 한수가 밀어 넣은 주사기에 검은 흙색의 복수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뭐가 이러냐.'
상현은 분노했다. 학생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았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런 건 둘째 치고라도 상황을 그렇게까지 이끌 필요가 있냐는 생각에 한수를 죽이고만 싶었다. 그런 상현에게 한수는 마지막까지 최소한의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이 선생이 아직 감이 잘 안 서나 봅니다."
방금 전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예의바르고 겸손의 탈을 쓴 목소리로 노교수에게 고하는 한수. 상현은 차라리 한 줌 먼지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지고 싶었다.
차마 사라질 수 없었기에 간신히 회진을 마치고 의국으로 돌아온 상현은 만신창이가 된 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눈을 감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다행이 같은 연차로 근무하고 있는 승환이었다.
"형, 뭐해요?"
"어. 잠깐 쉬고 있었어. 아침부터 피곤해서."
"그래요? 나도 쉬러 왔는데. 차 한잔 드릴까요? 뭐 드시겠어요?"
"아무거나 주라."
상현은 아직도 머리가 무거운 듯 머리를 뒤로 젖히고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저, 김한수 선생님하고 동창이라면서요?"
지워버리고 싶은 그 이름을 다시 꺼내자 상현은 뜨려던 눈을 다시 감아 빛을 거부한 채 대답했다.
"어, 왜?"
"어떤 분이세요? 제가 볼 때는 평판이 별로 좋지는 않던데."
상현은 갑자기 후배가 사랑스러워졌다. 그런 눈이 번쩍 뜨이는 소리를 해주다니. 평소 승환이 기분을 잘 맞춰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재인식되었다.
"좀, 그래. 말하기도 뭐하고. 왜, 무슨 일 있었냐?"
"전에 김한수 선생님이 있던 병원에 아는 친구가 있어서 물어봤거든요."
승환이 상현 앞에 녹차 티백이 담긴 컵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쪽에서도 말리그(malignant)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겪어보면 진짜 괴팍하다고 그러던데요."
상현이 한수를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승환은 시원스럽게 한수의 험담을 했다. 상현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만족스러웠다.
"그래? 나도 고등학교 때 보고 10년만에 보는 거라서 잘은 몰라. 근데 나하고도 맞지는 않는 거 같더라."
상현은 조심스럽게 승환이 말에 지지를 보냈다.
"아, 그렇구나. 제가 보니까 아부를 너무 잘 하시는 거 같아요. 몸에 밴 것 같던데요. 허허허."
승환이 특유의 너털웃음을 펼쳐놓았다. 상현은 녹차가 맛있어졌다.
"너한테도 일 많이 시키지?"
"네. 미치겠어요. 꼭 자기 개인적인 일을 밑에 사람한테 다 시키려고 한다니까요. 형 동창이라서 뭐라고 욕은 못 하겠지만 아무튼 좀 심해요. 어! 형, 저 먼저 가볼게요. 10시에 뭐 해달라고 했는데 시간이 벌써 다 됐네."
"어, 그래. 수고해."
승환이 다 마신 종이컵을 휴지통에 버리며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들어왔다가 간 뒤로 상현은 무거웠던 머리가 맑아졌고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자식, 명의가 될 가능성이 있어.'
밤 10시가 되어서야 숙소에 잠시 앉을 기회를 맞이한 상현은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영준은 피곤했는지 상현이 들어왔을 때부터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잠시 후 TV옆에 놓아둔 상현의 핸드폰이 경쾌하게 울렸다.
"왜 또 찾으시나? 여보세요."
상현은 또 병동에서 찾으려니 생각하고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전화를 건 사람은 한수였다.
"어, 나야. 바빠?"
"아, 아냐. 말해. 무슨 일로?"
상현은 대수롭지 않게 답을 했지만 예감은 좋지가 못했다.
"다른 게 아니고, 내일 아침 의국회의 하기 전에, 한 7시쯤? 내방으로 와줄래. 좀 부탁할 게 있어서."
"음? 그래? 무슨 일인데?"
상현의 목소리가 살짝 꼬여버렸다. 하지만 한수는 계속 여유 있고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내일 아침에 알려줄 테니까, 잊지 말고 와라."
"그래. 알았어."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그럴까봐 얼른 전화를 끊었다. 그제야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에이, 씨발. 자식이 왜 오라 가라야! 진짜 너무 하네."
한수의 욕지거리 때문인지 아니면 미리부터 깨어있던 건지 영준이 침대에서 일어나 담배를 물었다.
"왜 또 그래? 무슨 일이야?"
상현이 고개를 돌려 영준을 보았으나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금방 말을 잇지 못했다.
"한수 새끼가 내일 아침에 자기 방으로 오래. 시킬 일이 있다고."
상현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영준이 혀를 차다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쯧쯧, 어쩌냐. 네가 참어 열내면 너만 더 손해지. 그래도 스텝인데 어떡하겠냐."
"지가 아무리 스텝이라도 갓 전문의 딴 주제밖에 더 되냐고. 그리고 나하고 동창이면서 그럴 수가 있는 거야! 진짜 인간이 밉다 미워."
"침착해라. 흥분하면 싸움에서 지는 거야. 네가 열내고 화내고 흥분하는 게 김 선생이 노리고 있는 거 아니겠어."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는 진정 쉽지가 않았다. 상현은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아, 배고프다. 그러지 말고 국물이나 좀 먹으러 가자. 소주 한 병만 사 가지고 가서 어묵이랑 먹으면 딱 이겠다. 그만 화 풀어. 화내봤자 너만 더 손해라니까."
어부네 포장마차에 선 영준은 주인에게 소주병을 흔들어 보이며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주인은 환하게 웃으면서 먹으라고 손짓을 했다. 영준이 주인장도 한잔하라고 종이컵을 내밀었지만 주인은 쉽게 받지 않다가 억지로 손에 쥐어주자 할 수 없이 입만 살짝 대고 리어카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도대체 이번에는 무슨 일을 시킬지 정말 고민된다."
상현이 술을 홀짝거리며.
"그러게. 둘의 관계가 정말 웃긴다. 10년만에 복수를 위해 나타난 친구. 그 친구에게 철저히 짓밟히는 친구. 하하."
소주는 벌써 삼분의 이 가량이 비워졌고 영준은 약간은 기분이 좋아진 듯 싱글벙글 이었다.
"복수는 무슨 복수야. 내가 그럴만한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어디까지나 그 놈 성격이 뒤틀린 게 문제야. 이젠 다른 사람들도 다 알던데 뭐."
"모르는 사람들도 있어."
"그래, 걔보다 위에 있는 교수들은 당연히 모르지. 그들에게는 항상 상냥하니까. 그래도 정말 사람 볼 줄 아는 교수는 알 거야. 알면서도 뭐라고 할 수 없는 거겠지."
"그렇겠지."
"아휴-. 진짜 걔 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붕어빵과 어묵과 물고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별안간 제 3의 인물이 돌발적으로 대화에 개입했다.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인데 어부가 두 사람의 개인적인 일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그때까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그는 아주 공손한 얼굴을 약간 앞으로 들이밀면서 말했는데 그러자 입술 위의 수술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예? 아, 아뇨. 그냥 누구 흉 좀 보느라고요."
영준이 대답을 금방 잘 해냈다.
"예. 아주 끔찍한 놈이 있어요."
영준이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상현이 술기운이 올랐는지 상관도 없는 주인에게 마음속에 담은 소리를 털어놓았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을 만큼 저를 미치게 만들고 있죠."
"정말 심각한 모양이네요."
이번에는 주인이 대구를 하며 상현의 말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건 상담을 해주는 것처럼 진지하고 포용적인 목소리였는데 어수룩해 보이던 주인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두 사람 다 알지 못했었다.
"어쩌면 좋죠?"
상현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니 넋두리라도 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러자 몇 초 정도 지난 후에 주인은 붕어빵 하나를 집어들어 상현에게 내밀었다. 어리둥절하기는 상현뿐 아니라 영준도 마찬가지였다.
"이거나 먹으라고요?"
상현이 말하자 주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뇨. 이걸 그 사람 방문에 붙여 놓으세요."
그뿐이었다. 주인이 다른 말도 없이 계속해서 붕어빵을 들고 있는 터라 자연스럽게 붕어빵을 넘겨받은 상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걔 별명이 물고기라는 걸 아저씨가 어떻게 아셨지. 방문에 붙이면 그야말로 문패가 되겠는걸."
옆에 있던 영준도 웃음을 터뜨렸고 주인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주인 아저씨 참 재미있으시네."
상현이 남아 있던 술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그리곤 넘겨받은 붕어빵을 성의껏 손에 들고 병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걸으면서도 계속 웃고 있는 상현에게 영준은 그러다가 정말로 실행에 옮기겠다고 말했다.
"못할 것도 없지."
상현은 갑자기 오기가 생겨났다.
"그럼 당장에 네가 한 걸 알 텐데도."
"그래봤자 지가 어떻게 하겠어. 어차피 이제는 막 가는 거야."
병원에 들어서 교수 연구동 쪽으로 향하는 상현을 영준이 몇 번 말렸지만 상현은 끝내 유치한 장난을 치기 위해 영준을 숙소로 혼자 보내고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이걸 뭘로 붙이나.'
자정이 가까운 병원은 불이 꺼져 더욱 을씨년스러웠고 간혹 복도 의자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보호자들이 지나가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들고 있었다.
간호 스테이션에서 압정을 발견한 상현은 그것이 딱 맞겠다고 생각했다. 반창고나 다른 접착제는 어울리지가 않는다. 차라리 못이나 송곳, 이런 것들이 어울릴 것이다. 그래 압정 두 개를 조심스레 손에 들고 한수의 방으로 향했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방이 몇 개 있어서 조심스럽게 한수의 방까지 다가갔다. 그런데 한수의 방에도 아직 불이 켜져 있어서 상현은 더욱 숨을 죽여야 했다.
'뭐야, 아직 안 간 거야, 불을 켜놓고 간 거야? 아무튼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니까.'
잠시 망설이던 상현은 주머니에 고이 간직했던 붕어빵을 꺼내 문에 대고 정 중앙에 압정을 갖다 댔다. 그러나 워낙 소리나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상태여서 쉽게 압정이 박히지 않았다. 오른 손 엄지손가락 하나에 온몸의 힘을 집중해서 압정 머리를 누르자 붕어빵을 꿰고 있던 심이 나무에 스르륵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쾌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안에서 바스락거리며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자 상현은 첩보원과 같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복도를 미끄러지듯이 달려 모퉁이를 돌아 몸을 숨겼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자 상현은 어둠 속에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한수의 모습이 분명했다. 한수는 복도 양쪽을 한번씩 쳐다보더니 다시 방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갔는데 다행이 자신의 문패를 보지는 못한 것 같았다. 상현은 한숨을 내쉬며 오줌이 찔끔 나올 것 같은 스릴을 풀어버렸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상현은 쉽게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눈을 거의 감은 채 화장실을 거쳐 샤워장으로 걸어갔다. 몇 분 동안 더운물을 뒤집어쓰고서야 잠이 깬 상현은 가운을 걸치고 병동으로 향했다.
한시간 가량 환자를 살핀 상현은 한수의 호출을 잊지 않고 연구동으로 향했다. 어제 벌인 유치한 장난을 생각하니 쑥스러웠다. 한수가 또 뭐라고 캐묻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런 생각은 한수의 방 앞에 도착했을 때 최고조가 되었는데 붙여 놓았던 붕어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수가 붕어빵을 자신에게 집어던지는 상상을 하며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뭐야, 오라고 해놓고 어디 간 거야."
다시 한번 노크를 하고 아무런 대답도 없자 상현은 문고리를 돌려보았다. 스르르 돌아가는 문고리, 그리고 아무런 저항 없이 열리는 한수의 방문. 그 안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책상과 간이 침대, 컴퓨터, 작은 냉장고, 책들과 서류들 더하기 잡동사니가 어지럽지만 정교하게 배치된 그 방에 한수만 없었다. 대신 상현이 방에 딸린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물고기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건 또 뭐냐?"
이른 아침에 생선은 더 비린 냄새가 났다.
"설마 이걸 어떻게 하라고 불렀던 건 아니겠지.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상현은 그냥 방을 나가버리려고 했지만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는 물고기가 눈 끝을 붙잡고 늘어졌다. 상현이 다시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세면대에 물을 받았다.
"이런 걸 왜 바닥에 놓은 거야."
물이 받아지자 상현은 바닥에 있던 물고기를 두 손으로 집어 올려 세면대 안에 넣었다. 그러자 금방 생기를 찾은 듯 활기차게 움직이는 물고기를 뒤로하고 상현은 한수의 방을 나왔다.
의국회의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한수가 나타나지 않자 상현을 비롯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연락을 해보았지만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한수 없이 진행된 의국회의가 끝나자 신교수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신 교수는 상현을 지목했다. 신 교수는 상현이 동창이니 한번 찾아보라고 무슨 일인지 알아 보라 했다. 대답을 했지만 상현은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속으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고생시키는 한수를 원망했다.
오전 내내 틈틈이 전화를 해보았지만 한수는 받지 않았다. 신호가 가는 걸 보면 핸드폰을 꺼놓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상현은 무슨 일인지 조금은 궁금해지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상상을 떠올렸다. 그 중에는 지난밤에 했던 '유치한 장난'도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한수가 사라졌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붕어빵을 건네며 알 수 없는 얼굴이었던 어부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점심식사를 하기 전에 상현은 한수의 방에 다시 들렀다. 여전히 방문을 잠겨있지 않았고 아침에 본 그대로 한수의 흔적은 없는 상태였다. 이상한 것은 화장실에 있어야 할 중간 크기의 물고기가 없어진 것이었다. 한수가 가져간 것일까. 상현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수의 책상 위를 차지하고 있는 서류들을 뒤적거리다가 방을 나왔다.
한수가 사라진 것은 당시에 큰 이슈로 떠올랐다. 경찰까지 나와서 조사를 하고 갔을 정도니 소문이 빠른 병원 안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의 대화에 오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런 흔적이나 단서도 없이 하룻밤사이에 행적을 감춘 사건은 온갖 추측과 추리와 견해가 난무하게 만들었고, 현상금을 걸었다는 둥 아니라는 둥 없는 얘기까지 추가되어 한편의 책으로 만들어도 될 만큼 한수의 일대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나 단기간에 그치고 말았다. 아무리 큰 사건이 일어났다 해도 약간의 시간만 주워진다면 누구나 무심해지고 쉽게 잊어버렸다. 몇 달이 지나자 한수가 사라진 사건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상현을 비롯한 병원 사람들은 각자의 일로 바쁘게 살아갈 뿐이었다. 상현은 가끔 궁금증이 돋아나긴 했지만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한수가 없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하고 더 이상 친구의 행로에 관심을 갖지 않기로 했다.
어느덧 잊혀진 이름이여.
계절은 바뀌고 사람은 시간을 먹으며 모든 것은 변해갔다. 아픈 사람은 계속해서 생겨났고 상현을 비롯한 의사들은 그들을 치료하거나 혹은 사망선고를 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면 또 다른 환자들이 찾아오고, 그것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무한궤도처럼 혹은 윤회의 수레바퀴처럼, 사람은 그 한순간을 채우고 있는 보잘것없이 가벼운 존재처럼, 실제로 변한 것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너였다면 언젠가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또 다른 내가 되는 것이다.
구름이 끼고 서늘한 바람이 상공에서 치고 내려오는 게 눈이 올 것 같은 날. 상현은 주말 오프를 나가기 위해 서둘러 병동 일을 끝마치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병동에 들러 자신이 내린 처방들이 잘 이행되었는지 만 확인하면 1박 2일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운을 벗고 외출복까지 챙겨 입고 병동에 도착했을 때 자신이 내린 지시사항이 반도 채 이행되지 않은 것을 보고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병섭이 어디 갔어요?"
상현이 병동 간호사에게 물었다. 너무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그러자 뒤틀린 분위기를 감지한 간호사는 금방 호출해드리겠다며 전화기를 들었고 전화를 끊은 지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병섭이 걸어왔다. 병섭도 병동에 흐르는 이상기류를 감지하고 숙연한 표정이 되었다.
"야, 너 뭐하냐?"
상현이 다짜고짜 물었다.
"예?"
병섭은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긁적이며 상현에게 다가갔다.
"너, 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상현의 목소리가 높고 거칠어졌다. 병섭은 고개만 숙일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일이 좀 밀려놔서..."
"서둘러서 빠릿빠릿하게 하면 왜 밀려, 좀 뛰어 다녀라 1년차가 어딜 그렇게 처박혀 있는 거야!"
상현은 좀 심하다 싶었지만 평소부터 병섭을 좋아하지 못했다. 병섭이 워낙 말이 없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병섭의 스타일이고 성격 탓이겠지만 다른 사람과 융화되어서 일하기엔 조금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죄송합니다."
병섭이 또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지만 상현은 그런 소리마저 듣기가 싫었다.
"너 같은 놈이 조용하다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거야. 수동적으로 살지 말고 좀 적극적으로 해라. 빨리 일 끝마치고 다 되는 대로 전화해."
상현은 그렇게 말하고 미련 없이 일어났다. 병동을 나가는 상현에게 병섭은 꾸벅 인사를 했지만 상현이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히죽 웃었다.
상현이 다른 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동기 관우를 만나 저녁을 먹은 후에 조용한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서야 병섭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렇지 않아도 저녁을 먹을 때 아직까지도 전화가 오지 않는다고 관우에게 병섭의 흠을 잡았었다.
"너 지금 몇 시냐?"
상현의 말꼬리가 미끄럽게 꼬부라졌다. 전화기 밖으로 병섭의 당황하는 목소리를 들은 관우가 붉어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일을 다 마쳤다는 말을 듣고 상현은 앞으로 지켜볼 테니 똑바로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이 자식 진짜 어리버리하다니까."
상현이 잔을 들어 관우에게 권하며 말했다.
자정이 넘어서 술집을 나온 상현은 관우를 먼저 보내고 택시를 잡았다. 허나 갈 곳이라곤 병원 숙소밖에 없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더 만날 사람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숙소로 돌아가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반쯤 갔을 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여러 겹으로 붙어 있는 함박눈이 공간을 가득 채울 기세로 하염없이 쏟아졌다. 병원 정문에서 택시에서 내린 다음 숙소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눈은 벌써 쌓이기 시작해 밟을 때마다 뿌지직하고 소리를 낼 정도였다.
불이 꺼진 복도를 걸어 방문 앞에 도달했을 때 술이 많이 취했지만 상현은 분명히 방문 앞에 매달려 있는 붕어빵을 목격했다.
"뭐야, 씨발."
상현은 가차없이 그것을 떼어내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외투를 벗은 다음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어떤 놈이 장난치는......"
입 속을 맴도는 중얼거림을 다 뱉어내지 못하고 잠에 빠졌다.
그날 아침은 다른 날과 달리 눈을 떴을 때 남아있는 술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뜬 상현은 잠시동안 천장을 응시하며 그대로 누워있었다. 다시 잠이 들지도 않았고 몸은 이불 속에 담긴 채 온전히 각성된 상태였다. 일요일인데 무엇을 할까. 아무 것도 없었다. 일어나야 하나.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누워있어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이불을 걷어내고 슬리퍼를 신고 욕실로 들어가 아침 첫 소변을 보았다. 바지를 올리고 세면대 앞에 선 상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마주쳤을 때 거울이 더러워진 건지 자기 얼굴이 지저분한 건지 금방 깨닫지 못했다. 눈을 부릅뜨고 얼굴을 거울 가까이 가져갔다. 거기 거울 안에는 부스럼이 지배하는 것 같은 각질투성이의 얼굴이 들어있었다. 그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서 조금 있으면 피부가 갈라지고 피가 나올 것만 같았다. 얼굴을 양쪽으로 돌려보다가 심히 불쾌함을 느낀 상현은 손으로 양쪽 볼을 만져보았다.
그때 그 껄끄러움과 동시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손을 본 상현은 놀라움의 헉하는 소리가 가슴속에서부터 흘러나와 주체하지 못하고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거울에 비친 손은 손가락 사이가 붙어 있는 괴이한 모습이었다. 재빨리 거울을 벗어나 실제 눈으로 확인한 상현의 손은.
얼굴처럼 갈라지고 있었고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물갈퀴처럼 붙어 있었다. 아니 점점 붙어가고 있었다. 피부도 계속해서 갈라지고 있었다. 상현은 변해가고 있었다.
저는 이 민 구
주소 충남 천안시 안서동 468-6 도솔빌리지 1-102호
전화 016-601-2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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